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어찌 황후 폐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이 본을 보여야 다른 이들이 성심으로 황후 폐하를 섬길것이라며 릴리에이 사양하자 마음 약한 황후는 더 권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일단 술을 대접할게요.”
황후가 시녀장을 시켜 손님 대접용 술을 따르게 했다. 예의 그 약초로 담갔다는 술이었는데, 릴리엔은 황후가 술을 마시는 동안 입에 대는 척만 하고 마시지는 않았다.
“오늘은 폐하께 긴히 청할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어머, 그래요?"
무슨 부탁이든 말만 하라고 할것 같았던 황후의 얼굴에 의외로 난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릴리에, 그대가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잘....모르겠네요. 실수만 하는 게 아닐지…….”
“황후 폐하께서 조금만 나서 주시면 제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릴리에의 부드러운 설득에도 황후는 망설였다. 아무래도 용기가 나지 않는 게 아니라 내키지 않는 듯했다.
그때 서미나 백작 부인이 적절하게 나섰다.
“황후 폐하, 대공비 전하께서는 정도를 아시는 분이니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으실 겁니다.”
“으음…….”
“게다가 대공비 전하께 받은 은혜가 있지 않습니까.”
서미나 백작 부인은 아라티네와 레이첼 사이에서 사건을 완만하게 해결시켜, 황제와 카스타나 선제후 그리고 황후까지 총 세사람의 문책을 피하게끔 도와준 릴리에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릴리엔은 속으로만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아라티네보다도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날 릴리에이 지혜를 빌려준 덕분에 아라티네는 망신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망신 거리가 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정부의 영전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황후의 행동을 두고 우아하고 세련된 방식이라며 놀랐다.
혹시 아라티네 황후 폐하께서 무슨 생각이 있으셔서 일부러 칩거하고 계신 게 아닐까?' 하는 추측마저 돌 정도였다.
세간의 평가에 깜깜한 아라티네도 오랜만에 카스타나 선제후의 칭찬을 받고 퍽 좋아하지 않았는가. 서미나 백작 부인이 넌지시 그 점을 지적하자 아라티네가 확실히 망설이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비전하께서는 황후 폐하의 좋은 의지처가 되어주실 분이십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윗분으로서 아량을 보여주심이 좋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 그래. 좋아요. 시녀장도 그리 말씀하시니 내 특별히 결심해 보지요.”
아라티네가 결국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릴리에, 나는 그대를 좋아하니까요. 말해 보아요. 너무 어려운 일은 들어줄 수 없지만…….”
“절대 무리한 부탁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릴리엔은 거듭 다짐한 후 서미나 백작 부인에게 눈짓했다. 백작 부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황후 폐하, 황후 폐하께서는 언제든지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 있으시죠?”
아라티네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거의 다 파악한 릴리에이 현명하게 덫을 놓았다.
덫인 줄도 모르고 아라티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가 먼저 찾아뵌 적은 없지만 저는 황후니까요.”
“그렇군요.”
역시 황후 폐하께서는 다르다는 릴리에의 인정에 아라티네가 웃기 시작했다.
“저는 사실 고민이에요. 대공전하와 황제 폐하의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요.”
사실 황제뿐 아니라 다미언과 사이가 원만한 사람을 찾는 게 어려웠다.
“청을 하나 올리고 싶어도 황제폐하를 알현하기가 쉽지 않네요.”
릴리엔의 말에 아라티네는 뿌듯함을 느꼈다.
릴리엔은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차고 있는 휘황한 장신구들도 황후인 아라티네조차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근데 저 대단한 사람도 마음대로 황제를 알현할 수 없는데, 아라티네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클로드를 먼저 만나러 가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걸로 릴리엔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혹시 황후 폐하께서 저 대신에 폐하를 알현해서 청을 올려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청을 올렸다고 하면 폐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황후 폐하의 존함을 빌리고 싶습니다.”
이어진 릴리에의 말로 인해 우월감에 도취된 아라티네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까 마신 술 덕분에 머리가 몽롱해진 탓도 있었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어렵지 않지요, 릴리에, 내가 무엇을 청하면 될까요?”
“제 부탁은…….”
릴리엔이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춰 부탁했다.
"자그레브를 대공비에게 보내고 싶다고 해 달라고요?”
“네.”
