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31화 (131/155)

131화.

“맙소사….”

아이반이 경악했다. 다미언의 영혼 조각이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 알고 있었던 릴리에도 조금이지만 놀랐다.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다미 언뿐이었다.

열린 문 사이를 완전히 빠져나온 아이가 릴리엔을 발견하고 다가오려 했다.

“물러서라.”

다미언은 내팽개친 칼을 잡고 릴리엔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안 됩니다, 전하!”

릴리에이 다급히 그를 말리고 아이를 향해 팔을 벌렸다.

아이가 한걸음, 한걸음 릴리엔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미언은 꽈악 칼자루를 움켜쥐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순순히 릴리에에게 안겼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마치 릴리 엔이 지독할 정도로 아빠를 닮은 아들을 낳은 것 같았다.

'뭐지?'

다미언은 불쾌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무슨 일인지 설명을 들어야겠군요.”

“이 아이는 그러니까…….”

사정을 설명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니까 저게 당신의 꿈 에 나타났던 제 영혼의 조각이란 말씀이십니까.”

소파에 앉은 릴리엔은 말없이 품에 안겨 드는 어린 다미언을 더 단단히 안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일단 그 망할 거울이 비의 병을 고쳐 주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다행입니다만…….”

생전 처음 겪어 보는 난장판에 다미언도 머리를 짚고 말았다.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능한 겁니까?”

다미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도 자그레브를 한 번 겪어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급하게 불려온 마법사, 필리 경이 어린 다미언을 면밀히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전하의 회복에 관해서는 시간을 두고 철저히 검사해 보아야겠습니다. 다만 저분에 대해서는 제가 감지하기로는 전하와 완전히 동일인이 십니다. 게다가 고대 병기로 알려진 자그레브가 사실 치유하는 거울이었다니…….”

이런 식으로 마법사의 확진까지 내려졌지만 다미언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저 어린 것이 나라고?'

릴리에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와 똑같은 보라색 눈동자로 다미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휙 하고 고개를 돌려 릴리엔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세상에, 겁을 먹으셨나봐요.”

모린 부인이 가엾다는 듯 중얼거렸다. 릴리엔이 품에 파고드는 아이를 다독이며 타일렀다.

“전하. 아이가 겁을 먹지 않습니까.”

“비, 그건……."

다미언은 골치가 아팠다. 아무리 어려도 그는 그였다. 다미언은 어린 자신이 겁을 먹지 않았다는 데 전 재산도 걸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방에서 오로지 본인인 다미언만 그 사실을 눈치챘다.

는 거였다.

"괜찮습니다, 전하. 아무도 전하를 해치지 않아요.”

아이는 달래 주는 릴리엔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몸짓은 겁먹은 척하고 있었지만 보랏빛 눈동자는 아주 평온했다.

다미언은 내심 이를 갈았다.

'저 영악한…….'

스스로의 영악함을 타인의 입장에서 체험하는 진귀한 경험인 셈이었으나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혈압이 올랐다. 왜 부황이 그가 무슨 말만 하면 뒷목을 잡으려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다미언을 제외한 다른 측근들은 영혼의 조각이 제 자리를 찾아갈 때까지 어린 전하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릴리엔의 말에 납득했다.

“어쨌든 전하의 일부이시니, 잠시 동안 모실 분이 한 분 더 생긴 셈이군요.”

“그나저나 어린 전하께서도 비전하를 저리 따르시니 다행입니다.”

특히 다미언의 과거를 아는 모린 부인이나 엘런 총관은 이런 식으로나마 어린 다미언을 보살필 기회가 온 게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다미언, 장본인에게만은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다미언은 으득 이를 악물었다. 그때 어린 그가 릴리에의 품에서 빼꼼 고개를 들더니…….

“........!”

아무도 모르게 그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저게…….’

다미언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어린 다미언이 릴리에의 품에 고개를 푹 묻었다.

"어머, 갑자기 왜 그러세요….전하?”

뒷말은 어른 다미언을 부른 것이었다.

릴리엔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다미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까보다 좀 더 뾰족한 어투로 어른 쪽을 나무랐다.

“전하, 무서운 표정을 하지 마시라니까요.”

“비!”

다미언은 억울해 미치고 팔짝뛰고 환장할 지경이었으나 아무도 그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아이반이 슬쩍 눈치를 보다 물었다.

“혹시 전하… 자기 자신마저 질투하시는 건 아니죠?"

