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릴리엔은 예의 반짝이는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군.”
“자그레브?”
전에 봤던 남색 머리를 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초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 남편의 영혼을 돌려받으러 왔어요.”
“그렇겠지.”
자그레브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지만 좀 늦었어.”
“네?”
방금 이 거울이 뭐라고……?
릴리엔은 놀랐고, 곧이어 화가 났다.
“설마 내 남편의 영혼을…….
릴리에의 감정에 반응하듯, 쨍하는 소리가 울렸다. 거울이 기겁해서 말렸다.
“아니, 아니야. 진정하라고, 부수진 않았거든.”
자그레브가 황급히 부정했다.
“내 말은 네 남편 영혼 조각을 당장 데려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말이야. 내가 그를 제압하다가 일이 좀 있었거든.”
분명히 말하는데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그레브가 항변했다.
“네 남편의 영혼이 더 작은 단위로 쪼개져 버렸는데, 문제는 각각의 기억 공간 속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안 한다는 거야. 이제는 여기 갇혔다는 자각도 없는 것 같아.”
릴리엔이 한숨을 쉬자 자그레브가 안절부절 눈치를 보았다.
"방법은 있다는 거죠?”
“그럼, 당연하지.”
자그레브는 영혼이 조각났어도 그 본질은 다미언이라고 설명했다. 본질이 다미언인 이상 릴리 엔을 알아볼 거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 어느 조각이라도 최소한 네게 호감은 가질 거야.”
“그래서요?”
“네가 각각의 기억 공간으로 가서 설득한다면 분명 너를 따라간다고 할 거란 말이야.”
".......”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줄래?”
릴리엔이 냉정한 눈빛으로 차갑게 선고했다.
"어디 가서 치유하는 거울이라고 하지 마세요.”
“쳇…….”
자그레브는 툴툴거리면서도 제 잘못은 아는지 항변하지 않았다.
“기억 공간까지는 어떻게 갈 수 있죠?”
“최대한 협력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나도 내가 지은 죄는 안다고.”
“실수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세요.”
“그래, 그래. 걱정하지 마. 음, 일단 네게 가장 큰 호감을 가질만한 조각부터 먼저 만나게 해줄게.”
자그레브가 손을 들어 허공을 한 번 휘젓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뜬금없이 문이 나타났다.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문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문에 손을 얹었다.
“기억 속에서의 시간은 현실과 다른 비율로 흐를 거야. 꿈을 꾼것과 같을 테니 걱정하지 않고 다녀와도 돼.”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공간이 일그러졌다.
* * *
문 안쪽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단출하고 어두운 공간. 릴리에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녀의 몸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는 탓에 주변을 약간 식별할 수 있었다.
원형 공간은 임시로 쳐 둔 막사안처럼 보였다. 테이블 같은 가구를 갖춰 둔 걸 보니 지휘관의 막사인 것 같았다.
다미언은 어디 있을까. 릴리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간이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얼굴을 식별하려 한 순간 릴리에의 몸에서 은은히 발하던 빛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릴리엔은 일단 조심스럽게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구냐.”
“아.”
잠에 취한 목소리였지만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은빛 칼은 정확하게 릴리엔을 겨눴다.
릴리에에게도 이젠 익숙해진 칼이었다.
'진짜네.’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릴리엔은 인정했다. 목소리도 그렇고 정말로 다미언이었다.
“전하.”
“내 막사에 여인을 들인다고 허락한 적은 없는데…….”
다미언이 느른하게 몸을 일으켰다.
기억 속 공간이라기엔 모든 게 너무 현실적이었다. 예전에 자그레브와 연결되어 꾼 꿈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것이 현실적인데, 다미언의 반응은 현실 같지 않았다.
“부대를 따라 다니는 창녀 같은 몰골도 아니고……."
싸늘하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말투는 릴리엔이 들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릴리엔을 향한 적이 없었다.
칼끝이 릴리에의 턱으로 올라왔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칠 떨었다. 다미언이 물었다.
“누가 보냈지?”
“전하, 저는…….”
“세 번은 없다. 누가 보냈지?"
전쟁터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다고 하니 이 다미언은 10대일 확률이 높았다. 10대인 다미언은 릴리엔에게 적대적인 걸 감안하더라도 보다 날카롭고 여유가 없는 성격인 것 같았다.
“아무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왔습니다. 전하를 만나기 위해서요.”
릴리엔으로서는 정직하게 대답한 거였지만 다미언의 코끝에서 가벼운 코웃음이 빠져나왔다.
다행히 다미언은 칼을 거뒀다.
