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38화 (138/155)

138화.

13. 사람을 움직이는 사랑.

대공저의 사람들은 꼬박 하룻밤을 애태우며 기다렸다.

대공은 오랜 기다림의 끝, 다음 날이 되어서야 축 늘어진 대공비를 안고 돌아왔다.

“대공 전하!”

모두들 흠칫 놀랐다. 말은 안했지만 다들 그 순간 대공이 대공비를 실수로 죽이고 만 건가 생각했다.

폭주할 때의 다미언은 그만큼 불안정한 존재였다. 굳이 시간과 돈이 남아돌아 대공저에 비밀스럽고 넓은 지하 감옥을 지어 둔게 아니었다.

“쉿.”

하지만 다미언은 피에 젖어 있지 않았다.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 보이지도 않았고, 신체 역시 완벽하게 인간처럼 보였다.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원상을 회복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원래부터 몸상태가 좋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모두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대공은 보드라운 담요로 감싼 대공비를 소중하게 추어 안을 뿐이었다.

그 본인은 너덜거리는 옷에 맨발이었는데도, 품에 안겨 깊이 잠든 너무 깊게 잠든 나머지 한순간 죽은 것처럼 보였던 아내만 곱게 돌보고 있는 게

'완벽하게 평소의 전하로군.'

대공가 식구들은 그제야 일말의 의심을 내려놓고 다들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미언은 릴리엔을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제 몸으로 최대한 보호하기는 했지만 야전 침상 하나도 없는 돌바닥이었다.

다행히 평온하게 잠든 릴리엔의상태가 크게 나빠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얼른 편안한 잠자리에서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아이반 경, 이대로 전하를 보내실 겁니까? 지금 보고해야 할 것들이…….”

“내버려 두십시오. 지긋지긋하게 겪어 봐서 아는데 저러실 때 전하를 따라가서 일 얘기를 해 봐야 얻는 게 없습니다."

대공 부부의 지나치게 사적이고 내밀한 모습이나 엿보고 정신적 타격이나 받는 게 다일 것이다.

합리적인 설명에 엘런 총관도 납득하고 말았다.

“이 산적한 일들이 처리되려면 대공비 전하께서 깨어나셔야 하는 거군요.”

“언제는 안 그런 적 있었습니까.”

심드렁한 아이반의 말에 엘런도 모린 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이 집 안은 언제부터인가 전적으로 대공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대공비 지상주의 적인 현 체제에 아주 만족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 *

다행히 릴리엔은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하룻밤을 꼬박 혹사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종잇장이나다름없는 릴리엔치고는 굉장히 빠른 회복 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어쨌든 다미언은 잠든 아내를 품어 주는 것도 좋았고 깨어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어느 쪽이라도 손해 보지 않는 기분으로 즐겁게 잠에서 깨어나는 릴리엔을 지켜보았다.

'으음…….’

머리가 깨어나며 눈꺼풀을 살살들추는 빛이 느껴지기 시작하는지, 릴리에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불찰이다. 커튼을 쳤어야 하는데.

그렇게 아차 하면서도 잠에서 깨어나려고 인상을 쓴 릴리에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이 웃음 짓고 말았다.

“정신이 드시는 모양이군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릴리에이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잠에서 깨려는 모양이었다.

다미언이 살살 릴리에의 미간을 문지르며 눈꺼풀 위에 손으로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다미언이 만들어 준 작고 부드러운 그늘 속에서 릴리에이 천천히 눈을 떴다.

"전하.”

잠이 덕지덕지 묻은 취한 목소리였다. 다미언은 천천히 손을 치웠다.

"…일어나셨어요?”

햇살이 막 일어나 명확하지 않은 시야를 더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그 덕일까. 다미언의 웃음기 어린 부드러운 목소리가 몸 전체를 간질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더 자도 괜찮은데.”

릴리엔을 대할 때 다미언의 말투는 원체 사람을 간지럽게 만들 정도로 사근사근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평소의 이상이었다.

'뭔가 불길한데.’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미언이 웃으면서 릴리엔을 보다 힘주어 안았다. 릴리엔은 힘없이 다미언이 하는 대로 그의품 깊숙한 곳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감각이 슬슬 돌아온다. 맨살이 닿는 느낌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미언에게는 절대 내색할 수 없었다.

'……어젯밤 있었던 일을 암시하면서 사람을 놀릴 게 뻔하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도 적당히 나누어 주었어야 하는 모든 친절과 다정함을 죄다 릴리엔에게 퍼붓는 남자였다. 인류애 항목이 아예 삭제된 대신 그만큼의 용량이 릴리엔에 대한 사랑으로 배정되.

었지만, 그도 가끔씩은 사랑하는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못 견디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게 문제였다.

“으음, 항상 침착하신 비전하께서 오늘따라 왜 눈을 안 맞춰 주시는 걸까요? 다미언은 알 수가 없네요.”

……아니, 사실 가끔이 아니라 꽤 자주 그러는 것 같았다. 릴리 엔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 남자가 정말.

“아침부터 사람을 놀리시는군요.”

