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두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릴리엔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서쪽 별궁…….”
하지만 릴리에이 내내 봐 온 것처럼 텅 비어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엉망진창으로 파괴되어 있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찾아! 멀리는 못 갔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야! 겁먹지 마라!”
“이 근처에 있을 테니 샅샅이 뒤져라! 찾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다!”
많은 사람이 별궁 전체를 뒤집다시피 하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많은 사람이 한가운데 서 있는 릴리엔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기만 하고 있다는 거였다.
마치 그들의 눈에는 릴리엔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맞아. 지금 저 사람들 눈에는 네가 안 보여. 내가 그렇게 했지.
자그레브가 마음을 읽은 것처럼 대답했다.
'어째서요?'
-저 사람들보다 먼저 네 남편을 찾아서 들키기 전에 설득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사람들이 다미언을 찾고 있다고?
릴리엔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튼이나 의자 밑, 서 랍 속을 닥치는 대로 뒤지는 사람들의 기세는 무척 흉흉했고 필사적이었다.
놀이 중에 숨어 버린 황자를 찾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도망친 죄인을 문책당하기 전에 되찾으려는 것 같군.
그 순간 릴리엔의 머릿속에 어떤 추측이 스쳤다.
서쪽 별궁에서 사람들이 어린아이인 다미언을 찾고 있다면……
'혹시 여기가 전하의 가장 어두운 기억 속이 아닐까.'
-그래, 맞아.
자그레브가 눈치를 보는 것처럼 대답했다.
-……사실 시간 순서상으로 하자면 여기가 가장 마지막인데, 곧이곧대로 여길 마지막으로 보내면 네가 날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당신 진짜…….’
-아니, 이번엔 나도 억울하다고, 내가 여기 처박아 둔 게 아니라 본인이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는 걸 어떡해?
자그레브가 항변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한테 뭐라고 할 게 아니라 네 남편을 먼저 찾는 게 좋을 거야. 상황이 더 진행되면 설득이 듣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득이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기억이 끝나는 순간 이 상황이 다시 한번 반복되겠지.
릴리엔이 아는 다미언은 재혼한 큰 형수와 둘째 형에 대해서도 비웃음으로 넘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어두운 기억, 공포와 두려움으로 새겨진 상처였다.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다미언의 어린 시절이 정확히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고달팠을 것이란 사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릴리에이 할 일은 명확해졌다.
'다시 한번 이 기억을 반복하기 전에 구해야 해.’
다행히 그녀에겐 짚이는 장소가한 군데 있었다.
엉뚱한 장소를 뒤지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릴리엔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위층으로 향했다.
'그때 그 다락방으로 가야 해.'
의아한 점은 층마다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겁에 질린 채로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명령을…….”
“황후 폐하께서 서거하신 일로 대노하셔서 …….”
이들이 말하는 황제 내외라면 어린 다미언의 부모님일 것이다.
릴리엔은 이런저런 추측을 이어가는 대신 얻은 정보를 다만 기억해 두었다. 지금은 생각보다도 발을 잽싸게 놀려야 할 때다.
'다 왔다!’
분명 이 계단을 올라가서 모퉁이를 돌면, 전에 어린 다미언을 만났던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올 것이다.
릴리엔은 확신을 가지고 모퉁이로 길을 꺾었다. 하지만……….
'어?’
갑자기 땅이 울렁거리더니 눈앞의 길이 일그러졌다.
괴물의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어둡고 일그러진 길.
현실 세계에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괴이한 형태의 통로를 눈앞에 두고 릴리엔은 당황했다.
'어째서…….’
-내가 한 짓이 아니야.
자그레브는 기억 속 공간이 철저히 주인인 다미언의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나이가 많을수록 기억의 정확도는 높아지고 비현실적인 요소도 배제된다.
하지만 이곳의 다미언은 어린아이였다. 그것도 트라우마가 된 상황을 반복해서 겪고 있는 무력하고 겁에 질린 어린아이였다.
-아마 네 남편의 영혼이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 접근하고 있다는 걸 초인적인 감각으로 감지한 모양이야.
릴리엔은 괴물이 먹이를 삼키려는 것처럼 일렁이는 보랏빛 통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린아이가 세운 최후의 방어벽이야. 네가 다가오는 걸 거부하고 있는…….
“……아니에요.”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불쑥 대답했다.
-뭐?
“아니라고요. 이건…… 나를 거절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다미언을 잘 몰랐다면 릴리엔은 자그레브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다미언은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는 냉소적이었고, 어떤 때는 깜짝 놀랄 만큼 사악하게 굴기도 했다.
