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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121화 (121/155)

121화.

다미언이 나간 동안,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막사 안을 돌아다녀보았다.

릴리엔은 전쟁터에는 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냥 행사에는 따라가 본 적이 있었기에 보통 막사를 어떻게 꾸려 놓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다미언의 막사는 전시.

상황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굉장히 단출한 편이었다.

전쟁 중의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집기들과 지휘부 회의를 위한 테이블과 지도 등.

철저하게 필요한 물건만 있는 황량한 공간이었다.

"......"

더 헤집고 돌아다니면 어린 다 미언이 싫어할 것 같았다. 릴리 엔은 얌전히 기다리기로 결정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잘 하고 있네?

그때 릴리엔의 귓전에 자그레브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그레브?”

-대답하지 마. 내 목소리는 너한테만 들려. 그리고 대충 네가 마음속으로 대답하면 들을 수 있어.

괜히 소리 내서 대답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거라며 자그레브가 경고했다. 릴리엔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미 충분히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어요.'

이게 정말 릴리엔에게 가장 큰 호감을 가질 다미언의 조각이 있는 장소인 걸까.

마음 속 물음에 자그레브가 그럼, 하고 태연하게 긍정했다.

-보자마자 바로 죽이지 않았잖아. 넌 잘 모르겠지만 그거 정말 대단한 거야.

'다른 조각은 보자마자 당장 죽이려 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건 아닐 거야. 여기 있는 조각이 상황적으로 보았을 때 네게 단숨에 반할 가능성이 가장 높긴 하지만 사실 다들 비슷하게 널 좋아하거든.

그러면서 자그레브는 충고했다.

- 어쨌든 죽지 않게 조심해. 이 기억 속에서 일어난 일들은 네 남편에게 영혼 조각이 돌아갔을 때 그의 기억 속에도 동일하게 남을 수도 있거든.

'그런 얘기 안 했잖아요?'

기억 속에서라도 릴리엔을 죽인 경험이 남으면 다미언은 굉장히 끔찍해할 것이다. 릴리에이 추궁하자 거울이 얼른 대답했다.

-아주 약간의 가능성 정도야, 가능성 정도. 게다가 그렇게 안되게 내가 도와줄 거야. 내 말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는 거고.

'혹시 모르는 경우가 없게 하세요.'

-알았다니까! 어쨌든 지금은 안심해도 돼. 거기 걔가 그렇게 안보이겠지만 이미 너한테 다 넘어 왔거든. 한 번 닿기만 하면 그대로 게임 끝이야.

닿기만 하면 게임 끝이라고?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뿐더러, 이 심각한 상황을 게임으로 비유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하를 두고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허이고, 대단한 사랑 납셨네.

비꼬듯 툴툴대는 말에 릴리엔은 한숨을 쉬며 더 엄격하게 말했다.

애초에 당신 실수로 벌어진 일이지 않습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튼 내 충고 잊지 마. 조금 있으면 네 남편이 좀 충격적인 꼴로 돌아와서 날카롭게 굴 건데, 걱정하지 말고 닿기만 해.

'.......'

- 내 말 믿어. 그럼 모든 일이다 잘 풀릴 거야.

미덥지 못한 충고만 남기고 거울의 목소리는 사라져 버렸다.

릴리엔은 오랜만에 두통이나 현기증 때문이 아닌 이유로 약연을 피우고 싶어졌다.

그때 마침 막사 밖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릴리엔은 놀란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듯 눈썹을 올렸다. 벌컥막사 문이 열렸다.

“전하!”

“됐으니까 다 닥치고 꺼져.”

물씬 피 냄새가 풍겼다.

분명 한 시간이 좀 못 되는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한데 멀끔한 꼴로 나갔던 다미언이 피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히 갑옷을 입고 나가지는 않으셨는데…….’

반만 갑옷을 걸친 듯, 다미언의 한쪽 팔과 어깨가 기괴한 형태로 부풀어 있었다.

아이반과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이 다급하게 그를 따라 들어왔다.

“알겠으니까 일단 그 칼부터 좀 어떻게 하게 해 주세요!”

“맞습니다, 대공 전하. 그 칼에서 심상치 않은 사악한 마력의 기운이……!”

“그건 찔린 내가 가장 잘 알아.”

다미언이 기괴한 형태의 갑옷을 입은 것 같은 팔로 반대쪽 어깻죽지에 박혀 있던 은빛 단도를 단숨에 뽑아내서 내던졌다. 어찌나 거친 손길이었는지 함께 솟구친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전하!”

다미언이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둘 다 꺼져, 죽여 버리기 전에.”

아이반은 갈팡질팡하는 눈빛으로 다미언과 소리도 못 내고 앉아 있는 릴리엔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별 수 없이 마법사와 함께 물러나고 말았다.

