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네?”
릴리엔은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아차 하는 사이에 다미언에게 안겨 침대 위를 굴렀다.
“전하?”
워낙 다미언과 이렇게 저렇게 일이 많았던 탓에 갑작스러운 스킨십에도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다미언이 뜨거운 숨을 내쉬며 반쯤 눕다시피 한 릴리에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릴리엔의 어깨 위로 뜨거운 한숨을 쉬었다.
“너 대체 뭐야?”
쉰 듯한 목소리에 릴리엔은 난 감해졌다. 다미언이 고개를 들었다. 예쁜 보랏빛 눈동자에는 어느새 그녀가 익숙하게 보았던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 상관없어……. 더 만져줘, 빨리.”
다미언의 막무가내식 조르기에 익숙한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다 미언의 뺨을 쓰다듬어 주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다미언의 형태가 변한 상반신에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모습이 된 걸까. 릴리엔은 다미언이 싫어하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며 얼굴에서 목으로, 목에서 어깻죽지로 조심스럽게 손을 옮겼다.
릴리엔의 손이 변형된 부분에 가까워질수록 다미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 진짜…….”
화를 내는 것 같진 않았지만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아플지도 모른다. 릴리엔은 슬금슬금 전진 시키던 손길을 황급히 물렸다.
“죄송합니다. 싫으시다면 그만 하겠습니다.”
“뭐?”
다미언의 표정이 대번 억울해졌다. 릴리엔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물었다.
“아니세요?”
“아니야!”
“아프신 건……"
“그것도 아니야.”
다미언의 강한 부정에 릴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픈 것도 싫은 것도 아니라면…
릴리엔의 손이 다시 다미언의 어깨에 닿았다. 다미언은 으흑, 하고 신음을 터트리며 릴리에에게 확 하고 쓰러졌다.
“전하!”
릴리엔이 아는 다미언보다 곱상하고 어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괜찮으세요?”
다미언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괜찮으냐고? 당연히 아니지!'
몸에 힘이 안 들어갈 정도로 좋은데, 이걸 괜찮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절로 아양 떠는 고양이처럼 목이 끊었다. 다미언은 거의 훌쩍거리면서 릴리에에게 안겼다.
“너 대체 뭐야.”
아까부터 하던 질문이었다. 릴리엔이 제일 대답하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사람이기는 해?"
“음…… 일단은요?”
릴리엔이 난감하게 대답했다.
미진한 대답에 다미언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지만 이내 상관없다는 듯 릴리엔의 허리를 꽉껴안았다.
“그래, 뭐든 상관없어. 네가 반쯤 미쳤다고 해도 좋아.”
“앞으로 계속 내 곁에 있기만해.”
“그건 좀…….”
여기가 기억 속이라는 걸 아는 릴리에이 솔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자 다미언이 충격을 받은 듯 고개를 휙 들었다.
검고 날카로운 손이 릴리에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보라색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떠날 거야?”
“아니, 전하…….”
"날 두고……?”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마치 마음이 물처럼 녹아내린 것 같았다. 다미언은 울컥 울고 싶어졌다. 울상을 본 릴리엔이 서둘러 그를 달랬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제가 여기에 계속 머무는 게 아니라 전하께서 절 따라오셔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내가 널?”
“네.”
릴리에이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내가 널 따라가면…… 평생 같이 있어 줄 거야?”
“그럴 거예요.”
이미 결혼한 사이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릴리엔은 갑자기 결혼 운운하면 다미언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말을 아꼈다.
그 말을 해 줬다면 까칠한 이곳의 다미언이라고 해도 좋아서 완전히 흐물흐물 녹아 버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좋아.”
“아, 정말요?”
“그래, 정말이야. 널 따라갈래.”
다미언이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릴리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평생 동안 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할게요.”
릴리엔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언은 그런 릴리엔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도 네가 누구인지 사람인지 아닌지도 상관없어.”
“널 따라갈게. 지금은 좀…
졸리니까 조금만 자고 나서.”
다미언의 육체와 정신 모두 이 날 하루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아니, 이 소년의 이십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봉인 무구에 난도질당하고, 이제야 겨우 숨 쉴 틈을 찾은 육신이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 자는 사이에…… 혼자 가면 안 돼.”
“네, 여기 있을게요.”
릴리엔의 우직한 대답이 다미언을 안심시켰다.
곧, 다미언의 숨소리가 조금씩 편안해졌다.
다미언에게 애착 인형처럼 껴안긴 채로, 릴리엔은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따라오겠다는 약속도 받았는데, 왜 아무 일도 없는 걸까?'
