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대체 누구인가.
아주 선명한 것 같으면서도 잡기 힘든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때까지 가만히 듣기만 하던 릴리 엔이 약연을 집어 들었다. 생각에 잠길 때의 습관이었다.
젖은 장작을 태우는 것 같은 향기가 연기와 함께 번졌다.
“어쩌면……..”
릴리에의 눈동자가 허공을 향해 예리하게 반짝였다.
다미언과 마테오 그리고 아이반은 멀뚱히 릴리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릴리엔은 쉽사리 추측을 꺼내 놓지 못하는 눈치였다. 약간 미간을 찌푸린 석연치 않은 표정에 다미언은 말할 수 없이 근질거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일단 참았다.
“비전하?”
아이반이 슬쩍 눈치를 보며 재촉하자, 릴리에이 답지 않게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건 그냥 단순히 제 느낌이 그럴 뿐이겠지만…… 저는 레이 첼 부인이 석연치 않습니다."
“……네?”
너무 엄청난 말이라 얼른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비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레이첼 부인이 지벨리 공작에게 거짓 정보를 줬다고?
화자가 릴리엔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마테오와 아이반은 황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추측이었다.
레이첼이 누군가. 그녀는 클로 드 치하의 일등 공신이었다.
이도에 선황의 서거 직후 클로 드의 곁에 나타난 그녀는 클로드를 잠재적 황제 시해범에서 황제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비전하, 이렇게 말씀드리기 참으로 송구합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야 레이첼 부인이 준 정보라면 지벨리 공작도 무조건 신뢰하기야 했겠지만, 그것만으로 의심하기에는 조금……"
“맞습니다. 레이첼 부인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습니다.”
릴리에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클로드 황제가 몰락하는 순간 레이첼 부인은 살 길을 잃게 되기 때문이죠.”
“맞습니다.”
다른 누구도, 심지어 클로드 본인마저도 그가 몰락할 경우 살아남을 방법이 한 가지쯤은 있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아니었다.
레이첼은 그동안 앞잡이로서 온갖 더러운 일에 앞장서서 손을 담갔다. 뿐만 아니라 정부로서 클로드 본인이 맞아야 할 여론의 화살까지 대신 맞아 왔다. 덕분에 거리에서 동냥을 하는 다섯살짜리도 멋모르고 황제의 정부를 욕하는 형편이었다.
만인의 적인 레이첼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클로드마저도 정쟁에서 지게 되면 모두가 미워하는 정부를 사람들에게 분풀이용 먹잇감으로 바치고 살아남는 길을 꾀할 테니까.
“죄송합니다만 비전하, 그 여자는 사치와 향락마저 철저히 계산해서 선보이는 여자입니다. 그런 짓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실수를 할 리도 없습니다.”
아이반은 분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책사로서 레이첼이 자신을 훨씬 능가함을 인정했다.
릴리에도 수긍했지만 석연찮은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때, 내내 침묵을 지키던 다미언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이반 경 같은 타당한 이유는 아닙니다만……"
“비께서 하시는 생각이라면 들어볼 가치가 있을 겁니다.”
릴리에에게 문자 그대로 정신이 나가 있는 다미언이었지만 이건 순전히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릴리엔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인 동시에 신뢰할 만한 파트너였다.
다미언은 오랜만에 순수하게 대공으로서 릴리엔의 말을 들어볼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미언의 신뢰에 힘입어, 릴리 엔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레이첼 부인이 그토록 악랄하고 철저한 여자라는데, 저는 사실 수도에 와서 각오한 만큼 당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가끔 그 사람을 잊고 지냈어요. 당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존재감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비전하께 암살자가 찾아온 적이…….”
“정말 저를 죽이고 싶었다면 그게 최선이었을까요? 제국군 대원수가 함께 사는 집에 암살자를 잠입시키는 게?”
안 그래도 그 암살 시도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릴리엔이 생각하기엔 그때 일도 이번 일도 모두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같은 사람이 벌인 짓 같았다.
“그 사람이 레이첼 부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말을 꺼내셨다는 자체가 숙모님께서는 그쪽으로 상당히 기울어 계시다는 뜻이 됩니다.”
