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15화 (115/155)

115화.

놀란 릴리에이 허리를 안은 손을 더듬어 보았다. 작은 아이의 손이었다.

“이제 닿을 수 있게 됐어. 가지 않는 거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릴리에이 다급히 손을 풀고 뒤돌아서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뒤엉켜 자란 백금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게 역력한 생김새 중에서 릴리엔은 익숙한 보랏빛 시선을 식별해 냈다.

잘게 부서진 보석들을 끼워 맞춘 것처럼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는 분명…….

“전하……?”

다미언의 것이었다.

“찾고 있었어.”

하지만 아이에게는 다미언 같은 살랑거리는 표정이 없었다.

“계속, 계속 찾았는데 여기 없었어.”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 도무지 다미언답지가 않았다. 릴리엔은 형언할 수 없는 예감에 몸을 떨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네, 전하. 저는 여기 살지 않아요.”

“나도 이제 알아. 그래서 당신을 또 불러 달라고 여기 부있어.

근데 소용없었어.”

릴리엔을 부르기 위해서 여기를 부있다니. 맥락을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여기를 부쉈다고요……?”

재차 확인하자 어린 다미언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엔은 여기 오기까지 목도했던 처참한 파괴 현장을 떠올렸다.

'도저히 아이의 힘으로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는데.’

어려도 다미언은 다미언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미언이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가 십대 초반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땐 역사 속 위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듯 감정 없이 흘려버렸던 이야기였다. 어린 모습을 앞에 두고 생각하니 이제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실감이 들었다.

“..……아참, 전하. 상처는요?"

그러고 보니 릴리엔은 여기까지 핏자국을 따라왔었다.

"다쳤어.”

아이가 여기 보라는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자랑하듯 보여 준 손등이 엉망으로 찢어져 있었다.

"세상에..…."

어찌나 너덜너덜한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처참한 상처였다. 릴리엔은 대번 심각해졌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상처가 낫지 않는다니. 역시 이 아이는 전하가 아닌 걸까……?'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몸이 휘청휘청했다. 아슬아슬하게 벽에 걸려 있던 사슴 머리 박제가 바닥으로 쾅 떨어졌다.

릴리엔은 다급히 아이를 감상다. 그러나 원인 불명의 지진은 이미 잠잠해진 뒤였다.

“전하, 괜찮으세요?”

“……당신 다쳤어.”

대답 대신 아이가 손가락으로 릴리엔의 복숭아뼈를 가리켰다.

과연, 아까 아이를 찾으려고 장애물을 넘다가 스치는 바람에 생긴 작은 상처가 있었다.

"다쳤어. 나 때문이야?”

“아니요, 제가 주의력이 부족해서 그래요. 그보다 여기를 벗어나야…….”

“여기는 못 나가. 내가 여기를 부숴서 거울이 화가 났어.”

“거울이 화가 났다고요?”

그 순간 릴리에의 질문에 응답하듯 우르릉 소리가 났다.

아주 멀리서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릴리 엔의 시야가 크게 이지러졌다.

“안 돼…….”

순간 아이가 보라색 눈동자를 절박하게 번뜩이며 주저앉은 릴리엔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안 돼, 다시 가지 마. 나랑 여기 있어 줘.”

“전하, 저는…….”

머리가 빙빙 돌았다. 릴리엔은 이를 꽉 악물었다. 시야가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가면 안 돼………!”

절박한 아이의 목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달래 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릴리엔은 평소처럼 꿈에서 깨어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릴리엔이 정신을 차린건 다미언의 옆이 아니라 또 다른 공간에서였다.

“여긴 또…….”

어디지? 릴리엔은 온통 은빛으로 빛나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어디부터가 바닥인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여긴 거울 속이야.”

불쑥 불만스러운 감정이 담긴 익숙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릴리엔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에 나타난 사람은….

“전하?”

…다미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야.”

다미언의 얼굴로 굉장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존재가 대답했다.

“나는 거울이기 때문에 최근에 나를 사용한 존재의 모습으로 고정되곤 하지. 하지만 네 남편의 모습은 상당히 기분이 나쁘군.”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한순간에 모습이 바뀌었다. 릴리엔은 처음 보는 남색 머리를 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좀 낫군.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해 볼까?”

“당신은…….”

"내 이름은 자그레브야.”

자그레브!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릴리엔은 놀랐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고대 병기는 다 이런 건가요?”

“뭐?”

안 그래도 날카롭게 생긴 청년의 표정이 구겨졌다.

“한 가지 말해 두는데 나는 병기가 아냐. 나는 ‘직면의 거울'이라는 명칭이 있다고."

“하지만 당신에게 당하면 모두 정신이 붕괴되곤 한다고…….”

“나는 사람들이 극복하지 못한 과거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치료 도구로 만들어졌어. 그 과정에서 나약한 놈들이 그 모양이 되곤 하는 건 내 탓이 아냐.”

"아…… 네…….”

악명 높은 이 병기가 사실 치료용이었다니. 최초로 이걸 만든 마법사는 상당히 괴팍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겨우 연결됐는데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틈은 없어.”

“저도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 아까 본 아이가 네 남편이 맞느냐고? 맞아.”

자그레브가 심드렁하게 엄청난 사실을 시인했다.

