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25화 (125/155)

125화.

* * *

“두 번째도 성공했네. 축하해.”

그 말대로 릴리엔을 맴도는 다 미언의 영혼 조각, 둥그런 빛 덩어리가 조금 더 커져 있었다.

하지만 성공했다는 성취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가라 앉았다.

거울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래? 안 기뻐?”

기쁠 수가 없었다. 다미언이 여태까지 그녀에게 숨겨 온 과거와 비밀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선대 황후폐하께서 극단적인 선택을….’

다미언은 릴리에의 자살이 트리 거가 되어 정신이 무너져 버린다. 릴리엔은 여태까지 그게 자그레브로 인해 다미언의 영혼에 흠이 난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어….’

다미언은 어머니가 자기를 낳은 일을 비관해 자살했다고 말했다.

그 일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다 알지도 못하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도 참혹한 말이었다.

그런 다미언을 보호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도엘이 언제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그날, 다미언은 혼자였다.

어째서 그래야만 했을까. 다미언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혼자여야 했을까. 그렇게까지 참혹하게 살아야만 했던 걸까.

"음…… 너 설마 이제 와서 네 남편이 필사적으로 숨긴 비밀을 엿본 데 대한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건 아니지?”

헛다리를 짚는 거울에 대답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릴리엔은 한숨만 쉬었다. 거울이 안절부절못하며 우울해 보이는 릴리엔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야, 어쩌겠어. 이건 다 불가항력이었잖아, 불가항력. 응?”

말없이 서 있는 릴리에의 눈앞에 다시 불쑥 문이 나타났다.

자그레브가 살살 릴리엔을 달랬다.

“여기서 그만둘 수 없는 건 알지?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쓸데없는 생각 말고 제발 불법 점거자…… 아니, 네 남편을 데리고가 주라. 응?”

“…죄책감을 느끼는 게 아닙니다.”

릴리엔을 필사적으로 사랑하는 다미언이 방금 폭로된 비밀을 스스로 털어놓을 가능성은 낮았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릴리엔은 죽을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미언이 살얼음판을 밟듯 릴리 엔을 사랑하며 버림받을까 봐 불안해하는 줄도 모르고 평생을 그렇게 내버려 두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빨리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기억 속에서라도 어린 다미언을 구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미안했다.

다미언은 릴리에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주었다.

하지만 방금 이 기억으로 명백해졌다.

릴리엔은 다미언이 스스로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확신을 주지 못했다.

받기만 한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그레브의 표정이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와락 구겨졌다.

'이게 웬 한 쌍의 바퀴벌레다운 소감이신지?'

치유하는 거울이라고 주장하는 주제에 공감능력은 한없이 0에 수렴하는 자그레브였다.

어쨌든 아쉬운 쪽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자그레브는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참고 달랬다.

“걱정하지 마. 그 문 안에 있는 네 남편은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 속에 갇혀 있어. 네 마음이 아플 일은 별로 없을 거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설득해서, 데리고 나오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은 생략했다.

“네 남편을 다 모아서 데리고 나가게 되면 내가 선물도 줄 예정인데? 응?”

다행히 릴리엔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자그레브가 준다는 선물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릴리에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일단 다미언의 조각을 모아서 데리고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릴리엔은 마지막 세 번째 문을 열었다.

* * *

마지막 기억 속 공간 역시 황궁이었다.

'서쪽 별궁은 아니고………. 정궁인 모양인데.'

다미언에게 행복한 기억 속이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아까처럼 음산하거나 긴박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화창한 날씨에 햇살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시종과 시녀들은 절제된 몸가짐으로 주변을 거닐고 있었고, 분위기는 한없이 평화로웠다.

두 번째 기억에서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눈에 아직 릴리에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그레브가 또 그녀의 모습을 감춰 준 것 같았다. 이제까지 거울의 그런 판단력은 제법 도움이 되었기에, 릴리엔은 일단 이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잠시 후.

“마테오 전하께서 벌써 다섯 살이 되셨군요.”

“아이가 자라는 걸 보면 세월이 빠르지.”

복도 저편에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짙은 금발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럼 황태자 전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돌아가게.”

두 사람은 헤어지고 황태자라고 불린 남자만 릴리엔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짙은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가 낯이 익었다.

'이도에 선황 폐하!'

말로만 듣던 사람을 실제로 보는 셈이었다. 낯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언젠가 본 초상화 속 모습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량해 보이는 얼굴에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시종들을 거느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릴리에도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아버지!"

"테오, 내 아들!”

문이 열리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작은 아이를 이도엘이 번쩍 안아 들었다. 아버지의 손에서, 있을 수 없는 높이로 들어 올려진 아이가 깔깔 웃으며 자지러졌다.

아버지에게 안긴 마테오는 지금의 점잖고 냉소적인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활달하고 천진난만해 보였다.

하지만 릴리에의 시선을 빼앗은 건 두 부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릴리에의 눈에는 창가에 서 있는 무표정한 소년만이 보였다.

잘 다듬어진 백금발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인데도 이미 눈이 부실 정도였다. 살짝 뚱해 보이는 무표정마저도 아름다웠다.

다미언이었다.

행복해 보이는 조카와 큰형의 모습을 바라보는 표정에 딱히 어떠한 감정이 깃들어 있진 않았지만…….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다미언의 시선을 따라 다정해 보이는 두부자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 마음껏 귀염을 받는 마테오는 릴리엔이 조금 전 두 번째 기억에서 본 다미언과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다.

