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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127화 (127/155)

127화.

“황제 폐하께 불경을 저지르고 그 죄를 내게 뒤집어씌우다니.”

말만 들어서는 추궁하는 것 같았지만 다미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릴리에도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동적으로 불경죄를 저질렀지만, 그녀로서는 황제를 죽이려 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많이 참은 거였기에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그러게요. 죽을죄를 지었네요.”

“당연히 죽을죄지. 하지만 내 마음에는 들었다.”

그 말에 릴리엔은 박장대소를 터트리던 다미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웃음을 생각하자 죄책감이 안 들 뿐 아니라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거면 충분하네요.”

“......."

다미언은 아주 낯설고 이상한 것을 바라보듯 릴리엔을 한참 빤히 바라보았다.

“……하는 짓을 보니 내 눈에만 보이는 환상은 아닌 것 같고. 너 대체 뭐야?”

다미언의 영혼 조각은 네가 뭐냐는 질문을 참 많이도 한다고 릴리엔은 생각했다.

고민하던 릴리엔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 솔직해져 보기로 결정했다.

“제 이름은 릴리엔입니다. 미래에 전하와 결혼하게 될 사람이랍니다.”

"뭐?”

다미언이 순간 아주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파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 농담 아주 웃겼어.”

“농담 아닌데요.”

“농담이어야 할 텐데. 난 그게 누가 됐든 청혼할 생각이 없거든.”

“저는 만난 지 하루도 안 되어 전하께 청혼을 받았는데요."

“더 안 믿기는군."

다미언이 키득키득 웃다가, 잔잔히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릴리엔을 발견했다.

…설마.

“진짜야?”

“무엇 하러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나한테 딸을 보낼 만한 정신 나간 사람이…….”

“있어요. 정신이 나가지는 않으셨지만.”

릴리엔은 착실히 대답했다. 이도 엘을 닮은-정확히는 생김새라기보다 분위기가 - 데다, 부황을 멋지게 엿 먹인 그녀는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믿기지도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먼저 만난 지 하루도 안 되어 청혼을 한다니?

하는 건 둘째치고 결혼을 했다면, 이 여자가 자기 같은 놈의 청혼을 받아 줬다는 말이 아닌가?

다미언은 확신했다.

'내게 어떤 병증이 있는지 모르고 속아 넘어간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 여자는 대체 그의 뭐가 마음에 들었을까.

'역시 얼굴이려나.'

다미언은 냉소적으로 추측했다.

릴리엔은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하가 어때서요? 정신이 나가지 않아도 결혼하고 싶어할 만한 좋은 신랑감이신데.”

“뭐?”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람?

“내가?”

“네.”

릴리에이 수줍게 배시시 웃었다. 다미언은 순간 움찔 놀라고 말았다.

뭐야, 저 얼굴?

정말로 내가 좋은 거야?

내가 잘해 줬어?

아니, 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사실이긴 해?

산발적으로 의문이 올라왔지만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가는 건 단 한 마디도 없었다. 릴리엔은다미언이 전혀 못 믿는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음, 그러니까…… 저한테는 잘해 주셨어요.”

그래, 잘해 줬다니 다행이긴 한데…….

다미언은 마른세수를 했다. 얼떨떨한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허깨비 같은 여자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사실이면 최소한 큰 형이 좋아하긴 하겠네.”

“.......”

다미언의 중얼거림에서 릴리엔은 그의 안에서 이도엘이 차지하는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자그레브는 이 기억이 그나마 다미언의 일생 중에서 행복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비록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형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가족이 있지만.

아버지인 황제는 그를 자식으로 취급하지도 않지만…….

이도엘이 살아 있고, 더 이상 궁 안에서 일방적으로 구박받지도 않는 이 시절이 다미언의 인생에서는 그나마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고작 이 정도가 다미언에게는 행복이었다.

"너 말이야, 내가…….”

다미언이 입을 연 순간.

쾅쾅, 다급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다미언, 나다. 문을 좀 열어 봐라.”

이도엘이었다.

"다미언, 안에 있지? 다미언?”

다미언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언제나 반가운 큰형인데, 순간적으로 반갑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잠깐이지만 '방해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뭘 방해받아……?'

혹시 내가 지금 형이 저 유령같은 여자와의 시간을 방해했다.

고 불쾌해하는 건가?

믿을 수가 없었다. 다미언은 멍하니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릴리 엔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커튼 뒤쪽으로 어설프게 몸을 숨겼다.

“방해 안 되도록 여기 숨어 있을게요.”

“아니면 방 밖에 나가 있을까요?”

“..…아니, 그냥 거기 있어."

릴리에도 저러는 마당에 형을 돌려보낼 이유가 없었다. 다미언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무슨 일이야, 형?”

“무슨 일이냐고?"

굳은 표정의 이도엘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예, 전하.”

시종들을 밖에 남겨 두고 이도 엘이 방 안에 들어왔다.

