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집기들이 와장창 부서지고 쏟아졌다. 보좌관은 당황했다.
‘레이첼 부인 외에는 그 누구의 앞에서도 이렇게 분을 터트리지 않으셨는데…….’
보좌관은 그게 황제가 그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레이첼을 존중받지 못하는 정부라고 생각해 종종 업신여기곤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레이첼이 그의 분노를 받아 주었기에 황제가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거였다.
바로 그때, 집무실 바깥에 서 있던 시종이 기척을 냈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폐하를 알현하고자 하십니다.”
“.......!”
처음 있는 일이었다. 클로드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중얼거렸다.
“아라티네가?”
그의 황후가 된 뒤로 아라티네는 오히려 더 마음을 열지 못했다. 갖은 수를 써 보던 황제는 결국 아라티네를 반쯤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대체 무슨 일이지?'
“황후를 알현실로 모셔라.”
“분부 받들겠습니다.”
클로드는 엉망이 된 집무실과 보좌관을 내버려 두고 아라티네를 만나기 위해 알현실로 향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시녀들을 거느리고 온 황후가 흠잡을 데 없는 동작으로 인사를 올렸다. 황제의 시종들은 오랜만에 보는 황후의 금발 머리와 갈색 눈동자가 상당히 낯익다고 생각했다.
전혀 다른 이미지인데도 레이첼부인의 얼굴이 언뜻 떠올랐다.
“무슨 일로 예까지 오셨소?”
선황이 서거하기 전까지 분명 클로드와 아라티네는 연인이었다. 클로드가 형을 죽인 데는 아라티네의 남편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애써 황제가 되고, 모두의 반대와 위험을 무릅쓰고 아라티네를 황후로 올렸을 때 아라티네는 기뻐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클로드는 배신감을 느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라티네가기뻐할 수 없다는 걸 누구라도 이해했겠지만 클로드는 처음으로 자기 입맛대로 반응해 주지 않는 아라티네에게 크게 실망했다.
'나는 정부조차도 자기를 닮은 여자를 총애하는데.’
클로드는 아라티네가 알기 쉬운 자신의 사랑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클로드는 순전히 아라티네를 위해 황제가 된 게 아니었다.
권력욕과 아버지와 형에 대한 적대감이 주된 원인이었다. 기어이 아라티네를 손에 넣은 것도 형의 것을 완전히 빼앗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사랑도 아닌 사랑을 주면서도 아라티네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경악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폐하께 한 가지 청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아라티네는 클로 드가 유일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아주 오랜만에 먼저 자존심을 굽히고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하니, 괘씸한 마음아래에서 기특하다는 생각과 ‘그럼 그렇지하는 오만한 감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흠, 크흠.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어려운 발걸음을 하시었소?”
“대공비에게 자그레브를 보내고 싶습니다.”
"..!”
클로드는 놀라고 말았다.
'대공비에게 고대 병기를 보내고 싶다고?'
하지만 아라티네의 얼굴에 악의는 없었다.
‘설마…… 카스타나 선제후가 시킨 일인가?’
클로드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오늘 회의에서는 한 명이 기권했다. 그 기권은 카스타나 선제후가 던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혹시 카스타나 선제후가 중립을 깨고 그를 지지하기로 결심한다면……
안 그래도 오늘 한 명의 선제후가 그에게서 돌아섰다. 황제는 분노했고, 지지 기반이 흔들린다는 생각에 다급해져 있었다.
클로드는 깊이 생각해 보는 대신 마지막으로 한 번만 확인해 보기로 했다.
“황후, 혹시 누군가가 황후에게 대신 이런 청을 올리라고 부탁했소?”
아라티네가 깜짝 놀랐다.
“어머나, 네. 맞아요. 폐하, 어떻게 그걸…….”
됐다.
황제가 성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대공가를 치는 거라면 그에게도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게다가 레이첼에게 백작위를 준 일로 카스타나와 아라티네의 눈치가 보이던 차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라티네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형보다 더 황제답게, 형보다 더 너그럽게 황후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욕심과 성급함, 두 가지가 갖춰지자 눈은 완벽하게 가려졌다.
말려 줄 사람도 이 자리에 없었다.
“알겠소. 더 설명할 필요는 없소. 내 황후의 부탁을 들어주리다. 칩거조차 깨고 내게 직접 부탁을 하러 올 정도이니……."
