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예?"
다미언의 뒤쪽에서 자그레브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여기서 실수하면 또 도망갈지도 몰라! 대답 잘 해!'
·과연.
릴리엔은 침착하게 다미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전하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럼 나, 따라가도 되는거지?”
음 그러니까…… 이 상태로 말이지. 릴리엔은 난감했지만 자그레브가 필사적으로 '알았다고 대답해!'라며 재촉했다.
아이 다미언에게 거절의 말을 할 자신도 없었던 터라, 릴리엔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안심한 건지, 아이 다미언이 릴리에의 목을 끌어안으며 포옥 안겼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래보여도 원래는 하나의 영혼이었으니까. 아마 시간이 흐르면 복원력이 작용할 거야.”
그러니까 아마도?"
“아마도, 라는 말씀이시지요.”
"너 그렇게 말할 때마다 욕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거 아냐?”
“조금은 압니다.”
자그레브가 한숨을 쉬었다.
“뭐, 그 계산적인 꼬맹이에게 원래 몸으로 돌아가야 이득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 진행이 좀 빠를 수도 있어.”
영악한 놈이니까 잘 설득해 보라며 자그레브가 말했다. 릴리에은 빈정거렸다.
"그렇습니까. 참 도움이 되겠네요.”
"아, 네가 그러면 진짜 좀 무서 우니까 그만 좀 비꽈!”
자그레브가 투덜거리면서 부르르 떨었다.
“어쨌든 나를 도와줬으니까 약속했던 선물을 줄게. 선물 받고 기분 풀라고.”
선물이라. 저 하는 일마다 돌발사태가 발생하는 거울이 준다는 선물이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저기, 내 공간 안에 있으면 네 생각이 약간은 들리거든? 생각 좀 조심해서 해 줄래?”
자그레브는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 나타났다.
푸른색에서 은빛으로, 은빛에서 엷은 보라색으로, 은은하게 반짝이며 8자를 그리는 아름다운 피였다.
하지만 갖가지 색이 뒤섞이는 부분이 굉장히 불안정하게 보였다. 움직임 역시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이건 뭔가요?”
"네 영혼이야.”
“……네?”
"아, 정확히 말하자면 네 영혼의 상태를 보여 주는 거라고 해야 하나?”
자그레브가 대수롭지 않은 듯 중얼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띠가 릴리에의 바로 앞까지 둥둥 날아왔다.
어느새 릴리에에게 안겨 있던 다미언도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이는 릴리에의 영혼 고리가 내뿜는 빛에 매료된 것처럼 가만히 그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상태가 정상은 아니야. 어떻게 보면 네 남편보다도 상태가 심각해.”
"제가요?”
아니, 그보다 ‘다미언보다 심각한 상태’라면 다미언의 영혼에도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마력, 영혼, 생명. 이 모든 것은 사람마다 각자의 분량대로 적절한 조화를 이루게 마련.”
자그레브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며 다른 고리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릴리엔의 것과 달리 한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불안정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네 남편은 남들보다 마력이 월등하게 많아. 그게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는 거지. 아마 평생을 고통에 시달려 왔을 거야.”
"어째서 그 고통이 저와 접촉할 때면 해결되는 거죠?”
“너희 둘은 둘 다 문제가 있는데 상호 보완적으로 어느 정도 해결을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마 서로 만나자마자 모종의 링크가 생겨 버린 게 아닐까? 일단 내 추측은 그래.”
자그레브가 딱 손가락을 튕기자, 릴리에의 띠 옆에 보랏빛의 띠가 하나 더 생겨났다. 이 역시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릴리엔은 이게 다미언의 영혼을 상징하는 형태임을 직감했다.
자그레브가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겼다. 그러자 두 띠가 서로 얽혔다. 사슬처럼 연결되자 두 띠는 아까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얽혀 움직이는 모습이 공전하는 지구와 달의 궤적 같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코어는 육신의 심장이며 영혼의 심장이야. 너는 코어가 깨져 다른 기억이 흘러넘치고 말았어.
아마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이제는 상당히 경계가 뒤섞여 희미해졌겠지만…….”
“짚이는 게 있을 텐데?”
자그레브의 말에 릴리엔은 혼란스럽게 뒤섞인 기억의 원류를 하나씩 떠올리며 띄엄띄엄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릴리엔의 설명을 듣던 자그레브가 답했다.
