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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114화 (114/155)

114화.

정신을 차려 보니 릴리엔은 다 미언의 팔에 갇히듯 안겨 기대어 있었다.

다미언이 물었다.

“비,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잠깐 발을 헛디뎠어요.”

아직 황후궁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적당히 둘러댈 필요가 있었다.

릴리엔은 말하면서 다미언의 눈치를 흘긋 살폈다. 다미언의 눈빛에는 릴리엔을 향한 걱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못 들으신 것 같아.'

다미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혹시 형수님께서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환청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화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발을 헛디뎠을 뿐이에요.”

“흠. 제게는 아무래도 비의 두발이 땅에 닿으면 똑같은 사고가 반복될 거라는 말로 들리는군요.”

“……네? 전하, 잠깐!”

릴리엔이 말릴 새도 없이 다미언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릴리엔은 본능적으로 다미언의 목을 안았다가 화들짝 놀라 팔을 뗐다. 그리고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체통이란 걸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당장 절 내려놓으세요.”

"하하, 다미언은 그런 건 잘 몰라요.”

“예?”

덩치가 산만한 사내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다니. 릴리엔은 여러 모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미언은 점잖은 아내가 할 말을 잃은 틈을 타 마차까지 아내를 안고 이동하는 데 성공했다.

상식 밖의 행동에 놀란 릴리에은 마차에 올라서야 정신을 차렸다.

“전하!”

“비께서 용서하세요.”

다미언이 냅다 꼬리를 내렸다.

“전쟁터에서 10대 시절을 홀랑 다 보내느라 예의범절 같은 건 적당히 잊어버렸답니다.

“불쌍한 과거를 얘기하셔도 이번엔 안 봐 드립니다……!"

"이런, 걸렸네요.”

혀를 차는 다미언에게서 반성하 는 기색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릴리엔은 조용히 분노하다가 선고했다.

“오늘 밤엔 저 혼자 자겠습니다.”

“예?”

다미언은 날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놀랐다.

“비! 그건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간만에 제국의 보통 귀족 부부들이 하는 것처럼 서로 간의 예의범절을 지키는 게 전하께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매정하시군요. 저는 이미 비께서 옆에 계시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몸이 되었는데…….”

“조금 전 황후궁 응접실에서는 저 없이 잘 잠들어 계셨잖습니까.”

“그건 제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으니까 다들 긴장을 해서 자는 척 좀 한 겁니다. 그리고…….”

변명하던 다미언은 아차 했지만 릴리엔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비께서 가까이 왔을 때 입을 맞추려고…….”

시선을 피하며 흑심을 털어놓는 남편의 모습이 귀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귀엽다고 해서 저런 행동을 하나하나 다 받아 주면 버릇을 잘못 들이게 될 것이다.

'이미 반쯤은 그렇게 된 것 같지만…….’

어쨌든 지금은 매정하게 굴 때였다.

“역시 전하께는 무언가 조치가 시급할 것 같군요. 각방은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비!”

억울한 다미언은 잔뜩 입을 내밀고 말았지만 릴리엔은 튜린 사람답게 단호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 *

그리고 그날 저녁.

“전하, 이게 대체 뭔가요……?”

“네?”

다미언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사랑하는 비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건데요.”

튜린의 주치의인 쇼와 대공가의 주치의 그리고 대공가의 가신이라는 마법사까지 한데 모여 릴리 엔을 진찰한 후 토의를 이어 가고 있었다.

“상기 질병에 효과적인 약은 아무래도…….”

“발병 과정에 따른 전개 양상을 보면 저 역시 이견은 없는 바입니다만…….”

“지금은 아무래도 그 방법.......”

회의를 마친 세 사람이 다가와 결과를 알렸다.

“대공 전하, 진찰 결과 비전하의 건강이 막 수도에 오셨을 때 비해 아주 약간이나마 호전된 건 사실이라고 사료됩니다. 병이 근본적으로 치유되고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진척이라고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가.”

"예. 저희 세 사람은 대공 전하께서 비전하의 건강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보다 빈번하게 마력을 전해 주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인가?”

다미언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나이가 가장 많은 대공가의 주치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게 어렵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두 분의 금슬이 워낙 좋으시니.......”

주치의나 쇼는 다미언이 릴리엔에게 마력을 전해 주는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몰랐다. 그들이 아는 마력 전달 방법은 손목을 잡고 정신을 집중해서 기혈로 기운을 흘려보내는 정석적인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다미언은 굳이 손목을 잡지 않아도 풍부한 마력을 전달할 수 있을 만큼 마력 컨트롤에 있어 뛰어났다.

