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29화 (129/155)

129화.

* * *

릴리엔은 다미언의 손을 잠결에 놓치지 않도록 품으로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몇 시간 정도 더 시간이 흘러 다미언이 마침내 눈을 떴다.

'음.….'

전에 없이 상쾌하고, 몸이 가뿐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좋은 컨디션이었다. 게다가 포근하고 부드러운 것이 주변을 기분 좋게 둘러싸고 있었다. 딱 좋은 정도로 압박감이 전해졌다.

포대기에 꽁꽁 싸여 안정감을 느끼는 아기처럼 다미언은 기분좋은 한숨을 쉬었다. 자면서 악몽을 꾸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아니 잠깐, 내가 잠을 잤다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하고 깜짝 놀란 다미언은 퍼뜩 눈을 떴다. 그리고…….

“...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음…….”

미래의 아내가 그를 껴안고 있었다.

다미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소파에서 잔다더니!

그거면 충분하다면서!

'대체 어느 틈에 침대에 오, 올라와서, 그것도 사람을 이렇게 껴안고….’

포근하고 잘 말린 햇볕 냄새가 솔솔 풍겨 오는 품 안에서 다미언은 머리끝까지 붉어진 채로 바르르 떨었다.

이도엘처럼 말간 얼굴을 하고 세상 깨끗하게 굴더니……. 이렇게 발칙한 사람이었나.

"으음…… 전하?”

그때, 기척을 느낀 건지 릴리엔이 눈을 떴다. 다미언은 흠칫 놀랐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이, 이건, 그러니까 네가.”

“좀 더 주무세요…….”

하아암. 릴리엔이 말끝에 하품을 하며 도로 눈을 감았다.

'……이게 끝?'

이 정도 일은 미래의 아내에게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나하고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보이는데, 대체 미래의 나는 어떤 놈이길래 아내와 이렇게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는 사이가 된단 말인가?

……갑자기 울컥 기분이 나빠졌다.

“……이거 놔. 난 네 남편이 아니야.”

다미언은 스스로 릴리엔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랬었죠. 죄송해요.”

릴리엔은 순순히 그에게서 떨어져 주었다. 그 순간 다미언은 실수했다는 걸 직감했다.

'어?’

릴리엔의 손이 떨어졌을 뿐인데, 갑자기 까마득한 절벽에서 밀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만 잡고 자려고 했는데……죄송해요, 전하.”

릴리엔이 하는 사과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삐이익 하는 이명이 귀를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고통이 차근차근 몸을 잠식했다.

‘이건…… 설마..'

미래의 아내와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던 건가?

"너.”

“네, 전하.”

“이리 와서 내 손을 잡아 봐.”

"네."

릴리에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미언의 손을 잡았다.

거짓말처럼 이명이 잦아들었다.

발끝과 손끝에서 느껴지던 작열감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

오싹 소름이 돋고 황홀해졌다.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먼저 릴리엔을 밀쳐 낸 전력이 있어 더 만져 달라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 잠깐 망설였다.

그때 다미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릴리에이 다가와 그를 끌어 안았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차가운 밤에 모닥불이 켜진 잘 마른 은신처를 발견한 것 같았다. 다미언은 울고 싶어지는 걸 참고 릴리엔에게 매달렸다.

“정답인가 보네요.”

릴리에이 가볍게 웃으며 폭삭자기에게 안긴 다미언을 토닥였다.

더 만져 달라고 요청하지 않아도, 눈치를 보며 머리를 쓰지 않아도 다정한 손길이 쏟아졌다.

다정할 뿐 아니라 그 손길 한 번에 얼음처럼 박혀 있던 오래된 고통이 절절 녹아내렸다. 아픈 줄도 몰랐던 흉터까지 아무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떨어지지 말고 조금만 더…….’

조바심이 났지만 다행히 릴리엔은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천천히, 계속해서, 일정한 박자로 다 미언을 쓰다듬고 도닥였다.

다미언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황홀경 속에서 끙끙거리며 녹아들었다.

밤새 릴리엔과 붙어 있던 탓인지, 진정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했다는 걸 들키면 릴리엔이 물러날까 봐, 다미언은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았다.

계속 만져 주면 좋겠어.

죽을 만큼 좋아.

하지만 이런 나를 귀찮다고 여기지 않을까?

다미언은 조마조마하게 눈치를 보았다. 이도엘이 살아 있고, 마테오가 그런 이도엘의 1순위인 이 시점은 다미언의 평생 중 자존감이 가장 바닥을 치는 시기였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래의 아내는 착하게 웃으며 물었다.

“진정이 좀 되셨어요?”

다미언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릴리엔은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라고 대답하면서도 도닥이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다미언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다시 겨우 입을 열었다.

“나 이제 괜찮은데…….”

“제가 좋아서 그래요.”

“......."

좋다고?

대체 뭐가?

