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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132화 (132/155)

132화.

* * *

어린 다미언을 데리고 릴리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는 거였다.

열두 살 때 죽어 가던 세드릭을 살린 이후 릴리에의 첫 번째 지론은 ‘사람은 주기적으로 햇볕을 쬐어 줘야 한다.'는 거였다.

“자, 전하. 이쪽으로 오세요.”

릴리엔은 어린 다미언을 정원한쪽에 마련된 작은 피크닉 장소로 데려갔다.

햇볕과 그늘이 적절하게 조화된 곳에 돗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릴리엔은 일부러 경치가 아름다운 탁 트인 곳 대신 비밀스럽게 숨겨진 장소를 골랐다. 학대받은 아이인 다미언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

과연, 그런 섬세한 배려가 통했는지 다미언의 말없는 얼굴이 밝아졌다.

릴리에이 다정하게 물었다.

“마음에 드세요?”

어린 다미언이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엔은 뿌듯해졌다.

“이리 오세요.”

먼저 돗자리에 앉은 릴리엔이 옆자리를 두드리자 어린 다미언도 그 옆에 앉았다. 릴리엔은 후 후 웃으면서 짠, 하고 바구니를 열었다.

"!”

쿠키나 마카롱을 비롯한 과자와 보기만 해도 달아 보이는 케이크가 잔뜩 들어 있었다.

"꺼내 볼까요, 전하?”

어린 다미언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자, 전하께서 먼저 가장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보시겠어요?”

릴리엔의 권유에 어린 다미언은 바구니를 신중하게 들여다보더니, 곧 새하얀 크림에 딸기가 앙증맞게 올라간 케이크 하나를 골라 조심스럽게 꺼냈다.

“네, 그럼 이번엔 제가.”

두 사람은 그렇게 사이좋게 하나씩 간식거리를 꺼내 늘어놓았다.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다 미언은 눈빛을 반짝이면서도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

아무래도 자기 몫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모양이었다. 릴리엔은 포크를 들어 다미언이 가장 먼저 꺼낸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푹찔렀다.

“전하, '아’하세요.”

망설이던 다미언이 아앙 하고 입술을 벌렸다. 아기 새처럼 귀여웠다. 릴리엔이 쏙 하고 그 입에 케이크를 넣어 주었다.

“맛있죠?”

눈이 동그랗게 변한 다미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뭘로 드릴까요? 골라보세요.”

수많은 디저트를 늘어놓고 마음내키는 대로 한 입씩 먹어 볼 수 있다.

게다가 따뜻하게 자신을 살펴주는 다정한 보호자, 릴리에까지.

다미언으로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대접이었다.

릴리엔은 어색해하는 아이를 재촉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곧 어린 다미언이 우물쭈물하면서도 다음 간식으로 마카롱을 골랐고, 릴리엔은 두말없이 다미언에게 마카롱을 먹여 주었다.

“맛있으세요, 전하?”

레몬 마카롱을 맛본 다미언의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해졌다. 그제야 다미언은 조금 아이처럼 보였다.

릴리엔은 다정하게 다미언의 입술 옆에 붙은 부스러기를 떼 주며 물었다.

“자, 다음에는 무엇을 드릴까요?”

두 사람은 그렇게 얼마간 각종 디저트를 섭렵했다.

즐거운 시간이 이어질수록, 다 미언의 얼굴에 살이 오르고 윤기가 도는 게 확연히 보였다.

입술과 뺨에도 혈색이 돌더니 잠시 후, 다미언은 완전히 건강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됐다.

아무래도 사람이 아닌지라 다정한 돌봄을 받은 게 겉모습에 즉각 반영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릴리엔은 변화를 눈치챘다는 걸 내색하지 않고 매끄럽게 윤기가 도는 다미언의 정수리에 쪽 입을 맞춰 주었다.

다미언이 릴리엔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조금씩 웃음기를 비치기 시작했지만 갑자기 이런 다정한 스킨십에는 역시 놀란 모양이었다.

이윽고 어린 다미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한테 닿는 거 싫지 않아?”

“네, 싫지 않아요.”

릴리엔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미언은 반신반의하는지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릴리엔은 욱신거리는 마음의 통증을 숨기고 웃었다.

“싫을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나 귀여우신데.”

"......"

홍조 띤 얼굴을 하고 다미언이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귀여웠다. 뻔뻔한 어른 다미언에게서 볼 수 없는 면모가 신선하기까지 했다.

어린 다미언이 포크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딸기 생크림 케이 크의 딸기를 쿡 찍었다. 릴리엔은 다미언이 부끄러운 나머지 딴청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기.”

“네?”

딸기를 찍은 포크는 릴리엔의 입술로 다가왔다.

“전하…….”

“줄래. 주고 싶어.”

“저를요?”

다미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 줄 거야?”

망설이 묻는 말에 릴리엔의 입가에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미소가 번졌다.

"네, 정말 기뻐요.”

릴리에이 딸기를 받아먹었다.

어린 다미언은 무표정 하지만 뿌듯한 기색이 깃든 얼굴로 딸기를 먹는 릴리엔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치고는 어딘지 집요한 시선이었지만 릴리엔은 눈치채지 못했다.

* * *

그리고 마침내 다미언이 귀가했을 때.

“비……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나요?”

“예?”

대공비의 침대 위에는 다미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함께 있었다.

릴리엔과 그 자신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림책을 넘기며 릴리엔이 의아하게 다미언을 돌아보았다.

“전하께 잠들기 전에 그림책을 읽어 드리고 있습니다만…….”

"그거라면 이미 잠들어 있습니다만.”

“어머, 그러게요. 언제 잠이 드셨지.”

