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릴리엔은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대공비의 침실에서 눈을 뜨고 말았다.
“……비?”
다미언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릴리엔을 불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아닙니다…….”
어렴풋하게 비치는 달빛 덕분에 릴리엔은 다미언의 실루엣을 어느 정도 판별할 수 있었다.
“……악몽을 좀 꿔서요.”
“잠자리가 편치 않아요……?”
다미언은 릴리엔의 한 호흡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잠을 깨웠다고 화를 내기는커녕 악몽을 꾼 릴리엔을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형언할 수 없는 기분.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꽉 하고 틀어막는 것 같았다. 릴리엔은 먼저 팔을 뻗어 다미언을 껴안았다.
“……대단한 악몽이었나 봐요. 비께서 이렇게 먼저 안기시다니…….”
다미언이 가벼운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릴리엔을 달래며 토닥였다.
“괜찮을 거예요. 제가 잘 지켜보다가 또 악몽을 꾸시는 것 같으면 깨워 드릴게요.”
"....."
“비께서는 부디 안심하고 주무세요. 제가 지켜 드릴 테니까…….”
릴리엔은 다미언의 목덜미에 난 상처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정작 자기는 영혼의 일부가 쪼개지는 부상을 입었는데도 한결 같이 릴리엔만을 생각했다.
릴리엔은 이 맹목적인 남자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13. 사랑과 영혼.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숨긴 이후로 릴리엔은 다미언에게 비밀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자그레브에 관한 일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다미언은 자기 영혼의 손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릴리에이 하는 '전하가 걱정됩니다.’는 말에는 순순히 함락되었다.
“하지만 자그레브는 황실 소유인데요. 물론 비께서 허가하신다면 제가 황궁을 털어 오면 되긴 하지만…….”
“안 됩니다.”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뭐, 다른 방법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제게 황궁을 습격하는 것보다 훨씬 온건한 방법이 있답니다.”
“잘할 수 있는데…….”
“전하께서 잘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리는 게 아닙니다.
지나치게 잘하실 것 같아서 그런 겁니다.”
다미언의 경천동지하는 실력이야 이제 릴리에도 조금쯤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실력이 너무 그대로 알려져도 곤란했다.
지금은 다미언이 마테오를 보호하고 있기에 다미언의 강함을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하지만 마테오가 황제가 되고 나면?
다미언은 황궁을 습격하고 황제를 제압한 전적이 있는 계승 서 열 1위가 된다. 마테오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자라서 손자를 낳는다고 해도 다미언의 서열은 아마 죽을 때까지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마테오가 다미언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모든 일이 잘 풀린 후를 대비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조심해야 했다.
그런 릴리에의 설명을 듣고 다 미언은 몽롱하게 한숨을 쉬었다.
“전하? 왜 그런 눈빛으로……"
그 눈빛이 불순하다는 걸 깨달은 시점에 이미 늦었다. 릴리엔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다미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전 비께서 순진하지 않고 냉철하실 때가 너무 멋지신 것 같아요…….”
“제가 멋진 것과 전하께서 갑자기 들러붙는 게 무슨 상관인 거 죠?”
“너무너무 멋있어서 가슴이 떨린단 말예요.”
다미언이 아양을 떨며 릴리에에게 쪽쪽 입을 맞춰 댔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찬사를 쏟아 냈다.
“저랑은 다르게 착하고 선량하고 예의바르고 그러면서도 똑똑하고 냉철하고……. 어디서 이런 사람이 왔는지 몰라요.”
“전하.”
릴리엔은 난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그녀도 사람 인지라, 좋아하는 남편이 그녀의 장점을 하나하나 꼽아 가며 취한 듯한 눈빛으로 좋다, 좋다 연발하는 게 싫을 수가 없었다.
“너무 좋아요. 이제까지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나를 떠나지 말아 주세요……, 네?"
다미언의 호소에 릴리엔은 거울 속에서 보았던 영혼의 편린을 떠올리고 말았다.
자그레브와의 대화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솔직하게 털어놓았지만 다미언의 과거 모습을 본 일에 대해서는 섣불리 언급할 수가 없어서 말하지 못했다.
릴리엔은 말하지 못한 착잡함을 담아 평소와 달리 다미언을 힘껏 끌어안았다.
“……비!”
깜짝 놀란 다미언의 턱 밑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참으며 토로했다.
“……저도 전하가 좋습니다.”
“가능한 한 전하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진심입니다.”
다미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한 호흡을 크게 들이쉰 후, 릴리엔을 품으로 껴안아 자기 표정을 보지 못하게 했다.