좋다는 말도 얼른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미언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릴리엔은 내색하지 않고 덧붙였다.

“제가 전하를 많이 좋아해요.”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미래의 내가 싫어할지도 몰라.”

“다르지 않아요. 제게는 다 같은 전하이신데요.”

다미언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부터가 이런 아내를 얻게 되는 미래의 자신을 향한 질투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미래의 자신도 과거의 그가 아내를 독차지하고 귀여움을 받는 걸 달갑게 여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릴리에이 그를 다 같은다미언으로 여겨 준다면.

지금의 그도 남편으로 생각해 준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려도 다미언은 다미언. 자존감이 낮아도 잔머리를 굴리는 법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미언은 릴리엔의 어깨에 푹하고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나, 내가 왜 너를 만나자마자 청혼했는지 알 것 같아.”

“......."

다미언의 교활함을 어느 정도 학습한 릴리엔은 다미언이 지금 애교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간파했다.

'평소처럼 애교를 부리고 계신다면…….’

지금이 적시일지도 모른다.

“전하.”

“응?”

“다시 묻는 걸 용서해 주세요.

저와 함께 가 주시면 안 될까요?”

릴리엔의 물음에 다미언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도엘을 두고는 떠날 수 없다.

‘하지만..'

형에게도 가족이 있다. 그가 들어갈 수 없는 단단한 울타리가 있었다. 자신은 이도에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건 미래에서도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저는 전하를 사랑해요.”

마치 다미언의 마음속을 읽은 것처럼, 릴리엔이 말했다.

“저랑 같이 가 주세요.”

사실 릴리엔은 '여기 더 있지 말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네?”

"....."

다미언은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릴리엔을 따라간다는 게 사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릴리엔의 손길, 목소리 하나하나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행복하게 해 드리겠다니.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심보다도 먼저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좋아. 알았으니까…… 나를 버리지만 않는다고 약속해."

“맹세할게요.”

릴리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미언은 모르겠지만 세 번째로 같은 약속을 하고 있는 거였다.

약속에 약속을 더하고 약속을 맺어 맹세가 되었다.

“전하의 평생은 전부 제 것이에요. 이 릴리에 이슬라르의 이름을 걸고, 결코 버리지도 잃어버리지도 않겠습니다.”

* * *

“축하해, 다 끝났어.”

"아."

정신을 차려 보니 릴리엔은 다시 자그레브의 실체 앞에 서 있었다.

“전하는…….”

하지만 그녀 주변을 빙빙 맴돌던 빛 덩어리, 다미언의 영혼 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치마가 불쑥 당겨지는 느낌에 릴리에이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맨 처음 꿈에서 만났던 어린 다미언이 있었다.

“음…… 보면 알겠지만 걔가 네 남편 영혼의 조각이야.”

자그레브의 목소리가 머쓱한 게 심상찮았다.

릴리엔은 일단 내색하지 않고 무릎을 꿇어 어린 다미언에게 팔을 벌렸다. 어린 다미언이 답삭릴리엔의 품에 안겨 들었다.

자그레브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릴리엔은 현실과 달리 아이를 안아 올릴 수 있었다. 릴리에이 물었다.

“뭔가 말 못하는 게 있다면 얼른 털어 놓으세요.”

"으…… 그러니까.”

자그레브의 말에 따르자면 다미언의 영혼 조각이 릴리엔을 따라 가기로 마음먹은 건 맞다고 했다.

“그런데 각각의 기억 속에서 지내고 너를 만나면서…… 본체의 부속물이라는 자각이 상당히 흐려져 버렸지 뭐야?”

“그 말인즉?”

릴리엔은 화가 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이 차분하게 되묻기만 할 뿐이었지만 자그레브는 굉장히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게 그래서…….그러니까"

“말씀하세요.”

“걔가 순순히 본체에게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돌아가지 않는다면요?”

“네 남편의 마력이 막강하니까 아마 그 상태 그대로 실체화돼서……. 너랑 지내려고 하지 않을까?”

“그, 그렇게 쳐다보지 마! 이건 내 탓이 아니라니까! 네 남편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서 벌어진 일인 걸 어떻게 해?”

“애초에 당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요.”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야?”

“치유하는 거울이라면서 치유에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되고 계시잖습니까.”

“그, 그건…….”

“사람 영혼을 이 지경으로 쪼개놓고, 다시 돌려보내지도 못한다는데 제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나요?”

차근차근한 릴리에의 지적에 자그레브는 반박의 의지를 죄다 잃어버리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가 다 몹쓸 놈입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상당히 희극적인 모양새였으나 릴리엔은 이 정도로 넘어가 줄생각이 없었다.

“알기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성 말고 실제적인 해결책을 쥐어짜 보란 말이었다.

그때 릴리에에게 안겨 있던 어린 다미언이 고개를 들었다.

“전하?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부르튼 입술을 오물거리며 서너살 다미언이 물었다.

·내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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