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26화 (126/155)

126화.

* * *

다미언이 황궁을 가로질렀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황황히 뒤로 물러서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다미언은 개의치 않는 듯, 권태로운 걸음으로 자기 처소로 향했다. 예의 서쪽 별궁이었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은 장소일 텐데. 릴리엔은 흘긋 다 미언을 바라보았지만 다미언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릴리엔은 다미언을 혼자두고 싶지 않았다. 바짝 뒤따라서서 방 안에 들어갔는데

"..!"

문이 닫히자마자 날카로운 검이 릴리엔의 목을 겨눴다.

검을 겨눈 사람은 당연히 다미언이었다.

“너 뭐야?”

실수나 우연 같은 게 아니었다.

다미언의 시선은 아주 정확히 릴리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릴리엔은 멍청해 보일 줄 알면서도 묻고 말았다.

“제가 보이셨어요?”

“아주 잘.”

“그러셨구나…….”

자그레브가 실수할 리는 없고, 아마 일부러 그런 모양이었다.

이쪽이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해서 저지른 짓이겠지만, 그래도 사전에 미리 설명을 해 줬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릴리엔은 날카로운 칼로 위협당하고 있는 와중에도 아주 태평해 보였다.

다미언으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왠지 이상하게 당장 죽이고 싶지가 않았다.

'저 태평한 표정이 묘하게……'

……이도엘을 닮았다.

그 생각을 하자 짜증이 났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음…… 죄송하지만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얼빠진 대답이었다. 다미언이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릴리 엔은 기가 죽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제가 딱히 갈 곳이 없어서요.”

"나 말고는 아무도 널 못 보는 모양인데, 아무 데나 처박혀 있으면 되잖아.”

“저기, 그러니까 전하…….”

릴리엔은 이제까지의 경험을 떠올리며 다미언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다미언은 용납하지 않았다.

“......!"

칼끝이 한층 위협적으로 릴리엔을 향했다.

“손대지 마.”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고요했다. 하지만 살의만큼은 둔감한 릴리에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확실했다.

"난 지금 기분이 아주 안 좋아.”

“그러니까 경고하는데 더 건드리지 말고 나가.”

* * *

릴리에이 순순히 다미언의 말을 들은 건 기가 죽었다거나 두려워 서가 아니었다.

'기분이 안 좋다고 하시니까.….'

기분이 안 좋은 다미언에게 설불리 접촉이나 설득을 시도하다가 다미언의 손에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딱히 어딘가 갈 곳은 없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못 본다고 해도 다미언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릴리엔은 잠시 고민 끝에 다미언의 방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일순 다미언이 나와서 쫓아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귀찮은지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릴리엔은 이도엘이며 마테오, 클로드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복도 저쪽에서 시종이 기사 몇 명을 거느리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말았다. 다급하고 비장한 표정에 릴리엔은 본인이 다미언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깜빡 잊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종이 다미언의 방문을 두드렸다.

“다미언 전하,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묵묵부답.

시종이 두려운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황제가 단단히 명령했기 때문에 이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전하께서 움직이지 않으시면 폐하께서 이도에 전하를 문책하겠다고 하셨습니다.”

“.......”

과연, 다미언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하지만 평범하게 말을 들으러 나타난 건 아니었다.

“…감히 황태자의 이름을 입에 담은 삿된 주둥아리가 네놈 것이냐?”

“히, 히익!”

다미언의 손에 와락 멱살을 잡힌 시종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때 우연히 다미언의 눈이 릴리엔과 마주쳤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다미언이 시종의 멱살을 밀쳐 던졌다.

"윽……!”

우당탕, 하며 바닥을 굴렀지만 죽지는 않았다. 다미언이 기사들을 향해 물었다.

"어디 계시냐.”

“청화의 방에 계십니다. 전하, 무장을…….”

맨손으로도 충분히 아버지를 죽일 수 있고 그럴 마음도 있는 소년이 짜증스럽게 칼을 풀어 던져 버렸다. 한 기사가 황급히 칼을 줍는 동안 다미언이 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동그라졌던 시종과 기사가 황급히 다미언을 따르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던 릴리에도 조심스럽게 합류했다.

* * *

청화의 방은 황제가 주로 식사를 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긴 테이블 위에 다미언 몫의 식사 같은 건 없었다.

황제는 한 사람만을 위한 식사자리에 막내아들을 불러 세워 놓고 마치 막내아들이 투명 인간인 것처럼 우아하게 손가락을 씻었다.

