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전하, 이리로 오십시오."
아이반이 서둘러 다가와 어깨를 빌려 주었다. 릴리에에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한 것과 달리 다미언은 아이반의 어깨에 몸을 실었다.
릴리엔은 쿵, 하고 지상에서 지저로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다미언이 그녀를 거절했다.
온 세상을 다 거절해도 릴리에만은 거절하지 않을 사람이…….
타인을 용납하고 릴리엔을 거절했다.
라니스터 후작가의 저택에서 대공저로 돌아오는 데는 채 십여 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들 이런 상황에 대비가 되어 있는 듯 아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우선 다미언을 침실로 옮겼다. 다미언의 뒷모습을 보며 릴리엔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첫 번째 조각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전하께서 몸이 변하실 때는 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다미언의 변화가 부상과 관계가 있다면, 변형된 형태가 부상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미언은 지금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외형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섬뜩한 예감이 등골을 달렸다.
혹시…… 필사적으로 참고 계시는 게 아닐까.
이유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다미언은 지금 릴리에이 자기의 본 모습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릴리에에게만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왜냐하면…….’
들키는 순간 릴리에이 자신을 혐오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담한 깨달음이 서늘하게 머리를 적시는 듯했다.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다미언의 등이 허물어져 남에게 반쯤 기댄 채로 걸어가는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찍혔다.
그로 보건대 신체 변형을 억지로 참는 게 다미언에게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인 건 분명해 보였다.
실제로 다미언은 릴리엔을 잃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살이 으스러지고 꺾인 뼈가 으스러진 살점을 뚫고 나오는 듯한 격통을 견렸다.
릴리엔은 다미언이 겪는 고통의 크기까지는 몰랐다. 그저 다미언이 그녀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고통을 감내한다.
는 사실 자체가 쥐어짜듯 아팠다.
심장에만 백배쯤 되는 중력이 짓누르는 것 같았다. 펄떡거리며 피가 뛰는 심장이 으깨어지듯, 저미어지듯 아팠다.
어린 시절부터 다미언을 자근자 근 짓밟아 온 사람들에게 화가 났고, 다미언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다미언을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다미언이 납득하는 데 백 년이 걸린다면 백 년 동안, 천 년이 걸린다면 천 년 동안 그를 사랑해 주고 싶었다.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릴리엔이 잡고 있었던 어린 다 미언의 손을 놓았다.
"아……!”
어린 다미언이 흠칫 놀랐다. 릴리엔은 미안해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잠시 가 봐야겠습니다, 전하. 모린 부인께서 전하와 함께 계셔 주실 겁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사랑해야 할 것은 다미언의 지나간 과거가 아니었다.
그 모든 처참한 순간들을 견디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사람.
그 사람의 지금을 사랑하는 것이 그가 끌어안고 온 모든 과거를 사랑하는 것이다. 릴리엔은 뒤늦게 깨달았다.
바로 지금의 다미언에게 그녀가 필요했다.
* **
다미언이 스스로를 가둔 방은 대공저 지하에 있었다. 사실상 거기는 방이 아니라 지하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에 철문을 달아놓은 공간이었다.
그야말로 유폐만을 위한 공간.
릴리엔은 거침없이 거기까지 들이닥쳤다.
“비전하, 여기서부터는……."
단단히 결심한 대공비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릴리엔이 두터운 철문 앞에 이르러서야 아이반이 난색을 표하며 릴리엔을 막아섰다.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다. 다미언이 그 철저한 성격에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이런 불상사가 생겼을 경우 릴리엔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도록 막아 달라는 명령을 사전에 골백번도 더 내려 놓았을 그런 남자였다.
“아이반 아이작 경.”
“비전하…….”
릴리에의 침착한 부름에 아이반이 신음하듯 대답했다. 눈치 빠른 수하는 직감했다.
그는 여기서 릴리엔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길을 터 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다미언에게 시간이라도 최대한 벌어 주어야 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또 다미언이 무슨 오기를 부려서라도 릴리엔을 맞이할 만한 상태가 될 수도 있잖은가.
아이반은 이 대공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기만 한 게 아니라 사실 이제는 그녀를 거의 존경하고 있었다.
다미언,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그의 주군에게는 이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수하로서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전하, 지금은 들어가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전하께서 지금 비전하를 맞이하실 만한 상태가 아니십니다.”
“아이반 경, 경에게는 나를 막을 권리가 없습니다.”
릴리엔은 차분하게 사실을 짚어주었다.
“나는 루펜바인의 대공비이며 전하의 아내로서 선황 폐하께서 하사하신 임페라트릭스의 권한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내 남편에 대해 아내로서 권리가 있어요.”
“비전하…….”
“문을 열어요.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
릴리에의 단호한 눈빛에서 아이 반은 직감했다.
“설마, 비전하…….”
제기랄. 아이반이 바라는 건 부디 다미언이 제정신을 차린 뒤에 자기 스스로를 죽이려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불확실한 희망에 기대를 걸 순 없었다.
“비전하, 이 안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아십니까?”
