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24화 (124/155)

124화.

아까부터 다미언을 찾아다니던 사람들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남자는 마치 릴리엔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다미언에게 다가왔다.

“얌전히 저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이미 폐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으니 순순히 구는 게 좋으실 겁니다. 아무도 전하를 보호해 주지 않으실 테니까요.”

건방진 협박이었지만 어린 다미언은 대응하기는커녕 경계심을 보이며 움츠러드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다미언을 보니 릴리엔의 안에서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릴리엔이 벌떡 일어섰다.

“허락할 수 없다.”

“......!"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제야 릴리엔을 발견한 것처럼 놀랐다.

“다, 당신은 누구…….”

“네가 알 일 없는 이다.”

이 사람이 다미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라는 걸 알지만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릴리엔은 무력한 다미언의 앞을 단단히 막아섰다.

“물러가라. 전하를 데려가는 건 내가 허락할 수 없다.”

“하,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명령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다미언 전하를 보호하고 있는 한, 그 누구도 전하께 손을 대는 건 허락할 수 없다.”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야.

그때 전신에서 싸늘한 노기를 발하는 릴리엔의 옷자락을 살그머니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다미언이었다.

“전하.”

화를 내던 것도 잊고 릴리엔은 황급히 뒤로 돌아섰다. 그런 릴리엔의 행동을 오해했는지, 아이가 절박하게 옷을 잡으며 매달렸다.

“가지 마……!”

아이가 와락 매달렸다. 그와 동시에 다미언을 데려가려던 시종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일단 성공…… 인가?'

부황에게 그를 데려가려고 하던 시종이 사라졌다. 다미언의 두려움 중 하나를 릴리엔이 물리치는데 성공했다는 반증이었다.

그러나 기뻐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다미언을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릴리엔은 일단 침착하게 대답했다.

“가지 않아요, 전하."

".......”

“전하를 모시러 왔다고 말했지요. 저는 전하와 함께 가려고 왔습니다. 전하와 함께 가면 모를까 저 혼자서는 어디도 가 버리지 않을 겁니다.”

".......”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릴리 엔은 무슨 말을 더 할까 생각하다가 떠올렸다.

"평생 같이 있어 줄 거야?”

막사 안에서 그렇게 묻던 다미언의 간절한 음성을.

릴리엔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평생 같이 있어 드리겠습니다.

저를 믿어 주세요.”

릴리엔의 옷자락에 얼굴을 묻었던 아이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릴리엔은 다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 괴물이야. 상처가 아주 빨리 나아.”

“알고 있어요.”

릴리엔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전하께서 다치는 게 싫으니, 금방 나으실 수 있다면 오히려 안심입니다.”

다미언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곧 그가 푹 하고 고개를 숙였다.

릴리엔이 물었다.

“저랑 같이 가 주실래요?”

“.......”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릴리엔은 어른 다미언을 흉내 내며 달콤하게 유혹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어드릴게요, 네?”

"거짓말일지도… 모르잖아.”

고개를 숙인 채로 다미언이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다미언의 마음속에서 의심과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든 탓인지, 그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기 시작했다.

“같이 있어 준다고 해 놓고서…… 가 버리면… 싫어. 차라리 지금 그냥 가 버려.”

역시 초면에 한두 마디 말로 꾀는 건 무리인가.

어린 다미언이 자신에게 칼을 겨눈 다미언보다 난공불락일 줄은 몰랐다. 릴리엔이 고뇌하는데, 다미언의 말이 이어졌다.

“어머니가 나 때문에 자살했어.”

"네?”

“둘째 형이 그러는데 어머니는 내가 너무 싫어서 자기 자신을 죽여 버린 거래.”

“그런…….”

“그래서 부황께서 화가 난 거야.”

쿵쾅거리는 소리가 좀 더 가까워졌다. 다미언이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큰형도 이제 날 버릴 거야. 내가 어머니를 죽였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릴리엔은 와락 소리치고 말았다. 다미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아이를 놀라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이 상충했다.

릴리엔은 최대한 차분하지만 강하게 부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전하께서 어머니를 죽인 게 아닙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목숨을 버리기로 스스로 결정하신 겁니다. 전하께선 아무 잘못도 없어요.”

왜?

다미언의 눈에는 투명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나는 괴물인데. 둘째 형이 어머니께서는 괴물을 낳은 죄를 목숨으로 갚으신 거라고 말했어.”

