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 * *
다미언이 울며 겨자 먹기로 저택을 떠난 뒤.
릴리엔과 어린 다미언은 라니스터 후작가에서 있을 자선 음악회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원래 이번 초대는 예정에 없게 어린 다미언을 돌보게 됐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해 두었다.
하지만 어젯밤, 멀리도 아니고 집 정원에 돗자리를 편 것만으로도 소풍은 처음이라며 소곤거리던 다미언을 생각하면 도저히 집에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변의 안전 때문에 어디 아무 데나 외출을 할 수도 없는 신세라, 릴리엔은 라니스터 후작가에 양해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후작가에서는 기쁘게 양해해 주었고, 덕분에 대공저에서.
는 두 사람의 외출 준비가 한창이었다.
어린 다미언과 외출을 해야겠다는 말에 모린 부인은 어디선가 잔뜩 꺼내 온 어린아이 옷들을 다시 뒤졌다.
"마테오 전하께서 어릴 적에 입으시던 옷 몇 가지를 보관해 두었는데, 이렇게 쓸모가 생겼네요.”
모린 부인은 해군 군복을 모티브로 지어진 감청색 어린이 정장을 골라 릴리에에게 보여 주었다. 릴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언에게 옷을 갈아입히며, 모린 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조금 클 줄 알았는데 잘 맞네요…….”
분명 어제까지는 마테오가 서너살 적에 입던 옷이 잘 맞았는데, 오늘은 그보다 조금 큰 옷도 딱 맞아 떨어졌다.
“그새 조금 자라셨나? 그럴 리는..."
“음……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정말 어린아이이신 게 아니라 전하의 영혼이 실체화되신 거니까.”
소풍 한 번에 비쩍 곯았던 몸상태가 좋아졌는데, 하룻밤 새키가 자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릴리에의 설명에 모린 부인도 그럴 수 있겠다며 납득했다.
릴리엔이 모린 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미언은 어딘지 불편한 기색으로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전하, 옷이 불편하신가요?”
옷이 너무 꼭 맞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릴리에이 묻자, 다미언이 조금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편하지는 않아요?”
아이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필요량으로, 릴리에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다미언의 보라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린 다미언이 반짝거리는 긴 속눈썹 안의 보라색 눈동자로 빤히 릴리엔을 바라보더니,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 내 옷이 아닌데…"
“입고 나가도 괜찮은지 모르겠어.”
릴리엔은 마음 아픈 티를 꿀꺽 삼켰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이 릴리에이 미흡한 탓에 시일이 촉박하여 전하의 옷을 짓는데 빨리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불편하시겠지만 옷이 다 지어질 때까지만 양해해 주시겠어요?”
불안함을 제 탓으로 돌리는 릴리에의 화술에 다미언이 미심쩍어 하면서도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엔은 활짝 웃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외출을 고대하고 있었거든요.”
어린 다미언이 말간 보랏빛 눈동자로 릴리엔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로 '…나도.'라고 대답했다.
* * *
라니스터 후작가의 자선 음악회는 꽤 유서가 깊었다.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서 공연을 할 때는 작은 오페라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오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현악 협주 레퍼토리 몇 가지와 삼중창이 준비되어 있었다.
라니스터가의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음악회 문화에 단련되어 왔기에 발표 당일에 새삼스럽게 떠는 일은 없었다.
대기실로 마련된 공간에 릴리엔이 방문했을 때, 일라시아 역시 비올라의 음을 맞춰 보다가 차분한 얼굴로 릴리엔을 맞이했다.
그러나…….
“비, 비, 비, 비전하, 오셨, 왔, 그러니까 누추한 발걸음을 귀한 곳에,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솔라리아.”
릴리엔은 약간 놀랐다.
“긴장했구나?”
“기, 기, 긴장이라니 무슨, 저는 괜찮아요. 제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 드릴게요……!”
솔라리아가 건반을 누르기도 전에 옆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꺅, 솔라리아! 너 지금 내 발을 밟았잖니!”
“세상에, 미안, 타샤 언니! 페달인 줄 알았어!”
릴리에이 중얼거렸다.
“긴장했구나.”
일라시아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할 정도로요.”
"아니에요! 끔찍하지 않아요! 잘할 수 있어요, 보세요……!”
솔라리아는 이를 악물고 타샤의 발을 피해 다시 페달을 밟으려다가, 발밑을 맴돌던 고양이 코리의 꼬리를 꽉 짓밟고 말았다.
"애오웅!”
털이 바짝 선 코리가 후다닥 도망가다가 보면대를 연달아 쓰러트렸다.
"이런, 코리!”
"어마, 내 악보!”
보면대가 쓰러지고 종이가 사방팔방 휘날리는 가운데 꼬리를 밟힌 고양이가 씩씩대며 난장판 사이를 더 난장판이 되도록 헤집고 다녔다.
“누가 코리 좀 잡아 봐!”