짜증스럽게 신음 소리를 낸 다 미언이 침대에서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던 릴리엔과 눈이 마주쳤다.

“전하…….”

"왜.”

다미언의 입가가 불길하게 비틀어졌다.

“이런 꼴을 보니 드디어 도망치고 싶어졌어?”

“그게 아니라…….”

상처를 좀 보게 해 달라고 할 새도 없이 다미언이 릴리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훅, 하고 피비린내가 풍겼다.

“........!”

다미언이 가까이 다가오자 릴리 엔은 드디어 눈치챌 수 있었다.

막사도 아닌 곳에서 뜬금없이 갑옷을 반만 걸친 게 아니었다.

찢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다미언의 살결 그리고 손 자체가 괴상한 형태로 변형되어 있었다.

새카맣게 윤기가 흐르는 강철같은 피부. 손과 팔은 원래 다미언의 것보다 1.5배 정도 크기로 부풀어 있었다.

손끝까지 날카로워 보이는 형태였다. 마냥 괴상하다고 하기에는 기묘하게 아름답기도 했다. 사람을 찢어 죽이는 데 특화된 마수의 팔 같았다.

'저…… 칼 때문인가?'

릴리엔이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바닥에 내던져진 단도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였지만 익숙한 형태임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전하께서 자신을 찌르라며 쥐어 준 칼이다.'

하지만 그때 다미언은 자신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그 칼로 찔러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을 뿐이다.

'마도 시대의 봉인구라고 하셨지.'

그 칼이 자신의 형태를 마수처럼 바꿔 놓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이건…….’

“왜, 내가 이런 괴물이라는 설명은 널 보낸 자가 해 주지 않았나?”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릴리엔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지금 중요한 건 다미언의 팔 모양이 약간 바뀐 게 아니었다.

“상처를 보여 주세요, 전하."

"뭐?”

"피가 많이 튀었습니다. 일단 여기 앉아 보세요.”

릴리엔은 다미언의 상처 입지 않은 쪽 어깨, 그러니까 마수처럼 형태가 변해 있는 곳을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짚었다.

“......!"

다미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릴리엔은 다미언의 피가 분수처럼 튀는 걸 본 순간 자그레브의 충고 같은 것도 싹 잊어버린 상태였다. 대범한 구석이 있는 그녀는 다미언이 놀라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너.."

릴리엔의 손이 닿는 순간, 이 어린 다미언은 미래의 그가 겪게 되는 혼이 나가는 경험을 동일하게 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이미 상체의 절반이 변형되어 있는 고통스러운 상태였기에, 어른 다미언이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감각을 겪게 되었다.

릴리엔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강렬할 정도로 부드러운 감각이 전신으로 내달렸다. 다미언은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다미언의 뇌는 고통에 길들여져, 있었다. 매일 고문을 당하며 살아온 거나 마찬가지. 망가지다시피 한 뇌는 릴리에이 주는 부드러운 감각, 잘 말린 아기 이불에 휩싸이는 편안한 감각을 강렬한 쾌감으로 인식했다.

이게 뭐지?

넌 대체 뭐야?

물론 릴리엔은 다미언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감각을 느끼는지 전혀 몰랐다.

그녀는 신중하게 다미언의 옷자락을 치우고 어깨를 살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나았군요. 다행입니다.”

뭐, 다행?

다미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렇게 빨리 상처가 아무는, 반쯤 괴물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보면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야 정상 아닌가?

모든 사람이 다 그랬는데?

심지어 지금은 간이 제법 커진 아이반도 처음에는 그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지금도 다미언의상처가 아무는 속도를 보면 좀 꺼림칙한 표정을 한다.

그런데 다행이라니?

다미언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도 모르고 릴리엔은 그저 상처를 살피던 손을 거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전하께서 회복력이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사실이었네요.”

빨리 이 영혼 조각들을 모아 다 미언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지금 다미언의 목에 난 상처도 곧 아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진심으로 안도하는 릴리엔을 보며 다미언의 보랏빛 눈동자가 혼란으로 마구 떨렸다.

"너…… 뭐야?”

설마 자신이 미친 걸까. 둘째형의 개수작에 걸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꿈속에서 그가 가장 바라는 걸 보고 있는 걸까?

“... ... ?”

릴리엔은 그제야 의아함을 느꼈다. 마구잡이로 붙잡아 상처를 살폈으니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다미언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전과 같이 날카로운 적대감은 없었다.

릴리엔은 거울의 충고대로 다미언에게 손을 댔다는 걸 깨닫고 조금 놀랐다.

'과연, 정말로 통하는 충고였나…….'

"…더…….”

그때 다미언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더…… 만져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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