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바로 그때였다.
독점욕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한껏 예민해진 감각에 불순한 기척이 잡혔다. 다미언은 바람결에 실려 온 침입자의 냄새를 감지한 짐승처럼 단숨에 눈빛을 바꿨다.
"전하?”
“쉿.”
다미언이 릴리엔을 감싸고 침실 문을 노려보았다. 릴리엔은 다미언의 어깨 옆으로 살짝 고개를 뺐다.
두 사람의 시선 속에서 침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전하?”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린 다미언이었다.
다미언이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릴리엔이 다미언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비……?”
지금 날 밀친 거야……?
다미언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릴리엔은 눈치채지 못했다. 밤에 혼자서 침실을 나와 헤매다니.
어디가 무섭고 불편했던 걸까?
혹여 어린 다미언이 조금 전의 광경을 보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릴리엔이 다급히 눈을 부비는 어린 다미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나요?”
“잠이 안 와서…….”
어린 다미언이 베개를 안고 칭얼거리듯 말했다.
"악몽을 꿨어.”
“저런.”
릴리엔은 금방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도 무서우셨을 텐데…….”
“……응.”
어린 다미언이 조금 눈치를 보다 릴리엔의 목을 안고 안겼다.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라고 생각한 릴리에이 얼른 아이의 작은 등을 쓰다듬으며 마주 안아 주었다.
그때 침대 위에 황망히 버려진 어른 다미언과 릴리에에게 안긴 아이 다미언의 눈이 마주쳤다.
어린 자신의 보랏빛 눈동자는 악몽을 꿨다는 진술과는 정 반대로 잠기운이라곤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다미언은 눈치챘다.
'거짓말이다.'
100%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허…….”
기가 막혔다. 다미언의 입술 사이로 허탈한 한숨이 샜다. 어린 것이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이 모습을 한 다미언이 워낙 말이 없는 통에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도통 확인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하는 행동을 보아 실제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짐작만 할 뿐.
하지만 다미언은 종종 그 사실이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그라지만 저렇게 어릴 적부터 교활하게 굴 수 있었을까?
'혹시 아이인 척하고 있나?'
의심스러워지자 더욱 괘씸했다.
'감히 이 시간에 부부 침실에 발을 디뎌……?'
조금 전까지 이 공간은 그와 릴리에만의 공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기 자신의 순진함을 꾸짖어 주고 싶었다. 뭐라도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전하.”
릴리엔이 난처하면서도 결단이 선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다 미언은 릴리엔의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아챘지만 일말의 희망을 걸고 간절하게 뒷말을 기다렸다.
'그것만은 안 돼. 그것만은 안돼.’
“아무래도 오늘 여기 전하께서 함께 주무셔야 할 것 같은데"
저 봐!
어떻게 이렇게 속상할 정도로 예상 대로일 수가 있단 말인가!
다미언은 울고 싶었다. 릴리에의 품에서 눈을 빛내며 이쪽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평소 다미언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발아래 놓을 수 있는 강자였다. 그런 그의 속을 최근 10년 동안은 이렇게까지 뒤집어 놓은 존재가 없었다. 감히 추측컨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미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 망할 어린것은 그냥 어린아이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싫은 내색을 하면 다미언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환장하겠군, 진짜….'
다미언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른 다미언과 어린 다미언이 대치한다면 릴리에이 누구 편을 들지는 아주 명백했다.
그래서 다미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비께서…… 굳이, 꼭, 정말로 그렇게 하셔야겠다면야……….”
음…… 릴리엔은 난감했다.
‘전하께선 내키지 않아 하시는 것 같구나.'
내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속이 아주 홀딱 뒤집어져 있었지만 릴리엔은 거기까진 몰랐다. 그저 다미언이 스스로의 비참한 어린 시절과는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이었다.
“전하께서 정 불편하시다면 저희는 제 방으로 가서…….”
“아니!”
그것만은 안 된다!
'각방만은, 각방만은 안 돼!’
다미언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여기서 함께 자도 저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비.”
“정말요?”
다미언의 필사적인 설득 끝에 릴리엔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어린 다미언을 챙겨 침대 위로 올라왔다. 자리 배치는 당연히 릴리엔이 가운데였다.
'이거 좀 어색하네…….'
마침 어린 다미언이 릴리엔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전하.”
“……이렇게 하고 자면 괜찮을 것 같아.”
또랑또랑하면서 간절하게 빛나는 어린 다미언의 눈을 보니 자연스럽게 서쪽 별궁 다락방의 어린아이가 생각났다.
마음이 약해진 릴리엔은 고민을 관두고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라며 아이를 품에 안아 주었다.
품에 안긴 채로 아이 다미언이 릴리엔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아이 다미언이 고개를 끄덕이고도 조금 망설이다가 릴리엔에게 속삭였다.
물론 속삭여 봤자 다미언에게는다 들렸다.
“.……오늘 소풍 데리고 나가 줘서 고마워.”
다미언은 쌍심지를 켰다.