“예.”
릴리에이 망설이지 않고 긍정했다.
아이반은 릴리엔의 푸른 눈에서 타오르는 불꽃같은 것을 보았다.
항시 서늘하고 다정하다고 생각했던 눈이 꺾이지 않을 기세로 빛나고 있었다.
전쟁터를 헤매어 본 아이반은 대번에 눈치챘다.
튜린 사람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목숨을 걸 때 하나같이 이런 눈빛을 했다.
그 사람들은 어떤 혼란 속에서도 자신들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여기 대공비 역시 그랬다.
“내가 들어가거든 이 방문을 잠가도 좋아요. 저 안에서 무엇을 보게 되든 나는 도망치지 않을 거니까.”
"알겠습니다.”
결국 아이반이 졌다. 예정된 결과였다.
묵직한 철문은 마치 머리 셋 달린 개가 지킨다는 저승의 입구를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그 안은 끝없는 어둠뿐이었지만 릴리엔은 겁먹지 않고 성큼 발을 들였다.
부적절한 비유였지만 마치 인신 공양이라도 바치는 것 같았다.
아이반은 쉽사리 문을 닫지 못하고 망설였다.
“문을 닫아요.”
“알겠습니다, 비전하. 그전에 이거라도…….”
아이반이 릴리엔의 손에 등불을 쥐어 주었다. 릴리엔이 앞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당부했다.
“나는 문을 잠그라고 했어요.
농담이나 허세가 아닙니다.”
"예, 복명하겠습니다. 심려놓으세요.”
릴리엔은 등불 하나만을 들고 성큼, 깊은 어둠으로 발을 디뎠다.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 * *
그 안에는 완전한 정적과 완전한 어둠뿐이었다.
밖은 아직 낮이건만 지하에 만들어진 던전이나 다름없는 이 공간에는 햇살 한 점 들어오지 않았았다.
아이반이 등불을 주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더듬거리고 말 뻔했다.
‘여긴 얼마나 넓은 거지…'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기엔 나이가 충분히 든 릴리엔조차도 약간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로 적막하고 어두웠다.
다미언은 어디 있을까. 대체 언제부터 스스로를 위해 이런 감옥보다 더 깊은, 거대한 관이나 마찬가지인 공간을 마련해 둔 걸까.
이 공간이 릴리에, 자신 때문에 생겼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 히도록 슬펐지만…….
'지금은 질질 울고 있을 때가 아냐.'
다미언을 찾아야 했다.
릴리엔은 등불을 들고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하 감옥가장 깊은 곳에 기진맥진 쓰러져 있는 다미언은 사람의 인기척을 알아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워낙 상황이 다급했기에 다미언은 아무것도 깔리지 않은 차가운 돌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의식을 반쯤 잃은 상태였다.
반만 남은 의식은 타는 듯한 격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제어력을 잃은 몸이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꿈틀거리고, 펄떡거리고, 때로는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마구잡이로 변화하고 있었다.
릴리엔이 도착했을 때 다미언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였다.
평소에 자주 변하던 팔 뿐만 아니라 몸의 반절 이상이 기괴한 형태로 변모해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던 얼굴도 반이나 검은 변화에 침식당해 있었다.
저주에 걸린 석상 같지도 않았다. 다미언의 몸은 릴리엔이 보는 앞에서 계속 꿈틀대며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마치 막 생명을 잃은 육신의 신경과 근육이 펄떡거리며 마지막 단말마를 내지르는 것 같았다.
회복 능력이 망가진 다미언의 몸이 베놈 코어와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누구라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갈 처참한 꼴이었다.
하지만 릴리엔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물론 심정은 참담했지만 그건 다미언의 기괴한 몰골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아픈 자기 몸을 쓰레기를 버리듯 이런 곳에…….’
다미언은 여기 있어선 안 된다.
릴리엔을 구하느라 이 꼴이 된 남자는 이런 지하 감옥이 아니라 위층에 있는 대공의 침실에서 자기가 구한 아내의 간호를 받아야만 했다. 마땅한 그의 권리였다.
“전하…….”
지체할 수 없었다. 다미언을 달래고 설득하는 건 나중에 할 일이었다. 지금은 우선 그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 했다.
릴리엔은 한쪽에 등불을 올려놓고 다미언에게 다가가 제멋대로 꿈틀거리고 있는 흉측한 손을 잡았다.
바로 그 순간.
".......!"
의식을 잃었던 다미언이 번쩍 눈을 떴다.
“전…….”
릴리엔이 다미언을 미처 다 부르기도 전에 다미언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도무지 그 어떤 의성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비명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지옥 깊은 곳에서 천년을 불에 타며 보낸 죄수 앞에서 물 한 방울을 땅에 버렸을 때 지를 법한 그런 비명 소리. 그런 끔찍하고 처절한 소리였다.
“전하!”
다미언이 릴리엔을 피해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가 감옥의 가장 깊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는 등불 빛을 피해 자기의 추한 몸을 약간이나마 어둠 속에 감추는 게 고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