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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113화 (113/155)

113화.

“어떻게 그런……그럴 수가…….”

아라티네 황후는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자네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내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서미나 백작 부인과 시녀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황제폐하께서 늘 황후 폐하의 건강을 염려하시지 않습니까. 저희에게도 폐하를 놀라게 하지 말 것을 그래서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결국 황제의 명령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는 거였다.

“아무리 폐하께서 당부하셨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난 이 나라의 황후인데 그 여자가……."

말해 봤자 소용없음을 깨달은 황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파들거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녀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깊이 숙일 뿐이었다.

더 이상 내버려 두면 황후궁 시녀들의 원망의 화살을 맞게 될 것 같았다.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정하세요, 황후 폐하. 백작부인께서는 황후 폐하의 건강을 염려하셨을 뿐이잖아요.”

“하지만 릴리에…….”

“아마 부인께서도 황제 폐하의 엄명을 거스르기 어려우셨을 거예요. 그렇죠?”

눈치 빠른 서미나 백작 부인이 고개를 거듭 조아렸다.

“아닙니다. 모두 다 제 불찰입니다, 황후 폐하.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명령하셨다지만 모시는 분의 심정을 좀 더 헤아리지 못한 제 잘못이 큽니다.

“……다들 물러가게. 대공비와 조금 더 긴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까.”

“황후 폐하…….”

“이 일은 더 문제 삼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서미나 백작 부인을 비롯한 시녀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려 몹시 부끄럽군요.”

“아닙니다. 다들 폐하를 걱정했을 뿐인데요.”

사실 황후에게는 아랫사람을 통솔하지 못하는 것보다 좀 더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지만 황후는 한숨을 쉬며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이게 다 내가 몸이 허약해서 황후로서 해야 할 일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다들 나를 황후라기보다 열여섯 살 먹은 어린 소녀처럼 대우하니…….”

릴리엔은 당황스러운 나머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버님께서는 아직도 날더러 황후답게 처신하라며 성화랍니다. 내가 원해서 앉아 있는 자리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러신가요……?"

"네, 테오를 위해서라도 제가 부득불 황후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하셨어요.”

황후 스스로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쉽게 입을 열 줄 몰랐던 릴리엔은 당황했다.

“선황께서 돌아가셨을 때 테오는 너무 어렸으니까요. 믿을 만한 숙부에게 제위를 잠시 맡겨두는 셈이라고…….”

심지어 그녀는 자신과 클로드가 결혼함으로서 마테오가 클로드의 양자가 된 거나 마찬가지이며 덕분에 승계의 잡음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아라티네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나 책임이 막중한데 칩거 생활을 한다고 아버님께선 언제나 절 나무라신답니다.

이대로 가면 누가 황후인지 다들 잊어버릴 거라고요. 이번 일도 아시면 크게 역정을 내실 거예요......"

아라티네 황후는 오로지 그게 걱정인 듯했다. 떨리는 손이 황후가 느끼는 불안감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손을 떨던 황후는 진정이 안 되는지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폐하.”

릴리에이 반사적으로 만류하자 아라티네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이건 아버님께서 보내 주신 술이랍니다. 약초로 담근 건데 불안증을 달래는 데 효과가 있대요.”

릴리엔은 내친 김에 술 한 잔을 더 따르는 아라티네를 당혹스럽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라 티네가 물었다.

“혹시 그대는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해 줄 수 있나요?”

릴리엔은 당황스러웠지만 황후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술김에라도 돌발적인 행동을 저지를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마테오의 평판에도 악영향이 올 수 있었다.

"백작위는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고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대화의 기간에 공표가 되었으니 철회될 가능성은 없을 것 같습니다.”

황후의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하지만 황후로서의 위엄이라면 지킬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지킬 방법이라면...….”

“황후 폐하께서는 내궁의 주인 이십니다. 레이첼 부인의 경사를 아예 모른 척하기보다는 차라리 ‘하사품'을 보내는 게 윗사람으로서 황후 폐하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라티네가 숨김없이 감탄했다.

“세상에, 릴리에! 그대는 참으로 명석하군요.”

“아닙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당황하시지 않았더라면 금방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하셨을 겁니다.”

“아니에요, 난 이런 일에는 서툴러서……. 종종 와서 내게 지혜를 빌려줘요.”

아라티네가 시녀장인 서미나 백작 부인을 불렀다. 그리고 레이 첼에게 적당한 선물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황후 폐하…….”