“제가 직접 겪어 본 레이첼 부인은 그 악명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라면 그 전의 레이첼 부인과 비교해 보실 수도 있겠죠.”
“그건…….”
아이반은 머뭇거렸지만 확실히 릴리엔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번 대화의가 시작된 이후 레이첼 부인은 확실히 태만하게 굴었다. 고작해야 릴리에에게 에단 슈미트를 붙여 주려고 하고, 마리앤을 자극한 정도가 다이지 않은가.
최근 들어 클로드가 뜬금없는 시점에 놀라울 정도로 멍청하게 구는 것도 레이첼 부인이 일을 안 하기 때문이라면…… 놀랍도록 말이 된다.
다미언이 흐음 하며 중얼거렸다.
“최소한 그 여자가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건 사실인 것 같군요. 그렇다면 형에게 불리하게 행동해서 그 여자가 얻는 이득은 대체 뭘까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저도.”
잠시 침묵이 찾아온 끝에, 아이 반이 머리를 흔들며 화제를 전환했다.
“결론을 내리기엔 지금은 단서가 너무 부족합니다. 일단 이 주제에 관해서 최우선적으로 정보를 수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반 경의 말이 맞아요.”
릴리에도 인정했다. 마테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최소한 레이첼 부인이 태만하게 굴고 있는 게 사실이군요. 제 생각엔 그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네요.”
* * *
모두의 예상과 달리, 클로드는 지벨리 공작의 독단에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심드렁한 태도로 지벨리 공작을 불러 형식상의 문책을 했을 뿐이었다.
“폐하께서 대단히 격노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황제의 시종들이 수군거릴 정도였다.
“이 사람아, 경우가 다르지 않나.”
그중에서 베테랑이 혀를 차며 설명해 주었다.
“그때 모드술 자작은 황제 폐하의 재산이나 다름없는 암살자들을 둘이나 잃었어.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폐하께서 손해 보신 게 전혀 없지 않나.”
“아하.”
그의 말대로 이번 사건에서 클로드는 전혀 손해 보지 않았다.
지벨리 공작을 혐의에서 보호하는 것쯤이야 황제인 그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오히려 황제는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황태자파 귀족들의 요청을 무시하는 데서 오는 우월감을 즐기고 있었다.
일인지하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한 지벨리 공작의 몸 사리지 않는 과잉 충성 역시 그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요즘 들어서 폐하의 기분이 원체 좋으셨다는 거지.”
때마침 그때, 목소리를 낮춰 담소를 나누는 시종들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황제궁의 시종이 서둘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허, 험. 서미나 백작 부인을 뵙습니다.”
황후궁의 시녀장인 서미나 백작부인이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서미나 백작 부인이 눈짓하자, 뒤에 서 있던 시녀가 작은 상자 하나를 시종들에게 전달했다.
“황후께서 폐하께 전하는 선물입니다. 얼마 전에 보니 폐하께서 쓰시는 손수건이 많이 낡은 것이 신경이 쓰이셨다고 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마음을 쓰셨군요. 폐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시겠습니다.”
“그리고 황후께서 오늘 저녁 식사를 황후궁에서 함께 할 수 있을지 폐하께 여쭈라고 하셨습니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기다리고 계셨을 겁니다.”
반색하며 받아 드는 베테랑 시종의 뒤에서 다른 시종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최근 들어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덕분에 대화의 이후 하루도 심기가 편할 날이 없었던 황제도 무척 관대해졌다.
“폐하께서는 레이첼 부인을 보다. 총애하시는 줄 알았는데"
“에이, 그건 아니지. 애초에 폐하께서 황제가 되신 이유가 뭔가. 레이첼 부인도 다 황후 폐하를 닮아서…….”
“그만!”
한 번 물살을 타니 대화가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흐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듣자 하니 말을 너무 막 하는군! 다들 경솔하게 입을 놀렸다.
가는 가문의 망신거리가 된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베테랑 시종은 황급히 고개를 숙인 시종들을 엄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 경솔한 놈들을 나무라는 데 오랜 시간을 쓸 생각은 없었다.