아라티네는 묘한 눈빛으로 클로 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남편의 동생과 재혼한 희대의 탕녀로 만든 남자였다.
아라티네는 클로드가 이도에 선 황을 죽였다는 건 믿지 않았다.
왜냐면 클로드가 아라티네를 사랑해서 황제가 된 거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아라티네는 명예가 손상된 게 속상하면서도, 그 정도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아라티네만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보란 듯이 정부를 끼고 살았다.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섭섭한 마음에 그동안 아라티네는 아버지의 닦달과 재촉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칩거해 왔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두 말 않고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니, 아라티네의 연약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오래전 남몰래 눈을 피해 애틋하게 사랑을 나누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폐하…….”
아라티네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시종일관 그를 거부해 오던 아라티네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걸 느끼자 클로드의 뱃속에서도 만족스러운 정염이 불길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문밖에는 한 명의 여인이 찾아와 있었다.
백작이 된 레이첼이었다.
“황후께서 와 계시다고?”
첫 선제후 회의의 표결 결과를 듣고 찾아온 참이었는데, 참으로 의외의 소식이지 않은가.
레이첼이 붉은 꽃이 그려진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시중을 드는 사람이 문밖에 물러나 있고 한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만 방 안에 남아 있다.
레이첼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추측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는 수 없군. 내 돌아가는 수밖에.”
문밖을 지키던 시종장은 불안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첼이 충고했다.
"폐하께는 내가 왔던 것을 고하지 말게. 역정을 내실지도 모르니.”
레이첼이 패악을 부리지 않고 돌아가는 데 안심한 시종은 그렇게 하겠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날.
다미언은 화의 기간의 기사단 사열식에 대원수 자격으로 초청되었다.
다미언은 초청에 응해 보란 듯이 대공저를 비웠다. 황태자인 마테오 역시 함께였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릴리에에게 거대한 선물이 하나 도착했다.
“아라티네 황후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릴리엔은 클로드 황제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둔 것임을 직감했다.
그 추측 대로였다. 다미언은 이미 자그레브에서 빠져 나간 전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릴리 엔에게 자그레브를 보낸다고 해서 릴리에이 폐인이 될 가능성은 낮다고 클로드는 생각했다.
하지만 만의 하나 잘못될 경우를 생각해서 면피할 구실이 필요했다. 클로드는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망설이지 않고 이용했다.
아라티네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크다는 반증이었다.
“열어 보시겠습니까?"
다미언의 영혼 조각이 자그레브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은 아직 대공 부부 둘만의 비밀이었다.
그래서 모린 부인과 리타는 불안하고 찝찝한 눈치였다.
하지만 릴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린 부인과 리타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릴리에의 지시에 따라 포장을 풀었다.
“이건…….”
“세상에, 대체 이게 뭐죠?”
포장을 풀자 모습을 드러낸 건 품위 있는 고가구 같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용도가 분명치 않았다.
전체적인 형태는 문이 달린 옷장처럼 생겼지만 일반적인 옷장보다 키가 훨씬 컸고 깊이는 얕았다.
마치 황궁 어딘가의 문짝을 떼어 보낸 것 같았다.
"이건 문이 달린 거울이에요.”
“거울에 문을 달아요?"
대체 어느 시절에 그런 유행이 있었단 말인가. 모린 부인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황후의 선물을 바라보았다.
아치 형태의 가장 높은 부분에, 태양 같은 형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짙은 색의 고급 목재를 조각한 솜씨가 아주 뛰어났지만…….
껄끄러운 부분은 문에 조각된 사람들이 전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거였다.
'묘하게 소름이 끼치는 물건이야.’
“문을 열어 볼까요, 비전하?”
릴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선물을 방 한쪽에 두라고 지시하고 사람들을 물렸다.
모린 부인과 리타가 찝찝해하면서 물러난 뒤 릴리엔은 거울, 자그레브의 문 앞에 섰다.
다미언이 묘사한 대로의 형상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작동했다고 했지.’
릴리엔은 일단 문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먼저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다.
“……자그레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이 문을 열어 봐야 할까.
릴리엔이 고민하는 사이, 갑자기 문틈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
오래 놀라고 있을 틈도 없었다.
곧바로 시야가 뒤집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