세상 모든 것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구는 남자. 좋은 사람을 잔뜩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마음을 열어 주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릴리엔에게만 준게 있었다.
다미언 루펜바인은 릴리에 이슬라르를 사랑한다.
자그레브는 쪼개진 각각의 영혼이라도 본질은 다미언이라고 말했다. 릴리엔은 그 사실을 다미언의 첫 번째 기억에서 확인했다.
릴리에에게는 다미언이 준 확신이 있었다.
다미언은 절대로 릴리엔을 거부하지 못한다.
“……이건 전하께서 절 시험하는 거예요.”
겁 많은 릴리에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다미언은 온몸으로 불신이라는 철벽을 두드렸다. 스스로의 마음을 깎아 먹고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릴리에에게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믿게 하기 위해서다미언은 애썼다.
이제 다미언이 릴리에에게 묻는다.
여길 지나서라도 나를 만나러와 줄 거야?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자그레브가 서둘러 말리려 했다.
-그만두는 게 좋아! 네 남편의 영혼은 쪼개졌어도 강력해. 기억의 미로 속에 갇히면 너도 자아를 잃고 쪼개진 영혼이 되어 버릴 수도…….
릴리엔은 망설임 없이 통로 안으로 발을 디뎠다.
* * *
릴리엔의 확신대로 그건 미로가 아니었다.
통로는 구불거리며 릴리엔을 시험했다. 지진이 난 듯 흔들리기도 했고, 구분하기 어려운 환청이 한꺼번에 들려오기도 했다.
추웠다가 더웠다가, 경고음 같은 삐익 소리가 길게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릴리엔은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길의 끝이 나타났다.
손대기도 두려울 만큼 시커먼색을 띤 문이었다. 굳게 닫혀 있는 듯했고, 날카로운 형태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게 충분히 전해졌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 순간 릴리 엔은 자그레브의 말을 떠올렸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저 다미언에게 닿기만 하라는 충고가.
릴리엔은 조용히 문 위에 손을 얹었다. 강제로 열려고 시도하거나 두드리지 않았다.
손 다음에는 이마를 대고, 그 다음에는 천천히 입을 맞췄다.
"전하.”
그저 가만히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제가 왔어요.
당신의 사랑하는 릴리에이 왔어요.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다미언은 언제나처럼 릴리엔을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문틈으로 빛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번지는 빛에 릴리에이 기대고 있던 문도, 사람을 집어삼킬 것처럼 가혹하게 굴던 어두운 통로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빛에 구멍이 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렬한 빛에 릴리엔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눈을 떠 보니 그녀는 예의 그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릴리에의 추측대로 그 길은 다 미언에게로 직진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릴리엔이 서둘러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그곳에는 어린 다미언이 있었다.
뒤엉켜서 엉망으로 자란 머리카락, 여위고 마른 체형. 소금기가 내려앉은 것처럼 부르튼 입술…….
"다미언 전하…….”
늘 반짝이던 보랏빛 눈동자가 멍하니 릴리엔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든 형편없는 모습이 릴리 엔의 마음에 칼자국처럼 새겨졌다.
이 모습이 바로 다미언이 단단한 방어벽을 세워 지켜야만 했던 여린 살갗이었다. 상처 입기 쉬운 가장 내밀한 속살이었다.
“…… 너는……누구야?”
자세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색색거리는 목소리였다.
당장 달려가서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릴리엔이 한 발짝 다가서려고 하자 다미언은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릴리 엔은 그 모습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다미언이 충격을 받거나 도망갈지도 모른다.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다미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량해 보이는 생김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 미언의 경계심을 녹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유순한 미소를 지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전하. 제 이름은 릴리에 이슬라르, 튜린의 릴리엔입니다.”
"......."
“전하를 모시러 왔습니다. 제가 너무 늦었지요?”
이 기억 속에서 말고, 당신이 이렇게 되기 전에 만날 수 있었다면, 현실에서도 어린아이인 당신을 구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러니 하다못해 이 기억 속에서라도 다미언을 구해주고 싶었다.
“허락하신다면 전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겠어요?”
제발, 그러니까 제발 내 손을 잡아 주세요.
허상일 뿐일지라도, 당신이 아닌 당신의 조각일 뿐일지라도 구할 수 있게 허락해 줘요.
대답하지 않는 다미언 앞에서 릴리엔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망설이던 다미언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멍하던 보랏빛 눈동자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오려던 순간.
“여기 계셨군요, 전하."
“......!”
다미언이 흠칫 다시 움츠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