클로드 루펜바인, 이 개자식.

릴리엔은 욕설을 삼키고 머리를 저었다.

“절대, 절대 그렇지 않아요. 우선 전하께서는 괴물이 아니십니다.”

소음이 조금 줄어들었다가……

다시 커졌다.

“아니야, 나는 괴물이 맞아.”

고집스럽게 말하며 다미언이 릴리엔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보여 줄까?”

장성한 다미언이라면 기를 쓰고 들키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릴리에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도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에는 그가 겪은 일이 너무 많았다.

헛된 희망을 품는 대신, 진실을 감추고 릴리엔을 영원히 붙잡는 길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어린 다미언에게는 그런 자제력이 없었다.

어린 다미언은 릴리엔을 시험하고 싶었다. 자신이 괴물인 걸 알아도 도망가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 했다.

릴리엔은 본능적으로 이게 다미언의 마지막 시험이라는 걸 눈치다.

천천히 릴리엔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린 다미언이 손을 들었다.

짤막하고 귀여운 아이다운 손이 릴리에의 눈앞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

울퉁불퉁한 핏줄이 솟아오르더니, 그 안에서 마치 괴물이 날뛰는 것처럼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전쟁터의 다미언이 갑옷을 입은 것 같은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형태의 팔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린 다미언의 것은 조금 더 다듬어지지 못한-그래서 더 괴상한 - 모양을 하고 있었다.

릴리엔은 최대한 놀란 기색을 삼갔지만 다미언을 속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아이는 팔을 늘어뜨리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갈 거지?”

릴리엔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가요.”

눈이 둥그레진 다미언을 향해, 릴리에이 힘주어 말했다.

“말씀드렸지만 저 혼자서는 못갑니다. 저는 전하를 데리러 왔어요.”

“하지만…….”

“제가 놀란 건 전하의 팔이 변하는 장면을 처음 봤기 때문이고, 저는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처음 보면 놀랄 수밖에 없잖아요.”

릴리엔은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어린 다미언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이때다. 릴리엔은 강수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저랑 같이 가시면 평생 같이 있어 드릴 거예요. 하지만 전하께서 제가 싫으시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전하께서 싫다고 하시면 물러나서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안 돼!”

어린 다미언이 깜짝 놀라 릴리 엔을 붙잡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괴물 같은 팔을 릴리에에게 대고 말았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미, 미안해! 나, 나, 일부러 이런 건 아냐. 싫어하지…….”

…마, 라고 애원하려던 말은 나오지 못했다.

릴리엔이 다미언의 손을 힘주어 잡았기 때문이었다.

“무섭지 않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랑 같이 가 주세요, 전하. 여기 더 있지 말아요. 여기가 좋아서 계시는 게 아니잖아요.”

어린 다미언은 릴리엔의 손에 잡힌 자기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이 여자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모습이 변하면 꼭 아프곤 했는데, 이 여자가 손을 잡아 주니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랬다. 늘 이렇게 몸이 변하면 아팠다. 아파서 엉엉 울어도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괴물이라며 도망을 쳤고 어머니인 황후는 비명을 지르며 저걸 당장 내 눈앞에서 치우라고 악을 쓴 적도 있었다.

부황은 다미언을 별궁에 유폐시켰고 둘째 형은 저주의 말을 쏟아 내며 즐거워했다. 도망가거나 화내지 않는 건 큰형 이도엘뿐이었다. 하지만 이도엘이 시간을 내서 밤새 동화책을 읽어 준 날에도 기뻤지만 계속 아팠다.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이도엘은 바빠서 많은 시간을 내줄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는 큰형을 좀 닮은 데가 있었다.

"…정말로 평생 같이 있어 줄거야?”

“네.”

“날 지켜 준다고 했지."

“그것도 평생이요.”

다미언은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사실 아이로서는 여기까지 버틴 것도 상당히 용을 쓴 거였다.

아이가 마침내 릴리에의 품에 안겼다. 릴리엔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환영했다.

“나를 버리면 안 돼. 당신을 죽여 버릴지도 몰라. 나는 나쁜 괴물이니까.”

“전하.”

다미언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는 대신, 릴리엔은 일단 아이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저는 튜린 사람입니다. 튜린 사람은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지 않습니다.”

“......"

“남은 평생 저는 전하의 것이고 전하께서는 이 릴리에의 것입니다. 저를 믿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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