하지만 연령대를 제외하고는 두 아이의 모습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다.

마테오에게서는 사랑을 아주 많이 받은 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좔좔 흘렀다. 소년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에게 안겼고 이도엘의 시종들과 유모 모린 부인도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릴리엔은 시종들 사이에서 젊은 엘런 총관을 찾아낼 수 있었다.

릴리엔은 다시 다미언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 화목한 광경에서 소외되고 있었다.

마테오의 나이 때 다미언이 어땠는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릴리엔은 방심하다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 듯 섬뜩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다미언에게로 다가갔다.

다미언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그 옆에 있어 주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이도엘과 마테오의 다정한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라티네는?”

마침내 이도엘이 마테오를 모린 부인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태자비 전하께서는 아직 몸이 미령하시어…….”

"음, 그렇군.”

저어하며 대답하는 모린 부인과 달리 이도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야 그 태양같이 환한 얼굴을 다미언에게로 향했다.

"다미언, 말도 없이 황궁에 돌아오더니! 이 형보다도 조카를 먼저 만났단 말이지.”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아니기는.”

이도엘이 거친 손길로 남동생을 팡팡 두드리고 목을 조르듯 껴안았다. 다미언이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표정을 짓자 이도엘이

"어이쿠.”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 이 형이 귀찮다 이 말이지. 내가 테오를 키우면서도 노심초사한다. 저 녀석도 너같이 자라서 이 아비를 귀찮아하겠지.

사내놈들이란!”

“전 안 그래요!”

모린 부인의 옆에서 마테오가 씩씩하게 소리쳤다. 다미언이 세상 귀찮은 표정으로 “그래, 안그렇겠지.” 하고 대꾸했다.

“음! 둘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 같아 내 마음이 좋다.”

그 말에 마테오도 다미언도 부정하고 싶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 도엘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혹은 모른 척하고 있거나.

“자, 테오. 아버지는 네 삼촌과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만 돌아가거라."

마테오는 싫은지 미적거렸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저녁때 다시 보자는 약속을 받고서야 유모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

마테오가 방을 나가자마자…

"다미언.”

“응?”

이도엘이 다미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

“이 녀석아.”

쿵, 하고 다미언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형.”

갑자기 쥐어박혔으나 다미언은 놀라지 않았다. 그 실력을 생각해 보면 이도엘에게 일부러 얻어맞아 준 게 분명해 보였다.

이도에도 그 사실을 잘 아는 듯했다.

“지은 죄를 알기는 아는 모양이지.”

“무슨 죄는 죄야. 원래 우리나라는 황족도 군공을 세울 의무가 있는데.”

“열세 살 먹은 황자가 궁을 뛰쳐나가 최전방으로 나가야 하는 의무는 없어, 다미언.”

“열세 살 먹은 괴물이지, 형."

"다미언 루펜바인."

이도엘이 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원체 선량해 보이는 얼굴이라 무서워 보이지는 않았다.

다미언도 설렁설렁 “알았어, 알았다니까” 하고 대충 대답할 뿐이었다.

이도엘이 그런 남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운한 듯도 했고 미안한 것 같기도 했으며 대견해하는 것 같기도 한. 여러 모로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늘 네가 걱정이다, 다미언.”

“사서 걱정이야.”

다미언이 단칼에 잘라 버렸다.

“형도 알겠지만 난 어디 가서 죽을 놈이 아니잖아.”

“네가 죽을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야. 아니, 물론 네 신변도 걱정되지.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네가 그 나이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미안해, 형. 그 소원은 들어주기 어렵겠다. 대신 다른 거 들어줄게. 요번에 히스웰 후작 부인 이 형수한테 대들었다며? 거기가서 한바탕하고 올까?”

“다미언.”

“아니면 남왕국 국왕의 목이라도 잘라다 주고, 저 꽃을 보니 형이 남왕국 식 보석을 제법 좋아할 것 같은데.”

다미언이 이도엘의 책상 화병에 꽂혀 있는 화려하고 붉은 꽃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릴리엔은 다미언이 툭툭거리기 위해 아무거나 되는 대로 트집잡아 말을 내뱉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도에도 알아차렸는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건 선물로 받은 거야. 어쨌든 내겐 둘 다 필요 없겠다, 다 미언.”

이도엘의 말은 차가운 거절이 아니었다. 그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동생이 자기 때문에 손에 피를 묻히는 가정만으로도 마음이 괴로운 눈치였다.

하지만 다미언에게는 상처가 됐다.

“그렇겠지. 나도 형한텐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다미언.”

“그만 갈게, 형. 나 지금 좀 피곤해.”

“네가?”

이도엘이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다미언은 어느새 상처받은 기색을 싹 지우고 천연덕스럽게 웃는 얼굴로 “그럼.” 하고 대꾸했다.

“부황이 저녁에 보자고 부르셨는데 거기 안 가려면 지금부터 아파야 할 것 같거든.”

“이 녀석아.”

타일러 보려고 해 봤자 소용없었다. 다미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이도엘은 다 큰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떠나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도엘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릴리엔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미언은 이도에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건 이도엘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둘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미묘한 상황이었다.

릴리엔은 이도엘의 선량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떠나는 다미언의 뒤를 쫒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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