설마라니? 다미언은 불쾌해졌다. 질투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자리에서 곧이곧대로 그렇다고 대답할 순 없었다. 아무리 부끄러운 줄 모르는 다미언이라지만 자기 자신을 질투하는 게 답이 없는 짓이라는 건 알았다.

답이 없어도 질투가 나는데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그가 인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릴리엔이었다.

설마 아니시죠? 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릴리에.

“아니…….당연히 아닙니다."

다미언이 이를 악물고 부정했다. 그 말투에서 릴리엔을 제외한 사람들은 직감했다.

‘질투하고 계시는구먼….…'

'자기 자신인데 질투하고 계셔…….’

이리 한심할 데가!

릴리에만 아무것도 모르고 평화롭게 어린 다미언을 겁먹지 말라며 어를 뿐이었다.

* * *

다음 날. 다미언과 릴리엔은 자그레브를 황실로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황제 폐하께서 추궁하시면 어떻게 할까요?”

릴리엔의 상식적인 염려에 다미언은 빙긋 웃으며 심플하게 답했다.

"배 째라고 하면 됩니다.”

릴리엔과 연관된 일만 아니면 세상 두려울 게 없는 다미언이었다.

그렇게 자그레브는 대공저의 보물고 가장 깊숙한 곳에 봉인되었다.

릴리엔은 오랜만에 평온을 되찾은 자그레브가 기뻐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 자기 내부 세상을 휴양지처럼 꾸며 놓고 즐기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는 릴리엔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 전하. 죄송합니다.”

어린 다미언이 보랏빛 눈동자로 물끄러미 릴리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실체를 얻은 다미언의 조각은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간혹 릴리에에게만 단답형으로 대답을 해 준 일이 아니었다면 실어증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전하께서는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으니까요.”

어쨌든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고 조용한 어린 아이는 사람들의 동정을 사기 쉬웠다.

“그 당시에는 저와 모린 부인도 그렇고 누구 하나 제대로 전하를 돌봐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총관과 부인은 죄책감을 느끼며 어린 다미언에게 잘하려고 애쓰는 눈치였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어린 다미언이 알에서 막 깨어난 새끼 오리처럼 릴리에 만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린 다미언은 편의상 어린 다미언일 뿐, 실제로는 영혼의 조각이 마력의 힘으로 잠시 실체화했을 뿐이다. 하지만 릴리 엔은 이 다미언이 실제 다미 언과 비슷한 증상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그래서 유독 나를 따르시는 게 아닐까.' 일단은 본인이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추측에 불과할 뿐이었다.

릴리엔은 일단 무표정한 아이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치맛자락을 잘 갈무리하며 그 앞에 무릎을 굽혔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다정한 타이름에도 어린 다미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어린 다미언은 말 대신 릴리엔의 목을 껴안을 뿐이었다.

릴리엔은 아이를 밀어내는 대신 잠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자그레브를 통해 각기 다른 시기의 다미언을 보았지만, 가장 무력했던 어린 다미언이 릴리엔의 마음에도 깊이 남았다.

릴리엔은 우선 아이를 조금 떼어 놓았다.

"?”

어린 다미언은 머뭇거리면서도 자신을 밀어내는 릴리엔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릴리엔은 아쉽게 떨어진 어린 다미언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처음 나타났을 때의 가슴 아플 정도로 볼품없는 몰골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여전히 몸은 마르고 작았으며, 입술은 거칠었고 혈색도 좋지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덥수룩한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 깨끗하게 씻긴 뒤 좋은 옷을 입혀 놓으니 훨씬 보기 좋았다.

옷을 갈아입힌 뒤로 어린 다미언은 자꾸 소매를 매만지곤 했다. 좋은 옷이 어색한 모양이라고, 릴리엔은 안타깝게 추측했다.

다미언의 상처는 아직 낫지 않았다. 원래의 회복력을 되찾으려면 영혼이 복원되어야 했다.

자그레브의 충고에 따르자면 영혼이 복원 되려면 분리된 조각이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여겨야 했다. 하지만 그런 합리적인 이유가 없더라도 릴리엔은 이 어린 다미언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딱 한번만이라도..'

한 번이라도 이맘때의 다미언에게 따뜻하게 보살핌을 받은 기억, 사랑받은 경험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릴리엔은 낙천적인 표정으로 씩웃었다. 그리고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전하. 오늘은 우리 둘이서 아주 즐겁게 지내도록 할까요?”

어린 다미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도는 홍조를 감추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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