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35화 (135/155)

135화.

“뭐?”

"어머, 세상에!”

착석하던 손님들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주변이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잠깐, 여러분, 잠깐만……!”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공황 상태가 되니 통제가 되지 않았다.

엉망이 된 1층을 내려다보며 릴리엔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불이라니……. 잠깐, 키리에 경.”

“예, 심상치 않습니다.”

건물에 불을 지르는 건 경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키리에 경이 옆에 서 있던 마법사에게 명령했다.

“미엘 경, 필리 경에게 빨리 연락을 취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비전하.”

불안하게 1층을 바라보던 릴리 엔은 다미언의 손을 놓칠세라 꾹잡았다.

“따라오십시오.”

키리에 경이 중이층 밖 복도로 일행을 이끌었다.

“여기 이 방에 숨어 계십시오.

미엘 경이 곧 결계를 칠 겁니다.

그 뒤에 저와 미엘 경이 시간을 끌겠습니다.”

"알았어요.”

“절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절대.”

릴리엔은 키리에 경의 '절대'가 무슨 경우를 포함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일단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릴리엔은 다미언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용 객실로 꾸며진 방이었다. 릴리엔은 문득 자신이 차갑게 식어 땀범벅이 된 손으로 다 미언의 손을 지나치게 꽉 쥐고 있단 사실을 눈치채고 아차 했다.

“죄송합니다, 전하.아프셨죠.......”

릴리엔이 손을 놓아주자 다미언이 빤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다미언은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미언은 원체 감정적 반응을 숨기는 습관이 되어 있는 아이였다.

릴리엔은 다미언을 위해서라도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으려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릴리엔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다미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요, 전하. 별일 아닐 겁니다. 키리에 경과 미엘 경이……."

릴리엔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불이 난 게 사고가 아니라 습격임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덜컥 놀랐지만 얌전히 그녀를 바라보는 다미언 앞에서 내색할 순 없었다.

미엘 경이 연락을 취했으니 다 미언이 늦어도 20분 안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라니스터 후작가의 기사들도 있다. 그러니까…….

'괜찮아.'

릴리엔은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다미언이 조심스럽게 릴리엔의 품에 안겨 들었다.

“......!"

어린 다미언이 릴리에에게 안기는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괜찮아.”

다미언이 릴리엔을 달래듯, 작은 손으로 서툴게 릴리엔의 어깨 쪽을 토닥거렸다.

릴리엔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전하.”

"?”

릴리에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다미언을 제게서 떨어뜨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밖에서 들리는 불길하고 소란스러운 소리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릴리엔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침실로 꾸며진 방인지라 한쪽에 옷장이 놓여 있었다.

릴리엔은 다미언을 데리고 가서 옷장 문을 열어 보았다. 다행히 철 지난 겨울옷이 걸려 있었다.

부피가 큰 옷들 사이에 숨어 있으면 포근하니 두려움을 달래 줄것 같았다.

“전하.”

릴리에이 다미언을 돌아보자 다 미언이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싫어.”

“전하.”

릴리에이 무릎을 꿇고 어린 다 미언의 눈을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다미언은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혼자 숨지 않을 거야. 난, 옆에 있게 해 줘…….”

“죄송하지만 저는 도움이 될 수 없어요, 전하. 그러니까…….”

“싫어.”

다미언이 고집스럽게 눈까지 꾹감고 도리질을 쳤다. 릴리엔은 초조해졌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릴리엔과 다미언이 발견되고, 어린 다미언이 다미언의 영혼의 조각이란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었다.

다미언이 강하기는 하겠지만 회복력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릴리엔은 자기가 잡혀가더라도 어린 다미언을 감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다미언의 부상 때문이 아니더라도 릴리엔은 이 어린 다 .

미언을 보호하려 했을 것이다.

“물러서!”

문 밖에서 키리에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해진 릴리엔은 설득을 포기했다.

“하지……!”

“쉿!”

릴리엔은 어린 다미언을 들어올려 옷장 안으로 들여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는 자그레브안이 아니었고, 릴리엔의 형편없는 근력으로는 고집 부리는 아이를 도저히 일으킬 수 없었다.

“전하!”

몇 번이나 애를 써도 통하지 않자 릴리에이 속상한 마음에 저로 모르게 소리를 쳤다.

바로 그때, 쾅! 소리를 내며 등뒤에서 문이 열렸다.

"!”

릴리엔이 화들짝 놀라 어린 다 미언을 뒤로 숨기며 돌아섰다.