"이런, 현이 끊어졌어!"
삽시간에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릴리엔의 치맛자락 옆에 얌전히 서 있던 어린 다미언이 슬그머니 더 몸을 붙였다.
건장한 하인 두 명이 달라붙고 나서야 코리는 간신히 진압되었다. 종이를 대강 그러모으고 보면대를 다시 세우는 데만 십여 분이 더 걸렸다.
“늘 이렇게 난장판이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솔라리아가 비전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거의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에요. 그나 저나 어린 손님이 놀라셔서 어쩌지요?”
일라시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린 다미언을 바라보았다.
어린 다미언의 얼굴에는 가벼운 인식 장애를 유발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일라시아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도 다미언과 판박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현재 대외적으로 어린 다미언은 릴리엔과 친밀한 가문의 아이로 그녀가 얼마간 돌봐 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일라시아의 사과에 다미언이 말없이 도리질을 쳤다.
순간 릴리엔은 어린 다미언이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익숙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즐겁게 해 주려고 데리고 나온건데, 어색한 기분만 들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적한 곳에서 자란 아이라 사람 대하는 것이 수줍은 모양이니, 이해해 줘요."
“이런 난장판을 겪게 해서 저희가 더 미안한걸요. 무대 위에서는 실수하지 않을…….”
그때 솔라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피아노 덮개를 제 손가락 위로 덮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수 있게 노력할게요.”
일라시아가 간신히 말을 마쳤다. 솔라리아가 진정하기 위해서라도 릴리에이 빨리 자리를 비워줘야 할 것 같았다.
“응원할게요.”
* * *
난장판이 된 대기실을 벗어나면서 릴리엔은 다미언에게 물었다.
“불편하시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요?"
“어제처럼 저희 둘이 시간을 보내도 괜찮아요.”
다미언은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수줍게 덧붙였다.
“옆에 있어 준다면…… 괜찮아.”
상처받을 대로 상처받았을 어린 다미언이 마음을 열어 줄 때마다 릴리엔은 고맙고 애틋했다. 그래서 하나도 대충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네, 옆에 있을게요.”
“방금 전엔 좀 소란스러웠지만 음악회는 나쁘지 않을 거예요.
전하께서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다미언이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때 복도 저편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머, 비전하!”
“꺄악, 비전하께서 오셨어!”
하나같이 연노랑, 살구색, 연분홍색 등 밝은 색 옷을 입은 어린 아가씨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봉오리 아가씨들.”
은방울꽃 소로리티의 데뷔탕트들이었다.
아가씨들은 제각기 익숙한 얼굴로 체념한 파트너들을 제쳐놓고 릴리에에게 앞다투어 다가왔다.
“뵙고 싶었어요, 비전하!”
“그간 건강하셨나요?”
“모두 염려해 준 덕분에 아주 건강하게 지냈단다.”
릴리엔의 다정한 눈웃음과 부드러운 대답에 어린 아가씨들이 일제히 몽롱하게 녹아내렸다.
바로 그때 어린 다미언이 릴리 엔의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니?”
릴리엔이 놀라자 둘러싼 아가씨들의 시선도 다미언에게 향했다.
다미언은 갑작스러운 시선 집중에 주춤거리며 릴리엔의 치마꼬리에 몸을 슬쩍 숨겼다. 릴리에 이 “괜찮아, 다 내 친구들이란다.” 하고 달랬지만 영 긴장을 풀지 못했다.
"아가씨들, 미안.”
결국 릴리엔이 고개를 들어 사과했다.
“사정이 있어 얼마간 돌보는 아이인데, 사람이 많은 곳을 달가 워하지 않는구나. 하니 아가씨들이 양해를 해 준다면…….”
“아, 네, 네. 물론이죠, 비전하."
“음악회를 즐기러 오셨는데, 저희가 너무 떠들썩했지요……"
릴리에이 다미언을 다독이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배려심이 깊기도 하지.
다음에 상황이 허락할 때 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네, 네에!”
"약속하신 거예요, 비전하."
릴리에이 그러겠다며 일일이 눈인사를 하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아가씨들이 일제히 고개를 갸웃했다.
'비전하가 돌보는 아이가…'
'어쩐지 굉장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확신할 수 없지만 쟁탈전 내지는 기 싸움에서 거하게 진 기분이 들었다.
“키리에 경, 아무래도 전하께서 음악홀 안에 들어가길 부담스러워 하실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는 릴리엔만이 호위들과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아까 듣자 하니 음악홀이 복층구조로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중이층으로 가서 감상하시는 게 어떨까요?”
성실한 키리에 경은 라니스터후작가에 오자마자 구조를 대강파악해 둔 참이었다.
릴리엔은 자기 얼굴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며 실수를 연발하던 솔라리아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중이층에 가있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일행이 중이층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래층이 수런수런해졌다.
“무슨 일이지?”
릴리엔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불입니다! 밖에서 하인들이 그러는데 불이 났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