그 뛰어난 실력을 이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마력을 전달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릴리엔뿐이었다.

남편의 실력이 불필요할 정도로 뛰어난 나머지 릴리엔은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뻔뻔한 다미언은 활짝 웃는 얼굴로 주치의들을 치하할 뿐이었다.

“항상 비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니 고맙군.”

“저희는 그저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세 사람은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쇼는 물러나기 전에 릴리엔을 향해 말했다.

“걱정했는데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헤이워스 부인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친정 식구인 쇼는 릴리에의 방이 몹시 호화롭고 입고 있는 옷도 아가씨 시절에 비해 훨씬 좋은 옷이라고 느꼈다. 아무래도 대공저의 사람들이 검소함에 대한 릴리엔의 고집을 꺾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대공과의 사이도 좋아 보였다. 쇼는 크게 안심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릴리엔이 다른 의미로는 잡아먹히기 직전의 양이나 다름없단 사실은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자, 비전하. 진단을 들으셨지요?”

"듣긴…… 들었습니다만…"

“네, 잘 들으셨다니 기쁘네요."

모두가 나간 뒤, 다미언이 평소보다 몇 배나 더 달콤하게 웃는 얼굴로 릴리에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당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우리가 시험해 봐야 할 일이 여러 가지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남편의 의미심장한 말에 릴리에은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할 말을 잊지는 않았다.

“각방형을 피하기 위해 전하께서 머리를 쓰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제가 너무 과하게 의심하는 걸까요?”

“아니요, 비께서 하시는 생각이 지당하십니다. 저는 속이 시커먼남편이거든요.”

다미언은 당당하고 해맑게 시인했다.

“비의 건강을 위하면서 사심도 채울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전하, 지금 아직 날이 밝…으음.”

다미언이 릴리엔의 입술을 앙 물었다. 처음에도 입맞춤이 서툴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수도 없이 실전을 반복하는 사이에 어느새 능숙해져 버리기까지 했다.

타고난 자질의 차이일까. 같은 학습을 반복했는데도 별로 진도를 나가지 못한 릴리엔은 금방 어질어질해졌다.

“오늘은 좀 더 노력해 주세요.

다 비의 건강을 위한 일이니까.”

“다는…… 아니지 않습니까.”

다미언은 짓궂게 씩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다미언에게 녹진녹진하게 괴롭힘 아닌 괴롭힘을 당하고.

과식 아닌 과식을 한 릴리엔은 평소보다 일찍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릴리에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예의 서쪽 별궁에서였다.

벌써 이걸로 세 번째 꿈이다.

게다가 왠지 오늘은 평소보다 더 현실감이 드는 느낌이었다. 정신도 평소보다 맑았다.

‘진짜로 별궁에 와 있는 게 아닐까…….’

몽유병에 걸렸다고 해도 황실의 검문을 통과할 순 없을 테니 그럴 리는 없지만.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홀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이게 웬 난리지?”

복도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깨진 유리창에 벽에 장식된 부조도 박살이 나 있었다. 장식장은 넘어져서 서랍이 죄다 쏟아진데다 장식용 갑옷이 쓰러져 복도를 가로막고 있었다.

포탄의 흔적과 피만 없었지,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나서 짓밟힌 듯한 모양새였다.

자연스럽게 이 궁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 다미언일 수도 있는 보랏빛 눈동자를 한 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릴리엔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나서서 주변을 살폈다. 어느 방을 가 봐도 난장판인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처음에서 있던 홀만이 멀쩡히 남아 있는 유일한 공간인 것 같았다.

“앗!”

그때, 우르릉 하며 바닥이 흔들렸다.

“지진인가……?”

설마 지진이 일어나고 있어서 이렇게 엉망이 된 걸까?

원인을 파악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면 빨리 아이를 찾아야만 했다.

릴리엔은 장애물을 다급하게 헤치고 아이를 찾았다.

'어디 있는 거지?'

저번에 아이를 만났던 다락방을 찾아볼까 싶었지만 그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파손이 심해 완전히 막힌 상태였다.

하지만 그쪽에서 단서를 하나 찾을 수 있었다.

'핏자국이다!'

주의해야 볼 수 있는 작은 핏방울이 경로를 표시하듯 줄지어 이어져 있었다.

릴리엔은 파손된 물건들이나 떨어진 문짝 따위에 가로막혀 휘청거리면서도 열심히 흔적을 쫓았다. 바로 그때였다.

“앗……!”

"찾았다.”

덥석, 누군가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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