“그 아이가…….”

몰랐을 때도 가엾게 생각했던 형편없는 행색, 아이답지 않은 무표정을 떠올리며 릴리엔은 새삼 충격을 받았다.

가지 말라고, 여기 있어 달라고 그녀를 붙잡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릴리에이 충격을 받든 말든 자그레브는 설명을 계속할 뿐이었다.

“정확히는 네 남편의 영혼 한 조각이지. 네 남편이 나를 사용하고 멋대로 빠져나가다가 두고 간 거야.”

“그렇군요…….”

“그렇군요? 지금 ‘그렇군요' 라고 한 거야? 방금 그 참상을 봐 놓고도 감상이 고작 그것뿐이야?”

“……네?”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울은 대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내 주인의 손에서 탄생한 이후로 오랜 세월 동안 평안하게 지내 왔어! 한데 네 남편이 그 망할 영혼의 조각을 떼어 놓고 간 뒤로 한시도 편할 틈이 없었단 말이다!”

"네?”

“네 남편은 악몽 그 자체야!”

릴리엔은 파르르 떠는 청년의 모습을 보며 자그레브가 다미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 않아서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녀석이 남기고 간 영혼 한 조각이 여태까지 얼마나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아? 어떤 기억의 순간 속에 가둬 놔도 결국엔 그걸 다 부수고 탈출하는 놈이라고! 몇 번이고 날 죽이려고 했어!”

"네…… 그랬군요…….”

릴리엔은 심정적으로는 물론 다 미언의 편이었지만 다미언의 손에 죽을 뻔했다는 거울 앞에서 드러내 놓고 편을 들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그 녀석을 어린아이로 만들어서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장 어두운 기억 속에 처박고 나서야 좀 잠잠해졌지. 하지만 그것도 네가 나타나면서 다 무용지물이 될 판이고!”

"…잠깐만요. 그를 가장 어두운 기억에 가둬 놨다고요?”

“안 그러면 내가 죽을 판이었다.

는 말도 좀 같이 기억해 주지 그래?”

거울이 짜증을 냈다. 하지만 릴리엔은 침착하게 그를 비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미언이 이 거울을 자의로 들여다본 게 아니었다. 그는 황제와 레이첼의 계략에 당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영혼이 쪼개진 것도 그랬다.

자그레브의 본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다미언이지 자그레브가 아니었다.

“내 남편의 영혼을 돌려주세요."

“아이고, 제발 가져가 주세요. 사실 나도 그걸 부탁하려고 통로를 연결한 거다.”

자그레브는 안 그래도 다미언에게 지속적으로 ‘연결’을 시도했지만 다미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고 말했다.

“아무래도 영혼이 손상된 놈이라 그런 모양이지.”

그러던 중 다행히 릴리에이 다 미언의 마력을 공급받기 시작하면서 릴리엔의 정신 쪽과 간혹 연결이 되기 시작했다고도 설명했다.

“그럼 설마….”

“그래. 우리가 오늘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도, 그 꼬맹이가 네게 닿을 수 있던 것도 다 내가 드디어 마력 패스를 연결하는 데 성공한 덕택이야.”

툴툴거리는 말투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여하튼 한시라도 빨리 저 망할 사고뭉치를 좀 데려가 줘. 나만 좋자고 이러는 거 아냐. 네 남편도 워낙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이라 여태까지 버틴 거라고. 아마 지금쯤이면 영혼이 손상된 증상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을 텐데?”

거울의 말에 릴리엔은 다미언의 아물지 않는 상처를 떠올렸다.

자그레브가 피식 웃었다.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군.”

“영혼의 조각이 유실됨으로서 생긴 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벌어질 거고, 증상은 더욱 광범위하게 나타날 거다. 종내에는 정신이 붕괴하고 말 거야.”

다미언이 어느 정도까지 망가지 는가를 알고 있는 릴리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자그레브가 경고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 그리고 내가 말라 죽기 전에 네 남편의 사고뭉치 영혼을 제발 가져가라.”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지금 이 마력 패스는 연결이 불안정해서 언제까지 유지할 수 없어. 영혼을 전송하기에는 너무 불안정한 통로지.”

“그렇다면…….”

“나를 직접 찾아와야 해.”

바로 그때, 릴리에이 서 있는 공간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쩌적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자그레브가 혀를 찼다.

“그 사고뭉치가 또 사고를 치는 모양이군."

릴리엔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주변을 부쉈다는 어린 다미언의 말을 떠올렸다.

눈앞에서 그녀를 놓친 아이가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란 추측이 되었다.

"마침 연결도 슬슬 불안정해지고 있는 데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나는 또 그 꼬맹이를 체박으러 가 봐야겠다.”

“또 라고요?”

자그레브는 다미언의 영혼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어두운 기억 속에 그를 가둬 놓는다고 말했다.

'안 돼…….’

깨어지고 있는 세상 속에서 릴리엔에게 자그레브가 웃으며 말했다.

“싫으면 빨리 데리러 오는 게 좋을걸. 나는 치유하는 거울이라서 험악한 짓은 되도록 안 하려고 하지만 정 못 견디게 되면 그 영혼을 아예 부숴 버리려고 할 수도 있잖아?”

거울이 손을 흔들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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