“네가 부황께 무슨 짓을 했는지 전해 들었다.”

“그랬겠지.”

"다미언.”

이도엘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끼리 이 얘기 벌써 마무리지었잖니. 부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다미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이 방 안에 우리 말고 릴리엔이라는 여자가 있는데, 이번엔 내가 아니라 그 여자가 그런 거야. 근데 그 여자가 내 미래의 아내래.

제정신으로 이런 얘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미언이 침묵하자 이도엘은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더욱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다미언, 네가 걱정스럽다. 알잖니.”

"…알아, 형.”

그들의 아버지는 황제였다.

다미언은 강하지만 황제가 결심하고 다미언을 죽이기로 하면 아주 방법이 없지도 않을 터였다.

굳이 죽이지 않는다 해도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다미언을 괴롭힐 수도 있었다.

"네가 조금만 조심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내가 널 지켜 줄 수 있지만…….”

다미언은 흘끔, 저도 모르게 릴리엔이 반쯤 몸을 숨긴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릴리엔의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알았어, 형. 되도록 조심할게.”

다미언은 자기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재빨리 이도엘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다미언.”

“약속할게, 정말로.”

“......"

이도엘은 물끄러미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미언이 거듭맹세했다.

“착하게 군다니까.”

“……다미언, 너는 내 동생이야."

"......."

“괴물도 사생아도 아니라, 내 동생이다. 잘 알지?”

"그래, 형. 알아. 애도 아니고 일일이 달래 주지 않아도돼.”

이도엘이 다시 입을 열려 했지만 다미언이 손을 내젓는 게 더 빨랐다.

“마테오한테나 가 봐. 저녁에 만난다고 약속했잖아.”

“저는 다 컸다 이 말이지. 이 형을 쫓아내다니.”

그러면서도 이도엘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네가 괜찮다니 다행이다.

쉬어라.”

* * *

이도엘이 떠난 뒤.

"저…….”

릴리엔이 멋쩍은 표정으로 커튼뒤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죄송해요. 제가 한 짓인데 괜히 혼나셨네요.”

“됐어, 사과하지 마. 덕분에 간만에 웃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사과하지 말라니까. 형이 걱정이 많아서 그래.”

소년이 귀찮다는 듯 손을 홰홰내저었다. 더 사과해 봤자 자존심을 건드릴 것 같아서 릴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네 얘기나 좀 해 봐.

어쩌다 미래에서 과거로 오게 된 거야?”

“그건 비밀입니다.”

다미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비밀?

“내가 믿게끔 설득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말한다고 해서 믿으실 것 같지도 않아서요.”

“허.”

사사건건 이렇게 말대꾸가 돌아오는 대화는 처음이었다. 다미언은 쿡쿡 찌르듯이 릴리에에게 말을 걸었다.

보다 다정하게도 할 수 있었지만 사춘기 소년에게는 그게 한계였다.

릴리엔은 착하게 화내지 않고, 하지만 지지도 않고 다미언의 말을 술술 받아쳤다. 다미언은 결국 입술을 비죽거렸다.

“미래의 내가 아주 잘해 주는 모양이네. 내가 이렇게 툴툴거려도 참는 걸 보면.”

“네, 맞아요.”

릴리엔은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다미언이 가늘게 눈을 뜨고 릴리 엔의 발그레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아주 잘해 주셨어요. 과분할 정도로요.”

왠지 모를 그리움이 담긴 릴리 엔의 목소리에 다미언은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나빠졌다.

저건 다미언의 이야기였지만 다 미언의 이야기가 아니기도 했다.

'뭐야…… 내가 여기 있는데 나를 그리워한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릴리엔의 이야기를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진 것도 사실이었다.

"됐어, 나 이제 피곤해. 잘래.”

소년의 목소리가 부루퉁해졌다.

릴리엔이 별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피곤하시다니 별일이네요. 전하께서…….”

“........”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다미언, 그를 잘 아는 게 분명 맞기는 맞는데……

다미언은 불편한 눈빛으로 릴리 엔을 바라보았다. '미래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저 사람은 과연 그를 어디까지 아는 걸까?

그가 괴물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문득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전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다미언이 이상했는지, 릴리엔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미언은 말없이 릴리에에게 다가갔다.

다미언의 그림자가 릴리엔을 덮었다. 다미언이 무표정한 얼굴로 릴리엔을 내려다보았다.

릴리엔은 순순히 눈을 깜빡이며,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경계심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만두자.'

괜히 겁을 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오늘 그를 위해 아버지를 골려 주었고, 덕분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았는가.

은혜를 원수로 갚지 말아야지.

평소에는 얼마든지 사악하게 구는 주제에, 다미언은 릴리에에게 이상하게 물러지는 자기 마음을 합리화했다.

다미언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 잘 건데,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같이 자면 안 될까요? 저 갈 곳 없는데.”

하지만 다미언과 잠을 자는 것 쯤은 아무것도 아닌 릴리엔을 이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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