문 앞에는…….

"…비!”

다미언이었다.

“전하……!”

얼굴까지 피가 튄 데다 칼을 휘두르며 여기까지 뚫고 온 터라 갈무리되지 않은 예기가 흉흉하게 그를 두르고 있었다. 주변에 다가가기만 해도 베일 것 같았다.

하지만 다미언이었다.

릴리엔의 다미언이었다.

"하…….”

너무나 안도한 나머지 릴리엔의 한쪽 무릎이 푹 하고 꺾였다.

다미언이 한달음에 릴리엔에게 다가왔다.

“전하.”

“무사하셨군요. 무사하시니 됐습니다.”

“전하, 저…….”

“잘 견디셨습니다. 이제 안심하세요. 비를 해치려고 하는 자들은 여기 당신의 충실한 개가 다물어뜯어서라도 죽여 버릴 거니까.”

서슬 퍼런 분노가 넘실거리는 말이었다. 그냥 듣기 뭐할 정도로 섬뜩하고 잔혹한 말인데도 릴리엔은 그 말에 안도했다.

“전하…….”

고장 난 것처럼 그 말을 중얼거리는 릴리엔의 관자놀이에 다미언이 입맞춤을 남겼다. 입가에 피가 튀어 있어 릴리에에게도 핏자국이 묻었다.

“전하……!”

그 핏자국을 지워 줄 새도 없이 새로 나타난 사람들이 속속 응접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부상을 입고 입구 쪽에 서 있던 키리에 경이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바로 다음 순간 교전이 시작되었다.

릴리엔은 어린 다미언을 껴안고 주저앉았다. 난전 속에서 다미언은 아주 예술적인 형태로 움직였다.

“크억……!”

“컥!”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 습격자들의 급소를 꿰뚫었다. 조금만 넋을 놓으면 습격자들이 알아서다미언의 칼끝에 투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겠지만, 반쯤 공황 상태에 빠진 릴리엔의 눈에 다미언의 움직임은 아주 미려하게 보였다. 어떤 고차원적인 경지에 다다른 예술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 넋을 놓고 있었을까. 갑자기 어린 다미언이 소리쳤다.

“안 돼……!”

“......!"

릴리엔은 뒤늦게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은빛 칼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도무지 피할 재간이 없었다.

릴리엔은 반사적으로 어린 다미언을 껴안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얼마쯤을 기다려도 예상한 격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릴리에 대신 어깻죽지를 내준 다미언이 있었다.

"전…!”

"나를 화나게 하려는 거라면 시도 좋았어.”

칭찬하는 말투는 결코 아니었다.

“컥……!”

다미언의 칼날이 릴리엔을 노린 자의 양쪽 종아리를 서걱, 베고 지나갔다. 습격자는 단 한 번에 다시는 걷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죽을 수는 없었다.

“전하! 비전하!”

“여기입니까?”

타이밍 좋게 아이반과 수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키리에 경은 끝까지 칼을 놓지 않았다.

“전하, 어깨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릴리엔을 향해 다미언은 웃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엔 천하의 그도 고통스러운 기색을 다 숨기지 못했다.

'제기랄..….'

회복력에 손상을 입은 채로 너무 큰 부상을 입었다.

이번 습격자의 칼에도 베놈 코어가 묻어 있었다. 다미언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더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칼에 찔린 어깻죽지부터 익숙한 작열감이 신경을 불태우듯 내달렸다. 산 채로 피부를 벗기고 소금을 쳐서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 위로 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좀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연약한 인간의 형상으로 버티기 힘든 부상임을 눈치챈 마력이 날뛰기 시작했다. 다미언의 어깨뼈와 근육이 제멋대로 튀어 오르며 마물 같은 끔찍한 형태로 변하려고 했다.

'안 돼……!’

릴리엔의 푸른 눈이 그를 꿰뚫기라도 할 듯 주시하고 있었다.

다미언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지금은 안 된다. 비의 눈앞에서 변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죽을 지언정 그럴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무느라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뼈마디가 절로 비틀어지며 형태를 바꾸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니 그동안에도 느껴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고통이 전신을 쥐어짰다.

견디다 못한 다미언의 무릎이 푹 하고 꺾이고 말았다.

“전하!”

"…손대지 마!”

놀란 릴리엔이 다가오려고 했지만 다미언이 와락 소리치는 게 더 빨랐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다. 릴리엔은 단 한번도 보지 못한, 다미언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절대……. 절대, 내게, 손대지 말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