멸시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다 미언은 익숙하게 앞자리의 의자를 지익 소리 나게 끌어다 앉았다.

황제는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미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씩 웃고는 두 발을 식탁 위에 척 걸쳐 놓았다.

"......"

그제야 황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다미언 루펜바인.”

"어라, 제가 보이셨습니까?”

다미언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미처 몰랐네요.”

몰랐다고 하면서 발을 내리지는 않았다.

“전쟁터에서 살인귀 짓을 하고 돌아다닌다더니, 그나마 인간 같은 구석도 죄 버리고 온 모양이구나.”

“나름 적성에 맞더라고요.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가.”

“글쎄다.”

황제의 주름진 입가에 냉소가 스몄다.

“너같이 인의예지도 모르는 괴물을 내 자식이라고 어찌 확신하겠느냐? 황후가 제 목숨을 끊어버렸으니 증명할 길은 없겠다마는.”

“섣불리 확신하지 말자꾸나."

황제가 우아하게 전채로 나온 음식을 포크로 찍어 음미했다.

다미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태도에 상처를 입어서 말을 멈춘 게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에 상처를 받기엔 그들 부자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다미언은 그저 화가 났다. 그는 한 번도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를 태어나게 한 남자가 책임질 것이 없다는 태도로 뻔뻔스럽게 나오니…….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입술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방에서 화가 난 사람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제의 말은 커튼 그늘에 숨어 상황을 보던 릴리에도 화나게 했다.

'…뭐?'

아들을 두고 인의예지도 모르는 괴물이라고 매도한 것도 모자라서 사생아 운운하는 소리까지.

게다가 다미언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황후의 자살을, 남편이자 아버지인 황제가 저토록 가볍게 언급하다니.

'전하께서도 선택만 할 수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자식으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으셨을 텐데….’

이도엘과 마테오의 다정한 모습, 작은 태양처럼 완벽하게 사랑받고 보살핌 받은 티가 나던 마테오, 정서적으로는 완전히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다미언의 어린 시절 모습이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릴리엔은 눈앞이 새빨갛게 물드는 듯한 강렬한 분노를 느꼈다.

선량하고 감정 기복이 적은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분노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할 수만 있다면 눈앞의 황제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원통했다.

릴리엔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황제를 죽여 버릴 수는 없다.

그는 죽여 봤자 다미언의 악몽같은 기억 속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은 물론 없었다.

숨어 있던 장소에서 불쑥 몸을 드러낸 릴리엔은 망설임 없이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다미언뿐이었다.

"!”

다미언이 눈을 크게 뜬 순간.

릴리엔이 황제가 뒤적이던 전채 접시를 휙 들어 올렸다. 그리고…….

“……윽!”

갑자기 허공에 떠오른 접시에 황제가 경악할 틈도 없이 접시가 황제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폐, 폐, 폐하!"

황제의 얼빠진 얼굴 위로 걸쭉한 소스와 연어 조각이 흘러내렸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엉망진창이 된 모습에 시종이 황급히 다가와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닦는다고 노력할수록 기름진 소스는 황제의 수염 속에 더 스며들기만 했다.

릴리엔은 그 정도로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미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을 다시 가로질렀다. 그리고 시종이 밀고 들어온 카트 위의 음식 접시를 집어 들었다.

“앗!”

“저게 또……!”

“폐하! 피하십시오!”

다들 경악했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 접시 위의 음식이 황제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걸 막지는 못했다.

"풉.”

황제의 이마에서 머리카락처럼 흘러내리는 소스와 면발을 본 다 미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만, 그만!”

결국 황제가 호령을 했다.

“다미언, 이게 대체 무슨 개만도 못한 짓이냐?”

“그러게요, 하하!”

황제는 이게 다미언의 요사스러운 능력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오해했다. 다미언은 오해를 바로잡는 대신 아예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황제가 노성을 질렀다.

"네가 정녕 내 손에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다미언은 시원스러운 웃음 끝에 눈물을 훔치며 밉살스럽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황제 폐하, 폐하휘하의 기사들 중에선 저를 죽일수 있을 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이…!”

“다음부터는 저를 휘어잡고 싶으면 좀 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미언 루펜바인!”

황제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기세는 다미언에게 넘어와 있었다. 다미언은 메롱 하고 혀를 내밀 뿐이었다.

“그럼 수고.”

다미언은 릴리엔을 향해 따라와 하고 입모양으로 말한 뒤, 분노한 황제를 내버려 두고 청화의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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