하지만 그게 릴리엔을 처리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언제든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여유롭게 대처하시는 거구나.'
릴리엔으로서는 처음 보는 다미언의 날카로운 면모였다.
마음에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현실에서 본래의 다 미언이 릴리엔을 너무 좋아했다.
그 절대적인 애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릴리엔은 다미언의 이런 모습이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릴리에의 그런 반응에 다미언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오랜만에 잠이 든 사이에 귀신처럼 막사 안에 등장한 여자는 칼 앞에서도 크게 겁을 먹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동안 다미언이 그에게 보내진 여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암살자인 것 같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주변을 식별할 수 있는 다미언에게는 확연하게 보였다.
릴리에의 시선은 미묘하게 다미언을 빗겨 나가 있었다.
밤눈이 어두운 암살자라니.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저토록 태평하고 무방비하다.
마치 다미언이 그녀를 해칠 리가 없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백치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눈빛에 이지가 뚜렷했다.
칼을 거두고 뒤돌아선 다미언은 등불에 불을 붙였다. 확 하고 불꽃이 일었다.
그제야 릴리엔의 푸른 눈빛이 다미언을 정상적으로 쫓아왔다.
과거의 기억이라는 게 정말인지, 이 다미언은 그녀가 아는 다 미언보다 확연히 어려 보였다.
키도 조금 작았고, 두툼했던 어깨와 굵었던 팔, 단단했던 몸도 훨씬 날렵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불쑥 다미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릴리엔은 가까이 다가온 다미언의 보랏빛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 더 갸름한 얼굴에, 보랏빛 눈동자는 감정이라곤 요만큼도 없이 식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거울은 이 다미언이 여러 조각 중에서 릴리엔을 좋아할 확률이 가장 높은 조각이라고 했다.
대체 나머지 조각은 얼마나 적대적으로 군다는 걸까. 상상도 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잖아.”
“…전하께서 아름다우시다는 생각이요.”
문제는 원래 다미언이 어떻게 구는지 알고 있는 릴리에에게는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본래 다미언보다 약간 어린 얼굴이라 더욱 그랬다.
다미언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별 미친……"
릴리엔은 내심 감탄 비슷하게 놀라고 말았다. 볼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듯 좋아하지 않고 욕설을 중얼거리는 다미언이라니!!
신기하기는 했지만 이 다미언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릴리에이 그런 걱정을 하는 줄도 모르고, 다미언은 짜증스럽게 뒤로 물러나 한숨을 쉬며 풀어 놓았던 검이 달린 허리띠를 다시 허리에 묶었다.
'…응?’
허리띠 쪽에 익숙한 푸른 매듭이 언뜻 보였다. 뭔가 대단치 못한 솜씨로 만든 듯한, 다미언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릴리엔의 눈에 익었다.
그러나 그게 대체 뭔지 릴리에 이 식별할 틈은 없었다.
“나가.”
“전하.”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널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은혜를 베푼 거다. 그러니까 내 성질 그만 건드리고 꺼져.”
“음…….”
기억 속에서 다미언의 손에 죽는다고 해서 실제로도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다미언이 알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막사를 순순히 나갈 수도 없었다. 대체 릴리 엔이 어딜 간단 말인가?
“죄송합니다만 전하,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
태평하게 되묻는 릴리엔을 다미언이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인데…….”
바로 그때였다.
“전하!”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막사문이 벌컥 열렸다.
“기습입니다! 지금 당장 가보셔야……. 전하?”
문을 연 사람은 아이 반이었다.
과거 기억 속이라 그런지 그 역시 조금 낯선 얼굴이었다. 어쨌든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가웠지만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릴리에이 어색하게 웃자 아이반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저 미친 것 같은 여자는 뭡니까?”
“나도 모른다.”
다미언은 짜증을 내면서도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나가는 김에 릴리엔을 내쫓을까도 싶었지만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는 푸른색 눈동자를 바라보면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가라앉았다.
사실 당장 죽이지 않고 이만큼이나 대화 비슷한 걸 한 것도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체 왜일까. 옷차림이며 얼굴에 교태로운 기색은커녕 문을 잘 못 열고 만 사람처럼 단정한 모습이라서?
그에게 손끝 하나 닿지 않으면서, 담백한 얼굴로 “아름다우셔서요.” 같은 말이나 태평하게 지껄일 뿐이라서?
정체불명의 여자 앞에서 이례적.
으로 구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올 때까지 여기 얌전히 있어.”
이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하지만…….
“네, 그렇게 할게요."
릴리엔이 얌전히 대답하자,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든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