“코어의 손상으로 너는 전생의 기억과 미래의 기억을 동시에 갖게 되었어. 하지만 네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뇌가 암시를 건 거야.”
'전생에 책에서 보았다'고.
자그레브가 자기 머리를 톡톡두드리며 설명했다.
“마치 두 눈으로 본 상을 하나로 인식하도록 조정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
“좀 감상적으로 말해보자면 그래, 너희 둘은 운명 같아.”
자그레브가 중얼거렸다.
“누군가 아주 절실하게 이 세상을 구하고 싶었거나, 아니면 네 남편을 구하고 싶었거나……. 어쨌든 이 이상은 나도 모르겠어.”
“중요한 건 너희 둘을 내가 치료할 수 있다는 거지. 안 그래?”
처음으로 ‘치유하는 거울답게 행동하고 있는 자그레브였다.
“네가 네 남편을 구하러 기억속을 헤매고 다니면서 너희 둘의 영혼을 연결하는 링크가 공고해졌어. 나는 거기에 한 가지 축복을 더해 주지.”
“축복이라면."
“네 코어의 손상된 부분과 네 남편의 불안정한 부분을 서로 단단히 연결시켜 놓았어. 아마 몸상태도 지금보다는 좀 나아질 거야. 더 큰 이점은 이렇게 해 놓으면 너는 네 남편이 부서지지 않는 한 죽지는 않는다는 거고.
“반대로 네가 부서지지 않아야 네 남편도 죽지 않겠지.”
“그 말은……"
“그래. 너희 둘은 한 날 한 시에 죽게 될 거야. 생각보다 좋은 선물이지?”
자그레브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릴리엔은 약간 멍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는 이 치유하는 자그레브 님을 존경하면서 살라고, 네 남편한테도 말 좀 잘해 주고, 난 부서지고 싶진 않단 말이야.”
“......."
“아, 물론 다시 만나는 건 사절이야. 너희같이 골치 아픈 한 쌍이랑 또 엮이고 싶진 않거든.”
자그레브의 빈정거리는 소리가 점점 동굴 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현기증을 느낄 때 시야가 이지러지듯 공간이 이지러졌다. 자그레브의 말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귓가를 웅웅 울렸다.
“잘 가라. 영원히 작별이다.”
* * *
릴리엔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대공비 전하!”
“비전하께서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전 하! 전하! 비전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전하!”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릴리엔은 주변 상황을 파악해 보려고 애썼다.
"여긴…….”
“비전하, 무리하지 마십시오.”
리타가 말렸지만 릴리엔은 꿋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거실이었다. 릴리엔은 자그레브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그 응접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바로 옆에 자그레브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리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쿵하는 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어보니 비전하께서 쓰러져 계셨습니다.”
“내가 쓰러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지?”
“십여 분도 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비!”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한 손에 칼을 쥔 다미언이었다.
“전하.”
"맙소사.”
다미언이 칼도 던져 버리고 성큼 다가와 릴리엔을 덥석 껴안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십여 분이라고 하지만 릴리엔에게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다미언이었다.
다미언, 그녀의 다미언이었다.
그녀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다미언 루펜바인.
릴리엔은 안도감에 자기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어린 다 미언을 만나고 설득하는 동안 그녀 역시 전혀 긴장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놀란 다미언을 차분하게 달래고, 아랫사람 앞에서 부부간의 애정 어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수습을 시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릴리엔은 그녀의 다미언을 마주안아 주었다.
“전하,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잠시 의식을 잃었을 뿐입니다.”
"정말인가요?”
“예.”
다미언은 살짝 릴리에에게서 몸을 뗐다. 예민한 남자는 아무래도 릴리에의 반응이 평소 같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릴리엔의 눈빛에 왠지 평소에는 없었던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가 무엇이든, 무슨 짓을 하든 지금의 릴리엔은 다 받아줄 것만 같았다.
그가 다미언이라는 이유만으로.
"에그머니 나!”
모린 부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다미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저, 저, 저 문이 갑자기 스스로……!”
과연, 자그레브의 문이 빼꼼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의 작은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세상에!”
엘런과 모린 부인이 일제히 탄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린 문사이로 등장한 것은…….
"전하?”
백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아직 아이인데다가 형편없는 꼴을 하고 있음에도 미모가 엿보이는 고운 얼굴.
어린 다미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