시녀장이 머뭇머뭇하며 알렸다.

“응?”

“대공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공 전하께서?”

“네, 그것이…….”

서미나 백작 부인이 흘긋 릴리 엔의 눈치를 보더니 민망한 기색으로 재빠르게 전했다.

“송구하오나 신혼인지라 아내의 귀가가 늦어지는 게 달갑지 않아 부득이하게 찾아오는 실례를 무릅썼다…… 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다미언이?"

점잖은 부인의 입에서 전해지는 다미언의 말은 설렘이 없는 대신 평소보다 배 이상의 부끄러움을 선사했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아라티네가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뜻밖에 귀여운 신혼부부였군요. 내가 방해꾼이 되고 말았네요.”

“면목이 없습니다, 황후 폐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더 기다리게 하면 다미언이 절 미워할 것 같군요. 이만 가 봐도 좋아요.”

안 그래도 아라티네와의 대화가 예상 외로 심적 부담을 가져온 터라, 릴리엔은 그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

그때 갑자기 아라티네가 물러서려는 릴리엔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요, 릴리엔. 앞으로도 저를 많이 도와주세요.”

간절하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릴리엔은 사람들이 아라티네를 두고 하나같이 애매한 기색으로 '유약한 사람'이라고만 평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 * *

의례적인 말로 아이처럼 매달리는 황후를 부드럽게 떼어 놓고 나오는 길.

다미언은 황후궁의 응접실에서 릴리엔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정확히 말하자면 잠들어 있었다.

황후궁의 응접실 소파에 앉은 채, 다미언은 가볍게 잠들어 있었다.

목의 상처를 가리려는 요량인지 목깃을 높게 세우는 셔츠를 입은다미언은…… 예술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조각한 나머지 생기가 깃들고 만 조각상 같았다.

마음 놓고 잠들만 한 장소가 아닌데, 은근히 예민한 다미언이 졸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릴리 엔은 저도 모르게 다미언에게 다가가 옆 자리에 앉았다.

보슬보슬한 백금발에 햇빛이 비쳐 반짝였다. 눈을 감고 있느라 기다란 속눈썹이 돋보였다. 아름답게 미소 지을 줄 아는 입술도 지금은 그저 가볍게 다물려 있었다.

오랜만에 남편의 미모를 세세하게 감상하게 된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예쁘다…….’

바로 그 순간.

…줘.

희미한 말소리에 릴리에이 번뜩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주변에는 의아한 표정을 한 키리에 경과 응접실을 고요히 지키고 있는 시종 둘뿐이었다.

“비전하?”

“경,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만…….”

“그런가.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이군……. 앗.”

주변을 둘러보던 릴리엔의 뺨에쪽, 하고 가볍게 입술이 와 닿았다.

“전하!”

범인은 어느새 눈을 뜬 다미언이었다. 다미언이 화내지 말라는 듯 아양스럽게 릴리엔의 어깨에 뺨을 부비며 변명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되어 보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제 왕자님께서는 입맞춤으로 깨워 줄 기색이 아니시길래.”

“그래서 스스로 일어나서 제게 입을 맞추셨단 겁니까?”

우리 집도 아니고 여기, 남의 궁에서?

“네, 저는 뭐든 스스로 잘하는 어른이거든요.”

한마디도 안 지고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모습에 순한 릴리에도 불쑥 반박하고 싶어졌다.

“애초에 전하께서는 공주가 아니십니다만.”

"음, 뭐. 그렇긴 하지만 공주보다도 제가 예쁘지 않을까요?”

어지간한 공주도 가지지 못할, 조각조각 잘게 빛나는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너무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후후 웃는 다미언은 아주 얄미워 보였다. 조금만 덜 예뻤어도 뺨을 꼬집어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만 일어나 가실까요?"

릴리엔은 한숨을 쉬며 남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 미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잔소리를 이어 나갔다.

“방금 전의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녀장께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했나요? 점잖으신 부인께서 전하의 말씀을 전하면서 아주 민망해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하지 않으면 형수님께서 당신을 안 놓아주실 것 같았거든요.”

다미언이 상황을 꿰뚫어 본 듯 웃으며 말했다.

"어딜 가나 제 아내를 좋아하는 사람들뿐이라, 남편으로서는 심히 고민이 된답…….”

'어?’ 그때 갑자기 현기증이 이명과 함께 릴리엔을 엄습했다.

삐이 울리는 이명 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여기야. 여기로 와 줘.

나를 다시 만나러 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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