자그레브는 조용했다. 릴리엔은 자신의 가슴팍에서 잠이 든 다미언을 쓰다듬어 주었다.
다미언의 애착 인형이 된 상태로 릴리에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변을 멀뚱멀뚱 둘러보는 것뿐이었다.
이미 막사는 대충 둘러본 뒤라, 시선은 자연히 다미언에게 향했다.
'왠지 팔의 크기가 좀 줄어드신 것 같은데…….’
기적처럼 빠른 속도로 마력 발작이 가라앉는 중이라는 증거였지만 릴리엔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미언을 살펴보다 보니 릴리에의 시선이 자연히 다미언의 허리 띠에 매달려 있는 검과 익숙한 형태의 수술에 닿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다미언이 세드릭과 칼의 맹세를 할 때도 묘하게 익숙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삐뚤어진 짜임과 엉성한 마무리 그리고 비단실의 색은…….
'아.'
아주 오래 전에 그녀가 만들어 헤멘린나 대제후에게 선물한 매듭이 저렇지 않았던가?
“으음…….”
그때 잠에 취한 다미언의 손이 꿈질꿈질 움직였다. 잠에서 깨어난 건 아니고 잠결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매듭에 얽혔다.
잠결에서 손가락을 실 사이로 얽고 나서야 다시 끙 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드는 걸 보니 버릇이 된 행동인 것 같았다.
잘 때마다 저런 식으로 릴리엔에게 치대곤 하는 버릇이 이때부터 시작되곤 했나 보다.
혼자 잠들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나 릴리엔은 다미언이 가엾어졌다.
혼자 잘 줄도 모른다던 사람이 안정을 줄 보드라운 물건 하나도 없어서 겨우 매듭에 손가락을 얽고 안심하다니.
아마 저 매듭은 짓궂은 대제후가 다미언에게 보내주었을 것이고, 다미언은 저 매듭이 릴리엔이 만든 매듭이라는 것도 모를 공산이 컸다.
그녀 역시 저게 다미언의 손에 들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릴리엔은 매듭이 다미언에게 얼마나 큰 안정을 주는지는 몰랐다. 그저 자신이 만든 매듭이 험난한 시간 가운데서도 조그만 의지처가 되어 주는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위로가 되었다.
"전하께 도움이 되어 기뻐요.”
“저를 따라와 주세요. 계속 같이 있어요.”
잠든 다미언에게 릴리엔이 속삭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릴리 엔의 의식도 조금씩 흐려졌다.
릴리엔은 다미언을 따라서 함께 잠들었다.
* * *
“이제 좀 일어나지?”
“......!"
릴리엔은 번뜩 눈을 떴다. 눈을 뜬 곳은 다미언의 황량한 막사가 아닌 예의 거울로 둘러싸인 것 같은 장소였다.
“첫 성공, 축하해.”
"아.”
자그레브가 손을 내밀자 거기엔 반딧불처럼 보이는 작은 빛 덩어리가 동동 떠 있었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빛 덩어리가 요정처럼 포르르 날아 릴리엔의 손위로 올라왔다.
“첫 번째 조각이야.”
첫 번째 다미언의 조각이 마치 애교를 부리듯 릴리엔의 검지 끝에 달라붙었다. 릴리엔은 소중하게 그 빛을 품어 주었다.
…이상하게 빛 덩어리가 기뻐하는 게 전달되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죠?”
“두 개?”
두 조각이 남았다. 그 말은 즉 릴리엔이 다미언의 과거를 두 번 더 엿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혹시 그중에 하나가 자그레브가 전에 말했던 가장 어두운 기억속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두 번째를 찾으러 가겠습니다.”
“행동이 빨라 좋군.”
자그레브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두 번째 문이 나타났다.
“두 번째는 좀 더 과거로 가게 될 거야.”
"....."
"거기서도 도와주긴 할 거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문 앞으로 다가서던 릴리엔은 조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자그레브를 바라보았다.
다미언과 닿기만 하면 된다는 자그레브의 충고는 통했다. 릴리 엔과 닿자마자 다미언은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꿨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야. 그 모습…….’
거울은 모든 순간이 다미언의 기억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미언이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몸이 변한 것도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다미언도 똑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을까?
거울이 그런 릴리엔의 생각을 엿본 것처럼 말했다.
"두 번 더 과거를 둘러보고 나면 네가 궁금해하는 건 대강 다.
알게 될 거야.”
릴리엔은 손끝을 맴도는 다미언의 영혼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두 번째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