'둘이 소풍을 갔어?'
나도 아직 비하고 못 가 본 소풍을?
다미언이 질투의 화신으로 화하는 동안에도 어린 다미언의 감사인사는 계속되었다.
“케이크도……. 그런 거 처음 먹어 봤어.”
서툴고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릴리엔의 마음을 흔든 건 '그런 건 처음 먹어 봤다'는 말이었다.
마음이 와르르 허물어졌다. 릴리엔은 어린 다미언의 돌발 행동에 곤란했던 것도 다 잊고 이렇게 약속했다.
“내일은 더 맛있는 걸 먹으면서 더 재미있는 걸 함께해요.”
어린 다미언은 도리질을 치며 릴리엔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웅얼거렸다.
지금만으로도 좋아. 잘 모르지만 행복한 것 같아."
“전하…….”
릴리엔은 아이 다미언의 작은 등을 쓰다듬어 주며 “행복하시다.
니 기뻐요.” 하고 속삭여 주었다.
물론, 그동안 완전히 잊힌 본체 다미언은 아이를 안아 주느라 몸을 돌린 릴리에의 등을 바라보며 서러움을 삼켜야만 했다.
* * *
한 사람에게만 서럽고 지나치게 길었던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아이반.”
“예, 전하…… 얼굴이 말이 아니시네요?”
기초 체력 자체가 평범한 인간과 궤를 달리하는 다미언이었다.
밤을 새거나 약간 고생하는 정도로는 꼴이 망가지는 법이 없었고, 전쟁터에서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나야 엉망이 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표정부터 어두침침한 게,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이 아주 꺼칠해져 있 었다.
“대체 무슨 일이…….”
“쪼개진 영혼의 조각을 다시 내 걸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
고작 몸이 고생하는 걸론 저 꼴이 될 수 없는 사람이 무슨 마음고생을 해서 저렇게 된 건가 했더니만.
‘하기야 원인은 하나뿐이지..
“전하의 어린 시절이 말을 안들으십니까?”
“말을 안 듣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굳이 문제를 삼는다면 그것의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다미언은 우는 것처럼 얼굴을 묻고 토로했다.
“그 교활한 것이 비를 붙잡고 한 시도 놓아주질 않는다…….”
"교활한…… 이라고요…….”
제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나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아이반이 보기에는 다미언이 그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주변 사람들을 고생시킨 대가를 이제야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하 된 죄가 있어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굴 수는 없었다.
“뭐…… 어쨌든 아이니까 비께서 더 신경을 쓰시는 게 아닐는지요.”
본심을 말할 수 없으니 대답이 대충이 되었다.
“불공평하군. 어째서 아이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거지? 오늘 아침도 나는 비에게 쫓겨나다시피 했는데…….”
“그야 전하께서는 일정이 있으시니까요.”
지금 다미언에게는 무성의한 대답을 지적할 여력도 없었다. 다 미언이 보랏빛 눈동자를 음산하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하루라도 빨리 쪼개진 영혼을 복구해야겠다.”
잘생긴 생김새로만 봐서는 어디 삼도천을 다스리는 저승의 왕 같은데 하는 짓은 영 한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가 된 자기 자신을 질투하시는 좀……."
“그게 비를 독차지하려는데 내가 웃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예…… 뭐…… 전하께서 그러시다면야 그런 거지만요. 그래도 오늘 일정은 취소 못합니다.”
다미언이 아이반을 쏘아보았다.
“생각해 보니 비의 호위가 영미덥지 못하다. 오늘 비께서 그걸 데리고 라니스터 후작가로 외출을 하실 예정이라는데, 역시 내가 경호가 되는 게…….”
“키리에 경은 믿음직한 기사입니다. 그리고 비전하의 호위에 포함된 마법사가 무슨 일이 생기면 필리 경 쪽으로 바로 연락을 주도록 조치 하셨잖습니까. 게다가 오늘 일정은 황궁에서 진행될 거고 황궁에서 라니스터 후작가의 저택까지는 여기와 마찬가지로 십여 분 정도가 걸립니다.”
실제로 며칠 전 릴리에이 쓰러졌을 때도 그런 식으로 득달같이 귀가하지 않았던가.
“다 전하께서 지난번 암습 사태를 교훈 삼아서 비전하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신 덕분이죠.”
다미언은 말없이 신음하며 머리를 싸쥐었다. 하지만 아이반에게는 다미언을 설득할 마지막 무기가 이미 있었다.
“비전하께서는 튜린 사람이십니다, 전하. 그게 무슨 뜻인지 겪어 보셔서 아시죠?"
“어른스럽게 주어진 일정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좋게 보신단 말입니다.”
“나도 알아.”
“그럼 이만 일어나시죠.”
크윽……. 어른이라서 억울한 다미언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반은 바로 지금 그 심정이 전하께서 얄밉게 굴 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속이 시원하군.'
부디 그 어린 전하께서 분리된 상태로 최대한 오래 계셔 주셨으면 좋겠다고, 아이반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