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17화 (117/155)

117화.

흑흑거리며 우는 양을 하던 다 미언은 마차가 멈추자마자 “제가!” 하고 날렵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미언은 문이 열리자마자 마차에서 내린 다음, 곧장 마차에서 내리는 릴리엔을 도울 태세로 돌아섰다.

“전하…….”

부산스러운 동작은 아니었지만 유난스러운 행동은 맞았다. 게다가 릴리엔을 도와주려고 미리 대기하던 키리에 경이 머쓱해하며 물러나는 모습을 보니 릴리엔은 두 배로 민망해졌다.

릴리엔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다 미언은 즐겁게 릴리엔이 마차에서 내리도록 도왔다.

“꼭 이렇게 하셔야 했나요…….”

“제 마음 같아서는 저 받침대 대신 제 손바닥을 발밑에 받쳐 드리고 싶은걸요.”

곁에 다가오던 키리에 경이 그 말을 들은 모양인지 그녀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릴리엔은 지적하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잘 다녀오세요.”

“전하께서도 잘 하고 오세요.”

“예, 심려 놓으세요.”

다미언의 얼굴엔 오늘따라 화색이 돌았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세요.”

“좋다마다요.”

다미언이 방긋 웃었다.

“전 예의를 차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놀리는 게 즐겁거든요.

한데 오늘은 그런 사람이 여섯명이나 저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다미언은 웃고 있는데 릴리엔은 한기를 느꼈다. 아이반이 거 보라는 듯 한 걸음 뒤에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희 오라버니는 좀 봐주세요."

“그러고야 싶지만 형님께서는 귀애하는 여동생을 데려간 제 얼굴만 봐도 골을 내시는지라......."

그건 그랬다. 릴리엔은 한숨을 쉬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너무 심하게 놀리진 마시고 적당히 하세요.”

“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노력은 해 볼게요.”

이례적인 상황 때문에 헤멘린나 선제후가 된 다미언과 튜린 선제후가 된 세드릭을 제외하면 선제후들은 다 나이가 많았다. 릴리 엔은 선제후들이 혈압이 올라 실려 가는 일만은 없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주었다.

* * *

황위 계승 서열 2위.

제국군 편제 역사상 유일한 대원수.

그 헤멘린나 대제후의 상속자로 알트 해를 거머쥔 거부!

권력과 재력을 양 손에 거머쥔남자가 일곱 선제후 중 가장 뒤 늦게 등장했다.

선제후들은 본래 주관자를 제외하고는 평등한 관계이므로 누군가가 왔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다미언은 황족이었기 때문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다미언을 맞이해야만 했다.

시작부터 선제후들의 심기를 불편케 하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다들 앉게.”

선제후들이 원탁을 둘러싼 의자에 앉았다.

헤멘린나, 튜린, 이카난, 카스타나, 루체른, 티라나, 비슈케크.

모든 선제후가 좌정하자, 주관자가 없는 관계로 자연스럽게 회의가 시작되었다.

전통적으로 선제후 회의의 주제는 '황제가 황제'로서 합당한가.

였다. 선제후들은 정치, 경제, 외교 등 여러 가지 영역의 성과를 두고 황제의 치세가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했다.

요식 행위에 불과할지라도 '황제를 판단할 수 있다.'는 권리가 선제후들의 힘을 뒷받침하는 만큼 아주 중요한 절차였다.

하지만 오늘은 회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헤멘린나 대제후께서 졸하신 지금, 이제는 부득이하게 그분의 뒤를 이어 회의를 주관할 주관자를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이 바로 그렇습니다.”

“흠흠……. 전임 주관자이신 대제후에 대한 예우로 기다렸지만 이제는 그럴 때도 되었지요.”

황제를 판단하는 일은 쉽게 제쳐놓고 누가 주관자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황제 편에 가담한 루체른과 티라나, 비슈케크 선제후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릴리엔과 다미언의 추측대로 클로드와 레이첼은 황위 찬탈 당시세 선제후를 끌어 들이기 위해 대제후의 자리를 약속했다.

방법 역시 두 사람이 추측한 대로였다. 노령인 헤멘린나 대제후가 가지고 있는 '선제후 회의의 주관자', '일곱 맹세의 수호자'같은 영예들을 쪼개어 나누어 주고, 후손이 없어 황가로 넘어온 작위를 하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헤멘린나 대제후가 그들의 기대보다 훨씬 더 오래 생존해 버리는 바람에 약속은 오랫동안 지켜지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대제후가 87세를 일기로 죽었다. 7년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세 선제후는 몸이 달 대로 단 상태였다. 세사람은 오늘 회의에서 기필코 주관자 후보가 되어 황제에게 인가를 받을 요량이었다.

'셋 중에서 가장 먼저 대제후가 되기 위해 클로드에게 여러 가지 이권을 바쳤을 것이고.'

클로드와 레이첼이 선제후들을 다루는 솜씨는 뛰어났다. 적당한 먹잇감을 황금 사과처럼 포장해서 던져 주니, 세 명이나 되는 선제후가 그 사과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지 않았는가.

