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37화 (137/155)

137화.

다 봐 버렸어.

다 봐 버린 거야.

공포와 절망으로 다미언이 비명처럼 날카롭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릴리에이 다시 한 번 그를 불렀지만 다미언은 몸을 움츠리며 소리칠 뿐이었다.

“다가오지 마!”

성대마저도 변한 탓인지, 평소의 목소리와 녹슨 철문을 긁는 듯한 소리가 동시에 났다.

다미언은 헐떡이며 애원했다.

“안 돼, 릴리. 나를 보지 마요,제발……!”

끔찍하게 쉰 소리로 애원하며 다미언이 두서없이 빌었다.

릴리엔은 엉망진창인 다미언이 다시 경기를 일으킬까 봐 다가가지 못하고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주 잠깐 마음이 약해졌다.

'여기서 물러나야 하나?'

이 광경을 보지 못한 걸로 하고, 기억하지 못한 걸로 하고 전과 같이 살아가는 게 어쩌면 다 미언의 마음을 더 편하게 해 주는 일이 아닐까?

다미언이 이렇게 들키기 싫어하는 일을 그녀가 알 자격이 있을까?

그 순간, 릴리에의 머릿속에 이런 말들이 차례대로 스쳤다.

"만약 내가 널 따라가면…… 평 평생 같이 있어 줄 거야?”

"평생 동안 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렇게만 해 준다면 릴리엔이 누구인지, 사람인지 아닌지도 상관없다고 말했던 다미언.

"나를 버리면 안 돼. 당신을 죽여 버릴지도 몰라. 나는 나쁜 괴물이니까.”

"나를 버리지만 않는다고 약속해.”

매 순간마다 다미언이 릴리엔에게 요구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

다미언에게 중요한 건 릴리에에게 흉측한 모습을 들키지 않는 게 아니었다.

릴리엔에게 버림받지 않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잠시 요동쳤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약해졌던 릴리엔의 눈빛이 다시 한 번 명확해졌다.

“전하.”

릴리엔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다미언이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질린 듯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릴리엔은 물러서거나 멈춰 서지 않았다.

일정한 속도로 다미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미언은 숨을 쉬는 것마저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릴리엔은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른 검은 혈관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다미언의 왼쪽 뺨에 손을 얹었다.

징그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대니 온 얼굴이 그야말로 눈물범벅이 된 게 느껴져서 애처롭기만 했다.

"나, 나는, 나…….”

다미언이 헐떡였다. 릴리엔은 쉬이, 하고 나직한 소리를 내서 말을 막았다.

그리고 다미언에게로 다가가서 천천히 입술을 훔쳤다.

아플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서.

릴리엔은 엉망으로 짓씹힌 다미언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가 놓아 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괜찮아요.”

다미언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릴리엔은 가볍게 웃으며 다 미언의 기괴한 왼손을 가져와 제 뛰는 심장 위에 얹어 주었다. 흠칫 떨어지려는 손 위에 자기 손을 단단히 얹었다.

다미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릴리엔의 가슴팍에 닿은 제 괴물 같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짐승의 앞발 같은 손바닥 밑에서, 릴리엔의 여린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릴리에의 심장은 조급하지 않고 천천히 하지만 아주 확실하게 뛰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은 겁먹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미언이 간절하게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릴리엔이 속삭였다.

“괜찮아요, 전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다미언은 수없이 많은 의문을 품고서 릴리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까지 전하의 삶이 힘들었다는 걸 알아요.”

“.......”

“전하의 마음이 망가져 버렸다.

는 것도 잘 알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다미언.”

릴리엔이 속삭였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따라서 말할 줄도 모르는 아이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겨 넣듯이, 천천히 진심을 담아서.

“여태까지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요.”

“내가 너무 늦게 나타나서 미안해요. 나를 만나기까지 살아남아줘서 고마워요.”

릴리에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다미언의 손가락 위로 입을 맞췄다.

경건할 정도로 감사를 담은 입맞춤이었다.

“릴리, 릴리…….”

다미언의 눈빛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필사적으로 릴리엔을 붙들었다.

깊은 물속에서 동아줄을 발견한 사람처럼.

“나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전하의 삶을 제가 가지겠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어요.”

다미언을 가지기 위해 릴리엔이 지불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제가 전하의 것이 되었답니다.”

"마음껏 가지세요."

릴리엔이 속삭였다.

“내가 당신에게 허락했으니까.”