“그야 비께선 웬만해선 놀림당해 주지 않으시니까요. 귀중한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요.”

“입술이 귀에서 너무 가까우십니다…….”

"간지러우신가요?"

다미언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스팀을 잘 친 우유처럼 촘촘하고, 교묘하게 엉겨 붙듯 농밀한 목소리였다. 절로 허리가 짜르르 떨리는 것 같아서 릴리엔은 결국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다미언이 기분 좋은 듯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어딘가 좀…… 선정적인 데가 있었다.

“오랜만에 성공했네요."

괜한 승부욕에 릴리엔은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기분이 좋으신 것 같군요.”

“그럼요. 간밤부터 사실 저는 좀…….”

결국 릴리에이 뒤로 돌아 수위를 넘으려는 다미언의 입을 막고 말았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잠깐이 입 좀 다무십시오.”

“아이앙.”

다미언이 릴리엔의 손바닥에서, 불만스럽게 웅얼거렸다. 릴리엔은 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어젯밤, 간밤, 지난밤, 뭐 아무튼 그런 화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걸 금지해야겠습니다.”

“싫은데요.”

자기 내킬 때만 순종적인 다미언이 냉큼 거절했다. 릴리엔은 기가 막혔다.

“전하!”

다미언이 킬킬 웃으며 릴리에에게 마구 덤벼들어 입을 맞췄다.

어떤 의도가 있다기보다 그저 신난 강아지처럼 사람을 정신없게 하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결국 릴리에도 어이가 없어서, 귀여워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언제나 다미언은 릴리엔의 눈치를 살폈고, 기술적으로 그어져 있는 선을 넘나드는 사람이었다.

릴리에이 싫은 기색을 하는 것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남자였는데, 이 날 아침 다미언은 훨씬 더 자유로웠다.

미움받는 것에 대한 강박을 조금 내려놓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다미언에 대한 얄미운 감정이 사라졌다. 릴리엔은 안쓰럽고 사랑스럽게 안겨 드는 남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취해, 다미언이 중얼거렸다.

"그때 막사에서도 비께서 이렇게 저를 쓰다듬어 주셨죠.”

“예?”

릴리엔은 조금 놀랐다.

“전하, 설마 기억이……….”

“그렇게 됐어요.”

다미언이 새치름하게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목 근처에 계속 피를 흘리던 상처도 어느새 말끔해져 있었다.

상처가 아문 걸 보니 쪼개진 영혼이 다시 복원된 모양이다. 그러면서 덤으로 기억도 얻게 된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덕분에 나는 평생 미친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겠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다미언이 릴리엔의 손을 쥐어들었다. 릴리엔은 손가락뼈마저 자기 성정을 나타내듯 곧고 예뻤다. 다미언은 기꺼이 경애의 의미를 담아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마 이전까지 하고 그다지 큰 차이는 나지 않을 테니까.”

“....."

“나는 사실 당신을 만난 그 순간부터 좀 미쳐 있었거든요."

이걸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좀 곤란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사랑이었다.

* * *

음악회가 워낙 엄청난 방식으로 엉망진창이 된 덕에 그날 대공비를 잠깐 따라다닌 어린아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하 감옥에서의 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습격의 배후부터 시작해서 산적한 바깥 세계의 일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대외적으로 지목되고 있는 라니스터 후작가 습격 사건의 배후는 지벨리 공작입니다.”

지벨리 공작은 블란쳇 공작가와 비슷한 케이스로 최근 눈에 띄는 급성장을 이룬 가문이었다.

새로운 블란쳇 공작인 에단 슈미트가 다시 황태자파로 전향하면서, 지벨리 공작은 황제 지지 파의 새로운 핵심으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둘째 형은?”

“방위 기사단에 수사를 일임하셨습니다.”

처벌은커녕 제대로 수사를 할 의지도 없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선제후에 대항하기 위해 블란쳇과 지벨리 공작을 필두로 세력을 키우는 일에 7년이나 공을 들였다. 이미 한 번 눈 뜨고 코 베이듯 블란쳇 공작을 잃은 황제가 지벨리 공작마저 쉽사리 잃으려 할 리가 없었다.

다미언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단정 지었다.

“조만간 듣도 보도 못한 웬 잔챙이의 목이 괜히 성벽에 걸리겠군.”

“뭐, 안타깝게도 그렇겠죠.”

사건의 결말은 쉽게 예상이 간 다만…… 다미언은 심상찮게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대체 왜?

애초에 지벨리 공작이 무슨 이유로 라니스터 후작가를 습격했단 말인가?

“지벨리 공작의 수하들이 후작가에서 태자 전하를 찾았다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공작은 내가 음악회에 참석한 걸로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마테오가 인상을 썼다. 그날 그는 저택에서 휴식을 취했다. 당일 참석을 취소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음악회 초대장에는 정중히 참석을 사양하는 답신을 보낸 참이었다.

조금만 자세히 알아보았다면 마테오의 불참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지벨리 공작에게 잘못된 정보를 줬기에 공작이 확인을 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믿어 버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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