고이 자란 아라티네는 황실이 은밀히 소유 중인 고대 병기에 대해 알지 못했다. 자그레브가 대체 무엇이냐는 황후의 질문에 릴리엔은 황실의 보물을 구경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제야 아라 티네는 마음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소유의 보물을 구경하고 싶을 뿐이라니. 정말 큰 부탁이 아니었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난색을 표하지 말걸 그랬다는 생각이 잠깐들었다. 아쉬운 마음에 아라티네는 더욱 너그럽게 장담했다.
“대공비의 그런 귀여운 부탁이라면 안 들어줄 수가 없지요. 걱정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 * *
아라티네와의 대화가 회의보다 일찍 마무리되었기에, 릴리엔은다미언을 기다리게 되었다.
“비!”
“오셨군요,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맑게 갠 하늘에 충만한 햇살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
선제후들의 위장을 박박 긁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만난 다미언의 얼굴은 마치 싱그럽게 피어난 화려한 작약 송이 같았다.
“비께서 기다려 주셨다니 기뻐요…….”
“누가 보면 세 시간이 아니라 3주 만에 다시 만난 줄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염병 좀 작작 떨라고 아이반이 눈치를 주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매정하신 나의 비께서는 괜찮으셨겠지만 많이 보고 싶었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만큼 릴리에에게 다정한 남자가 유난을 떨었다.
어차피 제국 사교계 전체에 소문이 날 만큼 난 터라, 릴리엔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할 일은 다 잘 마치셨나요?"
“그럼요. 자, 마차에 오르세요.”
릴리엔은 아까보다 좀 더 자연스럽게 다미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대화의 기간 중 선제후들은 각 회의 때마다 불신임 투표를 진행한다.
이때의 투표 결과는 정식으로 반영되지는 않지만 선제후들의 의중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늘 그랬듯이 기권이 한 표 있었지만 이번에는 신임이 두 표, 불신임이 네 표가 나왔답니다.”
“황제파 중 한 선제후가 의중을 바꾼 건가요?”
“완전히 의중을 바꿨다기보다는 홧김에 가깝다고 봐야겠지만요.
그래도 저희에겐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릴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홧김에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황제를 지지하는 세 사람의 결속에 금이 갔다는 게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아마 오늘을 기점으로 다들 계산속이 복잡해질 것이다.
“저 잘했지요?”
“네, 네. 잘하셨습니다.”
다미언이 의미심장한 빛을 띠고 말끄러미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촉촉한 보랏빛 눈동자에 릴리엔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일일이 상을 받으셔야겠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인데요.
물론 비께서 매정히 싫다 하시면 별수 없지만…….”
종알종알 섭섭한 척을 하는 다 미언의 얼굴 위로 어린 다미언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음을 열면 이토록 곰살궂은 사람인데. 대체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도록 만든 걸까.
릴리엔의 단정한 눈썹이 약간 팔자를 그린 순간, 다미언은 귀신같이 눈치챘다.
'마음이 약해졌다.'
다미언이 내심 웃었다. 무슨 이 유인진 모르겠지만 기회였다.
“자아.”
다미언이 뺨을 내밀고 눈을 감았다. 릴리에이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 * *
기회를 놓치지 않는 다미언이 행복한 아기 고양이처럼 골골거리며 릴리엔에게 귀염을 듬뿍 받는 동안.
클로드는 전혀 행복할 수가 없었다.
“불신임이 네 표라고?”
“그, 그렇습니다만 폐하, 이번 투표는 결과에 반영되는 게 아니며 만장일치도 아니고……."
클로드가 잉크병을 들어 냅다 보고를 하는 보좌관에게 던졌다.
퍽, 하고 가슴에 잉크병이 맞았다. 물리적인 충격이 크진 않았지만 검은 잉크를 뒤집어 쓴 정신적인 충격은 컸다.
"폐하!"
“닥쳐라, 이 무능한 놈!"
보고만 했을 뿐, 실제적으로는 이 결과에 관여한 바가 없는 보좌관으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좀처럼 분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네 표라고? 네 표?”
그 이리떼 같은 놈들이 결국 나를 배신해?
그동안 레이첼이 소극적으로 구는 통에 해결하지 못한 분노가 다시 한번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클로드는 팔을 뻗어 집무실 책상 위를 와르르 쓸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