벅차고 고통스러웠다. 이게 현실이 아닐까 봐 두려우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다미언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게 온전하게 남은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황혼이 지나고 깊은 밤과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되었다.

옷가지들 사이에서 다미언은 릴리엔을 끌어안고 얕은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꿈속에 나타난 건…….

-한심해.

어린 모습을 한 자기 자신이었다.

달갑지 않은 얼굴이잖아. 분명 최고로 행복한 기분으로 잠든 것 같은데, 왜 릴리엔이 아니라 자신을 꿈속에서 만나야 하는 걸까?

- 너 같은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

그러든지 말든지. 어린 자기 자신의 비난은 간지럽지도 않았다.

“피차 마찬가지네. 나도 무력하게 썩은 생선 눈깔이나 하고 다니던 내 어린 시절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거든.”

-하지만 나는 너야.

“그래, 빌어먹게도 그렇지.”

어린 다미언의 형상이 조금씩 부서지는 빛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다미언은 그 빛이 자신에게 스며드는 걸 보고 빈정거렸다.

“나 같은 어른이 되기는 싫다며?”

-릴리엔의 남편이 되는 거라면 감수할 수 있어.

아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미언을 바라보며 경고했다.

-내가 돌아가야 네 몸이 낫는다며.

다미언은 눈치챘다. 어린 그가 갑자기 개과천선을 해서 돌아오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랬던 그는 릴리엔의 무조건적인 보살핌과 애정을 제법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회 습격 사건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 몸으로는 릴리엔을 지킬 수 없다는 걸.

릴리엔은 어린 다미언을 무조건 보호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어른다미언이 나타나자 무릎이 꺾일정도로 안심하며 즉각 보호를 받았다.

어린 다미언은 충격과 깨달음을 얻었다. 귀여움을 받으며 즐길 때가 아니었다.

릴리엔을 지키는 남편이 되어야 할 때였다.

떨어져 나갔던 영혼의 조각이 스며들수록 다미언은 그런 생각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발칙한 꼬맹이 같으니."

투덜거렸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릴리엔이 박살났던 그의 영혼조차도 고쳐 놓았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좀 행복해졌다.

마침내 분리되었던 영혼의 조각이 완전히 흡수되었고…….

다미언은 잠에서 깨어났다.

깜빡, 깜빡. 그가 졸음을 쫓아내려는 것처럼 눈을 깊게 깜빡였다.

보랏빛 눈동자가 서서히 명료해졌다.

“아…….”

다미언이 쉰 목소리로 옅은 탄성을 냈다. 영혼의 조각이 자그레브 안에서 겪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그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각기 다른 색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서 묘한 빛을 만들어 내는 기요문 실크처럼.

다미언이라는 씨줄 날줄 사이로 릴리엔이라는 실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삶의 가장 비참한 순간마다 릴리엔이 스며들었다. 다미언은 가만히 몸을 떨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기억을 바라보았다.

“전하…?"

설명할 수 없는 경이.

엄밀히 말해 이 일은 릴리엔과다미언의 기억 속에서 일어났을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다미언에게는 일생을 뒤 흔들 기적이었다.

다미언은 잠투정을 하듯 인상을 쓰며 잠에서 깨어나는 아내의 혼곤한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직 어두운 지하 감옥이었으나다미언의 시력으로 볼 수 없는 건 없었다.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그의 깊은 과거에까지 족적을 남기고 동아줄을 드리운 사랑이 거기 있었다.

“릴리에, 한 가지만 물어도 돼요?”

"네……?”

잠에서 덜 깬 릴리엔은 영문을 몰라 했다. 마음이 통했으나 여전히 교활한 다미언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기습적으로 물었다.

“집요한 남자라고 생각하겠지만 한 번만 더 부탁할게요."

"네…….”

“절 길들이셨으니 책임도 져 주셔야 해요.”

릴리엔은 멀뚱멀뚱 다미언 쪽을 바라보았다. 다미언과 달리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그녀의 시력은 새카만 어둠에 잠겨 있는 다미언의 형체를 구별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책임을 져 달라고 요구한다. 상당히 공포스럽게도 느껴질 법한 상황이었다.

다미언이 재촉했다.

“굶주린 짐승에게 먹이를 주실 때 이 정도는 각오하셨으리라 믿어요.”

릴리엔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웃었다.

“얼마든지요.”

릴리엔은 확신했다. 그녀의 평생을 걸고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