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28화 (128/155)

128화.

'부부라더니, 과연…….’

학대와 학살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런 면에서는 아직 면역이 되어 있지 않은 다미언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릴리엔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미래의 그와 상당히 평범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는 게 여실히 전해져서…….

머쓱하고 낯이 간지러워졌다.

물론, 릴리엔의 담백한 어조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단순히 같은 자리에서 함께 잠든다는 것 이상의 뜻은 없는 게 분명했지만…….

“아, 물론 전하께서 침대를 쓰세요. 저는 여기 소파만 빌려주신다면 충분해요.”

……아니었다. 완전히 틀렸다.

같은 침대도 아니고 같은 공간만 염두에 두고 양해를 구한 거였다.

상대는 요만큼도 농락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농락을 당해 준 꼴이었다. 투명하고 깨끗한 릴리에의 눈빛을 마주한 십 대 소년은 간신히 아닌 척하며 속으로만 파르르 떨었다.

자존심상 절대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리엔의 표정이 해사해졌다.

“덕분에 살았네요.”

소탈하고 따지는 게 적기는 하지만 릴리엔은 귀족, 그것도 오라버니와 시외할아버지의 과보호 속에서 어화둥둥 자라 온 아가씨였다.

아무리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라고 해도, 아무 데서나 잠을 청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보는 낯선 존재에게 방 한쪽의 공간을 내준 다미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미언은 어려도 다미언이었고 고작 그 정도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비유하자면 이도엘이 도와 달라고 해서 필요하다면 아버지의 목이라도 딸 생각으로 냉큼 달려갔는데 물 한 잔만 따라 달라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미래의 내가 잘해 줬다면서. 지금의 나한테는 미래의 아내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침대를 양보해 주는 기본적인 예의조차도 기대하지 않는단 말이지?'

김이 팍 새다 못해 서운해진 다 미언은 잘 생각도 없으면서 침대안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물론 릴리엔은 다미언의 그런 속도 모르고 '어릴 때부터 침대에 들어갈 때 왼발부터 집어넣는 습관이 있으셨구나.' 하며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아.”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릴리에 이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왜?”

“이것 좀 빌릴게요.”

“.......”

릴리엔이 집어 든 건 베개 하나였다.

그쯤 되니 다미언은 어처구니가 없는 걸 넘어서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 물론 릴리엔은 사춘기 소년의 섬세한 심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소파 팔걸이에 베개를 놓고 남는 시트를 가져다 잠자리를 꾸렸다.

“전하, 불 꺼도 되나요?”

“……마음대로 하라니까!”

다미언이 시트를 푹 뒤집어썼다. 오랜만에 눈치 없는 면이 열심히 일하는 릴리엔은 ‘전하께서도 불빛이 싫으셨나 보다. 하고 조도를 낮췄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전하.”

“……왜.”

조금 늦게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혹시…….”

“……혹시 뭐.”

“제가 함께 미래로 가자고 한다면 따라와 주실 건가요?”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다미언은 의아했지만 릴리엔은 진심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다미언이 시트 속에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안 가. 아니, 못 가.”

“그러신가요.”

“그래.”

그가 가면 이도엘을, 사람 좋은 큰형을 누가 지킨단 말인가.

물론 이도엘에게는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과 신하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다미언의 성에 찰 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

게다가…….

저 여자, 릴리엔은 엄밀히 말해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미래 다미언의 아내였다.

'내 사람이 아니잖아.'

분명 저 여자에게는 지금의 다 미언보다 자기에게 그토록 잘해 준다는 미래의 다미언이 소중할 터였다.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험은 이도에 한 번만으로 족했다.

더 이상은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릴리엔의 목소리가 어딘지 시무룩하게 들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목소리에 어쩐지 가슴이 아린다고 생각하면서도 다 미언은 입을 꾹 다물고 스스로의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 * *

그 후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다미언은 절대 그 상태로 잠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예상과 다르게 그는 릴리엔보다도 더 빨리 잠들어 버렸다.

다미언은 몰랐겠지만 릴리엔의 존재감이 이 방 안을 분명하게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릴리 엔이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소년은 오랜만에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깊은 잠은 아니었다.

"흐…….”

아주 옅게 들려온 신음 소리.

열심히 잠자리를 꾸렸지만 여기와서 본 일들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상태는 아니었던 릴리에의 귀에 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다미언은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지만…….

'괴로워하고 계신 것 같은데…….’