어린 다미언은 침대 위에 앉은 릴리엔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무릎 사이에 자리를 잡은 채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 평화로운 모습을 보자니 다 미언은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느낌이었다. 보아하니 저 영악한 게 그가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릴리에의 시간을 몽땅 차지한 게 분명해 보였다.

사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미언은 초조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괴물이란 사실을 아직 들키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어린 자신에게 그런 고차원적인 자제력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들킬 수도 있어, 비에게…….

다미언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애가 있는 다른 사람이라면 어린 자신을 나서서 더 사랑해 줬을 수도 있지만 다미언에게는 자기애와 자존감이 치명적일 정도로 부족했다.

그러므로 그가 실체로 나타난 어린 자신에게 느끼는 건 불쾌감과 혐오감뿐이었다.

오점.

그 오점이 릴리엔에게 본성을 들키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서 견딜 수 없기도 했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저놈의 영혼 조각인지와 하나가 되어야겠는데, 문제는 방법을 모르겠다.

는 거였다.

"…오늘 밤은 혹시 여기서 주무실 건가요?”

다미언의 부루퉁한 질문에 릴리 엔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릴리엔은 곤히 잠든 어린 다미언을 품에서 떼어 눕힌 다음, 이불을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다미언의 굳어진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전하의 옆자리인걸요.”

그건 다행이로군요.”

“사실 두 분 다 제게 전하시지만 낮에는 어린 전하와 계속 같이 있어 드렸으니까요.”

릴리엔은 어른 다미언에게도 자신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제 침실을 양보했으니, 오늘은 오랜만에 전하의 침실에 가 봐야겠네요. 그렇죠?”

“……전 가끔 비께서 알고 이러시는 건지 모르고 이러시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툴툴거리면서도 다미언은 믿었다. 사심이 있는 건 자신뿐이고 릴리엔은 그저 정말로 침실을 내줬으니 다른 방으로 이동하자는 뜻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다미언에게 릴리엔이 “흐음.” 하고 웃었다.

“……어떤 것 같으세요?"

릴리에 이슬라르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다미언은 덜컥얼어붙었다.

곧이어 릴리에이 평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처럼 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웃기지는 않으셨나 모르겠…… 전하? 왜 표정이 그렇게 무섭게 …….”

“……비, 이리로.”

딱딱하게 굳은 음성이었다. 다 미언은 무작정 릴리엔을 잡아끌었다.

“전하?”

의아한 얼굴로 휘청 딸려 오는 아내의 걸음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다미언이 혀를 차며 릴리에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앗.”

“실례하겠습니다.”

다미언은 어쩐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릴리엔을 안은 채 성큼성큼 자기 침실로 향했다.

대공의 침실은 섬세하게 꾸며진 대공비의 침실과 비슷하면서도 보다 장중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릴리엔에게 내부 장식의 미묘한 차이를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전하!”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다미언이 달콤하게 한숨을 내쉬며 릴리엔의 입술을 물었다. 릴리엔은 당황한 상태로도 단정했다. 다급했던 다미언은 자신의 박자에 못 맞추는 릴리엔을 어르고 달래 치근치근한 입맞춤을 나누고 나서야 머리에 쏠렸던 피가 약간이나마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릴리엔이 멍하니 다미언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전하, 이마에 핏줄이 돋았습니다…….”

“흉합니까?”

다미언이 복잡한 의장을 끌러내리면서 물었다. 릴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지는……."

"다행이네요. 사실 이건 다 비께서 요망하게 구신 탓인데, 싫다고 하시면 아주 섭섭할 뻔 했어요.”

"예? 요망 이요….…?”

릴리엔이 생각하기에 그건 자기 자신과 가장 안 어울리는 단어였다. 하지만 이미 반쯤 제정신이 나간 것 같은 다미언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사실 저는 이미 아주 섭섭한 상태랍니다.”

"어째서요……?”

딱히 다미언을 섭섭하게 한 기억이 없는 릴리엔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미언은 '당연히 당신이 그 영악한 것을 싸고돌기 때문'이라고 실토하는 대신 가만히 웃기만 했다.

'왜지?’

남편의 웃는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는데도 릴리엔은 약간 소름이 돋았다.

“비.”

“네, 전하……?”

습하고 흐릿한 욕망이 김 처럼 서린 눈빛으로 다미언이 릴리엔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그 미친 거울이 하는 말을 다 믿는 건 아닙니다만….”

그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지내다 보면 비께서 회복하실 수 있다는 말은 믿어 보고 싶어요. 참 기대가 되거든요.”

누가 알았으랴. 그 망할 거울이 이 다미언의 인생에 이토록 큰 도움이 되어 줄 줄을.

자그레브를 보내준 클로드가 알면 땅을 치고 발광을 할 것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지만, 릴리엔은 도망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다미언은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 따위가 얼마나 릴리엔의 시간을 독점하는지는 몰라도, 릴리엔은 그의 아내였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다미언, 그 한사람뿐이었다.

저는 온 마음과 진심으로 비께서 회복하시기를 고대하고 있답니다. 아시죠?”

달콤하게 조르는 목소리였다.

순수하게 릴리에의 회복만을 바라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음을 충분히 시사하고 있었다.

“제 인내심은 이미 너무 많이 시험 당해 너덜너덜 해졌거든요.”

“전하…….”

릴리에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 미언은 씩 웃었다. 이마와 목에 솟은 핏대가 다 가라앉지 않아 여전히 어딘지 무섭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이성을 잃기 전에 빨리 회복해 주세요, 네?”

이런 건 나만 할 수 있어.

이 사람은 내 아내야.

다미언은 그렇게 한계까지 부풀어 터지기 직전인 독점욕의 목줄을 간신히 거머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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