112화.
화의 기간 중에 릴리엔에게 초대장이 오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릴리엔은 이 제국에서 황후 다음으로 지체 높은 여성이었다. 릴리에이 참석하는 말든 초대장은 일단 보내는 게 예의였다.
그런 이유로 안 그래도 많이 오던 각종 초청장이 개회연 마지막 날 이후로는 말 그대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대공 전하를 사로잡은 화제의 대공비와 말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어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닥치는 대로 초대장을 보냈다.
그 모든 초대장에 짤막하게라도 답장을 하는 게 릴리에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 도착한 우편물 중 하나는 황실을 뜻하는 금빛 봉투에 담겨 있었고, 다른 하나는 낮이 익은 붉은색 봉투였다.
모린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여자가 보낸 초대장이군요.”
부인의 예상대로 붉은색 봉투에 담긴 초대장은 레이첼이 보낸 것이었다.
다행히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이번 무도회에 참석하여 축하의 뜻으로 자리를 빛내 주시길 바란다.'는 간단한 문구가 적혀 있는 단순한 초대장일 뿐이었다.
그러나 모린 부인은 화를 참지 못하고 얼굴까지 붉혔다.
“뻔뻔하긴!”
감히 황제와 황후 다음으로 지엄하신 분을 정부 노릇으로 백작위를 받은 걸 축하하는 자리에 부르다니!
“진정하세요, 부인. 안 가면 그만이니까요.”
지체가 높은 덕에 릴리엔은 대부분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이 초청장은 거절하기 힘들 수도 있겠어.'
릴리엔은 황실에서 온 봉투를 집어 들었다. 밀랍에 찍힌 인장이 어딘지 낯설었다.
“이건…….”
모린 부인이 들여다보고 깜짝놀랐다.
“세상에, 아라티네 황후 폐하의 인장입니다.”
조용히 칩거하고 있는 황후가 보낸 우편물이 레이첼 부인의 초대장과 한날한시에 도착하다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릴리엔 일단 봉투를 뜯어보았다.
간단하게 안부를 묻는 말 아래 '함께 담소를 나누고 싶으니 지목한 날짜에 자신을 방문해 준다면 고맙겠다.'는 형식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문제가 될 만한 구석은 없었지만 공교로운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 여자의 축하 파티와 날짜가 겹치는군요.”
"그러게요…….”
릴리엔이 레이첼의 초대를 거절하는 건 그다지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레이첼의 초대를 거절하고 아라티네의 초대에 응하면 구설수를 피할 수 없게 될 터였다.
이미 레이첼은 마리앤과 에단을 이용해서 릴리엔을 귀찮게 한 전적이 있었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면 더한 일을 꾸밀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후 폐하의 초대에 기쁘게 응하겠다는 답장을 써야겠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이첼 부인 때문에 황후 폐하의 초대를 거절하면 더 우스운 꼴이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마 다들 릴리엔이 레이첼 부인 앞에서 몸을 사린다고 수군거릴 게 뻔했다.
“그렇기야 합니다만…….”
모린 부인은 복잡한 눈빛이었지만 릴리에에게는 다른 계산도 있었다.
튜린과 헤멘린나, 그리고 이카난. 이 중에서 이카난 선제후의 손녀는 마테오와 태중 약혼을 한약혼녀였다.
이 셋을 제외한 나머지 중에서 황태자를 지지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역시 카스타나 선제후였다.
안 그래도 카스타나 선제후를 움직이려면 아라티네 황후를 만나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저쪽에서 기회를 준다는데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그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릴리엔의 논리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모린 부인은 석연찮은 기색이었다.
“왜 그러시나요?"
부인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 아라티네 황후 폐하께서는 심신 양쪽이 굉장히 유약하신 분입니다.”
“그렇군요.”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아마 비전하께서 가셔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는 어려우실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여기까지만 아뢰겠습니다. 이 이상 말씀드리면 제 사견이 반영되어 험담이 될 것 같군요.”
모린 부인은 말을 아꼈다. 릴리 엔은 아라티네의 명예를 위해서, 가 아니라 마테오의 명예를 위해 서인 것 같다고 짐작하고 더 물지 않았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수확이 없을 경우에 대비해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할게요.”
* * *
시간이 흘러 초대를 받은 날이 다가왔다.
릴리엔은 이른 오후에 출발했지만 이미 황궁으로 가는 길은 레이첼의 무도회에 참석하려는 마차들로 가득했다.
“준비를 엄청나게 많이 했대요.
낮에는 연극과 연주회가 있고 무도회 중간에는 오페라 가수들을 초대해서 공연까지 동시에 진행한대요.”
“짧은 시간이었는데 정말 대단하구나.”
“대단히 사치스러운 거죠.”
“솔라리아.”
일라시아가 나지막이 주의를 주자 솔라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일라시아가 한숨을 쉬곤 릴리에을 향해 물었다.
“정말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릴리엔이 황후에게 초대받았다.