“약속하신 거예요.”
“네.”
“어기시면 안 돼요.”
“노력하겠습니다.”
다미언이 주는 마음의 크기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대답들이었다.
좋아한다. 가능한 한 떠나지 않겠다. 노력하겠다.
그 보잘것없는 말들은 그래도 릴리에의 진심이었다.
릴리엔은 최선을 다한 진심 어린 대답이 다미언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랐다.
* * *
다음 날은 대화의 기간 중 첫 선제후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다미언이 헤멘린나 선제후가 되면서 선제후 회의의 주관자 자리는 공석이 되고 말았다.
선제후 회의의 주관자가 된다는 건 굉장한 명예였다. 황제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의 수장이 된다는 건 상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대단한 특권이었다.
“이번 선제후 회의에서는 반드시 그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표면적인 쟁론에서 조금 깊게 들어가면 황제파와 황태자파 중 어느 진영에서 이 영예로운 직책을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도 된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마 황위 찬탈 당시 세 선제후 중에서 한 명을 대제후가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을지도 모릅니다."
릴리엔이 알고 있는 지식을 추측처럼 언급하자 다미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군요.”
황제에게는 상속자를 잃고 회수된 작위와 땅들이 있었다. 레이 첼에게 준 록웰 백작위도 그런 경우였다.
선제후 회의의 주관자를 선출하는 일에는 황제도 관여할 수 있었다. 선제후 회의에서 세 명의 후보를 추리면 그중에 한 명을 황제가 인가하는 식이었다.
선출된 자기편의 선제후에게 적당히 작위를 수여해서 대제후로 만든다.
그 얄팍한 방식에 릴리엔은 분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대 헤멘린나 대제후께서는 알트 해를 자기 손으로 개척하셔서 대제후가 되셨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다른 선제후들이 그런 식으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잡게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외할아버님께 그 정도 의리는 없습니다만…….”
다미언과 대제후의 관계는 어릴 적 받은 귀여움으로 형성되는 일반적인 조손 관계와 거리가 멀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싹수가 노랗고 시원찮은 후계자와 그 후 계자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성질 괴팍한 노친네 정도?
하지만 그런 다미언과 달리 릴리엔은 대제후를 마치 친할아버지처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비께서 원하시니 힘써 그분의 명예를 수호해 보도록 하지요.”
“전하만 믿을게요.”
릴리에이 다미언을 믿어 주지 않아도 다미언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 준다면 좀 더 행복한 기분으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 * *
부부는 나란히 황궁에 입궁했다.
다미언이 선제후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릴리엔은…….
“저는 황후 폐하를 찾아뵐 생각입니다.”
“형수님을?”
“저번에 뵈었을 때 아라티네 폐하께 약소하나마 도움을 드렸는 데, 아주 고맙다고 하셨거든요.”
“아하…….”
다미언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자세히 알 것 같았다.
“형수님은 나약한 분이셔서요.
조금만 호의를 보여 드리면 곧바로 타인을 의지하려고 하실 텐데.”
릴리엔은 애매하게 웃을 뿐이었다. 다미언은 입술을 비죽였다.
“비를 귀찮게 하는 사람은 저 하나면 족한데요.”
“전하.”
“그렇지만 빼앗기기 싫단 말예요.”
릴리엔은 아이처럼 구는 남편을 다독였다. 다미언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러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조금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이 마차를 나가시면 어리광은 그만 부리시고 어엿한 대공 전하이자 헤멘린나 선제후로서 행동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짐짓 엄하게 이르는 척하자 다 미언이 씩 웃으며 척 장단을 맞췄다.
“비께서 상으로 입 맞춰 주신다 면야 생각해 보지요.”
보면서 질겁할 아이반도 없겠다, 릴리엔은 도발적인 요구에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조심조심다미언에게 입을 맞춰 주었다.
다미언은 섣부르게 굴지 않고 릴리엔의 수줍음에 맞춰 얌전히 호흡을 나눴다.
수줍게 닿아 온 입술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간질거리는 맛도 나름 좋았다. 무엇보다 릴리에에게 주도권을 온전히 내주고 자신을 참는 느낌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이 입맞춤의 주도권을 릴리에이 쥐고 있다는 것.
그녀가 온전히 자기 의지로 다 미언에게 입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앞으로 보고 싶어서 어찌 하지요?”
“세 시간 동안 말이죠.”
“비는 세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게 슬프지도 않으신가요?”
“그 정도는 슬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매정하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