조심스러운 추측에 대답하듯, 조금 더 큰 “끙” 하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척에 민감한 다미언이니 그 정도만 해도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미언은 좀 더 괴롭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이기까지 했다.

내버려 두기에는 걱정이 됐다.

하는 수 없이 릴리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척을 죽이고 침대로 다가갔다.

'이런, 세상에.’

다미언은 고운 미간을 찌푸린채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몸이 아픈 걸지도 모른다.

다미언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어졌다. 릴리엔은 땀에 젖은다미언의 이마에 황급히 손을 짚어 보았다.

'다행히 열은 없는…… 응?'

릴리엔은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찌푸려졌던 다미언의 미간이 즉각적으로 풀어진 것이다.

“하아…….”

다미언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치 먹자마자 효과를 발휘하는 강력한 마약 성 진통제를 복용한 사람 같았다.

그 얼굴 위로 막사에서 보았던 지금보다 더 자란 다미언의 얼굴이 겹쳐졌다.

"더…… 만져 줘.”

뜨거운 숨을 내쉬던, 취한 듯 몽롱하던 얼굴.

차례대로 그동안 보아 왔던 다 미언의 비슷한 표정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약을 드셔야 한다며 다가와 개박하에 취한 고양이처럼 릴리엔을 껴안던 표정 같은 것들이 처음으로 일련의 단서처럼 다가왔다.

이제까지는 다미언이 단순히 스킨십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만…….

'……혹시.’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손을 떼보았다. 다미언의 입술에서 칭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서서히 다시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릴리엔은 그제야 어렴풋하게 감이 잡혔다.

다미언은 몸의 형태가 변형되는 증상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경원시되며 자라 왔다.

하지만 그 눈에 보이는 증상만이 다가 아니라면?

혹시 다미언이 뭔가 고통을 겪고 있고, 릴리엔과의 스킨십이 그 고통을 달래는 수단이 되는 건 아닐까?

비약에 가까운 추측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추측은 릴리엔이 이제까지 다미언과 겪어온 수많은 일들을 해명해 주고 있었다.

다미언이 첫 만남에 그렇게 급박하게 청혼을 한 것부터 시작해서, 정작 마력을 공급받아야 하는 릴리엔보다 더 릴리엔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굴었던 일까지.

여태까지 침묵하던 자그레브가 릴리에의 추측에 쐐기를 박았다.

-드디어 정답에 도달했군. 축하해.

‘그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일단네 남편을 도와주는 게 시급하지 않겠어?

'아.'

그건 사실이었다. 릴리엔은 괴로워하면서도 깨어나지 못하는 다미언을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면 참 좋아할……. 잠깐, 야?

자그레브의 충고는 들은 척 만척하고, 릴리엔은 다미언이 누워 있는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그리고 다미언의 옆에 약간 거리를 두고 몸을 뉘고 팔만 뻗어 다미언의 손 안에 살그머니 자기 손을 끼워 넣었다.

다미언의 손이 기다렸다는 듯 릴리엔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마치 반사적으로 손을 움켜쥐는 아이 같았다.

-그……. 저기, 그렇게 손만 잡고 자려고 그런 거였어?

당연한 사실을 물어보는 자그레브에게 릴리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밤새도록, 혹여 중간에 릴리엔이 깜빡 잠들더라도 접촉을 이어 나가려면 이 방법이 가장 좋았다.

-으응…… 그래………. 뭐, 그렇겠지.

자그레브가 떨떠름하게 수긍하고 침묵하기 시작했다.

릴리엔은 눈앞에서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잠든 다미언을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에 깊이 배었던 고통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어째서 다미언이 아픈지, 왜 자신과 닿으면 괜찮아지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다행이었다.

‘최대한 빨리 데리고 여길 나가야겠어.'

이곳 다미언의 고통을 달래 주고 있자니 이상하게 원래 다미언이 보고 싶어졌다.

여태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데에 배신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릴리엔이 눈앞에서 낱낱이 본 다미언의 고통이 너무 깊었다.

기억을 달래 주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실제의 다미언을 만나서 안아 주고 싶었다.

다미언이 먼저 말할 때까지 알은체를 할 생각은 없었다. 겁먹고 움츠러들어 있는 다미언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듬뿍 사랑해 주고, 믿음을 주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그런 숭고한 목적 보다도…….

"…보고 싶어.”

릴리엔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다미언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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