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라니스터후작가의 두 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기들도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내 대답은 전과 똑같아요, 일라시아. 고맙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고맙지만 황족이자 대공비인 릴리엔과 라니스터 자매는 입장 자체가 다르다.
릴리엔이야 여차하면 서열로 찍어 누를 수 있지만 자매는 그럴 수 없었다.
물론 두 사람은 수도 없이 릴리 엔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릴리엔이 한번 아닌 건 절대 아닌 튜린 사람이라는 것만 거듭 확인했을 뿐이었다.
결국 솔라리아가 고집을 부려 릴리에이 타고 갈 마차 안까지만 동행하기로 했다.
혼잡한 거리였지만 대공가의 마차를 보자 모두들 길을 터 주었다. 마차는 순식간에 황후궁에 도착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비전하."
“네, 둘 다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아주 예리한 인상의 여자 기사가 릴리엔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키리에 경, 고마워요.”
예의 습격 사건으로 경호 인력이 전체적으로 점검에 들어가면서, 새로 릴리엔에게 배정된 호위 기사였다.
“아닙니다, 비전하."
딱딱한 대꾸가 언뜻 무례하게 들릴 정도였다. 릴리엔은 그녀가 긴장했음을 눈치채고 충고했다.
“힘을 푸세요, 경. 경의 기세가 날카로우면 황후궁의 사람들이 나를 경계할지도 몰라요."
"…아, 예. 즉시 시정하겠습니다.”
“그럼 가볼까요.”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황후 궁의 시녀장인 서미나 백작 부인 이 릴리엔을 맞이했다.
“루펜바인의 대공비 전하, 임페라트릭스 레옌그라드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키리에 경은 조금 뻣뻣한 태도로 황후궁의 기사에게 무기를 제출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녀장은 황후궁의 정원으로 릴리엔을 안내했다. 정원에 마련된 자리는 둘 다 비어 있었다.
“곧 황후 폐하께서 오실 겁니다.”
릴리엔이 누군가를 기다려 보는 건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아라티네 황후는 어떤 사람일까. 유약하다 했으니 떠들썩한 사람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레이첼 부인의 축하연날짜에 맞추어 나를 부른 걸 보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유약한 사람은 아닐지도…….'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릴리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릴리엔보다 반 뼘은 작아 보이는 가녀린 여인이었다. 촉촉한 갈색 눈망울과 발그레한 뺨 덕분인지 원래 나이보다 훨씬 어리고 유약해 보였다. 마치 소녀처럼 보일 정도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목소리도 새 지저귀는 듯 맑고 가냘펐다. 황후와 마테오와 닮은 부분이라곤 짙은 금발머리 뿐이었다.
“앉으세요, 대공비.”
“감사합니다, 폐하. 저는 그저 릴리에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다미언이 결혼했다고 해서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는데. 당신 같은 사람이었군요.”
칭찬으로도 그렇지 않은 말로도 해석할 수 있는 애매한 말이었지.
만, 황후의 표정에 악의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래요, 릴리에. 일단 술을 대접하지요.”
황후가 손짓하자 시녀가 크리스털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곧이어 과일을 비롯한 간식들이 날라졌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고생이랄 건 없었습니다. 폐하의 초대에 응할 수 있어 감사할 뿐이에요.”
몸이 유약하다는 게 헛말은 아니었는지, 아라티네는 벌써부터 약간 지친 기색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기뻐해 주니 좋네요. 나는 오늘 아침부터 궁이 참 소란스러워 잠을 좀 설치고 말았답니다. 화의 기간 중이라 손님이 많아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야겠지만…….”
"?”
릴리엔은 일순 의아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궁이 소란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공식적인 화의 일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레이첼의 축하연때문이었다.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모르는 건가?
“왜 그러시나요, 릴리엔?”
아라티네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릴리엔은 황후궁의 시녀장인 서미나 백작부인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아무리 칩거하는 중이라고 해도 황후는 이 제국의 안주인이었고 황궁의 두 주인 중 하나였다.
레이첼 부인이 파티를 벌인다는 걸 황후가 몰라서는 안 된다.
하지만 황후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릴리엔은 눈을 피하는 시녀장과 시녀들을 보며 그녀들이 고의적으로 소식을 숨겼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황후를 위해서인가?'
아니다. 이건 황후를 위한 게 아니었다.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의 영향력과 정보력을 일부러 축소시키는 사용인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릴리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군요.”
아라티네도 이상한 분위기에서 무언가 눈치를 채고 말았다. 릴리엔은 난감해졌다.
아라티네가 재차 요청했다.
“뭔가 아는 게 있다면 말해 주세요.”
부탁을 받고도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릴리엔은 오히려 황후에게 도움을 줄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황제폐하께서 얼마 전 레이첼 부인에게 백작위를 내리셨잖습니까. 오늘은….”
“……네?”
황후가 술이 든 컵을 놓치고 말았다.
“황후 폐하!”
쨍그랑 잔이 깨졌지만 황후는 충격을 받은 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녀에게 작위를?”
아무래도 황후는 레이첼이 백작이 되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릴리엔을 초대한 것도 의도한 바가 아니라 우연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