그 황금 사과를 잡기 위해 자기들이 황제와도 견줄 수 있는 드높은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그 발밑에서 다투고 있는 줄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누가 주관자인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나? 어차피 이 회의는 주관자가 없어도 이렇게 열렸는데.”

다미언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리자 세 선제후의 표정에 편치 않은 기색이 번졌다.

이카난 선제후가 옳다구나 찬성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아, 헤멘린 나 대제후께서야 당연히 우리 중 월등하셨으니 이견 없이 주관자가 되실 수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또 좀 다르지요. 안 그렇습니까, 튜린 후?”

“……주관자 없이 회의가 유지된 선례가 이미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시기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스타나 선제후는 눈치만 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세 선제후 중 루체른 선제후가 나섰다.

“큼, 내 생각은 좀 다르오. 선제후 회의의 주관자를 선출하는 건 돌아가신 대제후에 대한 예우가 될 수 있지 않겠소? 그분의 뒤를 이을…….”

“미안하지만 내가 후계자라서 아는데 그 노친네 성품이었다면 누가 주관자가 되느냐보다 황제가 제 구실을 하는가 못하는가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을걸.”

"......!"

“대공 전하!”

파격적인 다미언의 언사에 대부 분 경악했다. 그중에서 튜린 선제후인 세드릭만이 튀어 나온 웃음소리를 감추려는 듯 수상한 헛기침을 했다.

“말이 심하시군요, 대공 전하!”

“나는 말이 심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하는 짓이 심하시지.”

“그 무슨…….”

"황제 폐하께서 블란쳇 공작에게 여러 가지 이권을 하사하신 정황을 알고 있나?”

선제후들의 표정에 불편한 기색이 번졌다.

“그건 블란쳇 공작가가 황제 폐하께 충심을 다하니…….”

“그대들 같으면 충심 같은 같잖은 말장난에 대한 보상으로 철광을 양도할 수 있나?”

“뭐, 뭐라…….”

“철광이라 하셨소?"

안 그래도 황제는 블란쳇 공작을 비롯한 몇몇 영주들을 총애하는 경향이 있었다. 교묘하게 레이첼이 끼어들어 '황제 폐하의 기분이 좋아서’, ‘애첩에게 뇌물을 바쳐서'라는 식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다미언은 블란쳇에 넘어간 이권의 정황을 설명했다. 선제후들은 설명을 들으며 그동안 찜찜했던 일들을 일련의 상황으로 추측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거였군, 그런 거였어.’

‘지벨리 공작이 갑자기 영전한 것도 그런 정황이 있었군.

'저 정보의 출처는 당연히 에릭슈미트, 새 블란쳇 공작일 테니 의심할 여지가 없겠어.'

다미언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각자 생각해 보아도 일개 영주를 황제가 개인적으로 총애한 정황이라기엔 판이 너무 크지 않은가? 선제후에 대항할만한 대항마를 키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야.”

다들 안색이 변해 침묵에 휩싸였다.

다미언은 느긋하게 쐐기를 박았다.

“후들의 가신 중에 나와 함께 종군한 경험이 있는 자들을 찾아 물어보라. 내가 단신으로 황궁에 쳐들어가서 내 둘째형을 어찌할 수 있을지 없을지.”

"!”

“보면 알겠지만 나는 은밀히 듣는 귀가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후들이라면 충분히 알리라고 믿는다.”

다미언은 자신의 무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사실에 근거한 자신감이었다.

‘이제까지 이렇게 황제에게 적대적으로 나온 적이 없었는데…….’

'늘 미적지근하던 사람이 이렇게 막 황제를 공격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판도가 바뀔 수밖에 없겠군.'

물론 다미언이 황제를 배제하기로 마음먹은 건 릴리에에게 암수가 뻗쳐 왔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이 상황을 정리해야 비가 안전해진다면, 그렇게 해야지.'

릴리엔의 항구적인 안전.

다미언의 목적은 그것뿐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선제후를 견제할 생각이라고?'

세 선제후가 여태까지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영광이 너무 커 보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황제의 위험성을 무시해 왔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증언이 나와 버렸다.

영예를 얻을 기회가 아니라 지금 가진 것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선제후들의 표정에 복잡하게 오가는 계산속을 보며, 다미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정확히 그가 의도한 대로의 결과였다.

'비께서는 잘하고 계시겠지?'

얼른 이 지루한 자리를 파하고 데리러 가고 싶어졌다.

* * *

마차 앞에서 우여곡절이 끝나고, 릴리엔은 다미언과 헤어져 황후궁으로 향했다.

당연히 아라티네 황후는 릴리에을 환대했다.

“릴리에! 안 그래도 그대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나를 찾아와 주다니…….”

백작이 된 레이첼 부인의 저택에는 청탁을 넣으려는 사람들로 매번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유폐되다시피 칩거한 황후에게는 찾아오는 방문자가 거의 없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부디 아라티네라고 불러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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