'당장 폐하께 황후 폐하의 전언을 전해 드려야지!'
최근 들어 황제궁의 시종들에게는 한 가지 풍조가 퍼졌다.
황제의 격노에 레이첼 부인이 별다른 힘을 못 쓰기 시작하면서 시종들은 나쁜 소식 전달하기를 서로 미뤘다. 어쩌다 전달자가 되면 최대한 사실을 축소하고 은폐했다.
반면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경쟁을 일삼았다.
'이렇게 좋은 소식만 전하다 보면 현재 시종장을 제치는 것도 꿈만은 아냐.'
한달음에 달려가는 시종의 생각은 충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 * *
물론 클로드가 다시 찾아온 밀월 놀음에 빠져 모든 것을 등한 시한 건 아니었다.
괘씸했지만 선제후들은 아직 버릴 수 없는 패였다. 클로드는 황태자파에게 흔들린 선제후들의 마음을 다잡아 줄 묘수를 요구했고, 레이첼은 이렇게 답했다.
“폐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걸 저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선제후 회의의 주관자가 된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 다시금 상기시키란 말이었다.
끊임없이 아들들의 능력을 시험하고 비교했던 부황의 밑에서 자란 클로드에게 레이첼의 말은 아주 타당한 조언으로 들렸다.
클로드는 세 선제후에게 '그대들에게 축하 선물로 하사하고 싶었던 것'이라며 각기 귀한 보물을 하나씩 친필 서한과 함께 보냈다.
세 선제후는 제각기 황제에게 감사를 표했고, 클로드는 그걸로 다시 선제후들을 휘어잡았으리라 속단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릴리에의 이름으로 여섯 선제후들에게 만찬회 초대장이 보내졌다. 릴리엔은 초대장의 끝머리에 일부러 ‘헤멘린나의 레이디'라는 서명을 남겼다.
그렇게 하니 한 선제후의 부인 이 다른 선제후 부부를 초대해서 간단한 식사 모임을 갖는 형태가 갖춰졌다.
이 모임을 계획한 건 놀랍게도마테오였다.
“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구는구나.”
“슬슬 그럴 때도 됐죠.”
마테오의 서재 창가 쪽에 기대 서서, 다미언은 시치미를 뚝 떼고 선제후들에게서 온 답신을 체크하는 조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외형적으로는 이도엘을 닮은 아이가 이도엘은 절대 취하지 않을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게 새삼 눈에 들어왔다.
아이반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사춘기 시절의 양육 환경이 이렇게 중요하다며, 자라나는 새싹을 고이 기르지는 못할망정 보리 새순처럼 자근자근 짓밟은 다미언의 탓이라고 성토했을 것이고…….
헤멘린나 대제후, 그의 외할아버지가 이 자리에 살아 있었다면 이도에 그놈이 날 때부터 워낙 변종이었던 거라며 혀를 찼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루펜바인의 핏줄을 두고 개종자 운운한 것도 다미언의 외할아버지가 유일했다.
딱히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런 폭언을 듣고 있노라면 속이 시원해졌던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말없는 시선을 견디다 못한 소년이 툴툴거렸다. 다미언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받아쳤다.
“네가 되려는 황제는 뭘까 하는 생각?”
“그걸 왜 물어봐요?"
그렇게 되묻는 조카의 얼굴에는'이 사람 뭘 잘못 먹었나?' 라는 생각이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그냥 궁금하면 안 돼?"
“이제 와서요?”
마테오가 빈정거렸지만 뻔뻔한 다미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덜 뻔뻔한 마테오가 한숨을 쉬며 다미언이 원하는 대로 대답을 내놓았다.
“뭐가 됐든 선황 폐하만큼 관대하지는 않겠죠.”
다미언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픽 하는 웃음이 천천히 번졌다.
초연해지려고 했지만 소년은 욱하고 말았다.
“웃기신가 보죠?”
“아니, 그게 아냐.”
다미언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대답하는 꼴을 보니 네가 큰형보다는 오래 버티겠구나 싶어서 그래.”
그리고 그걸로 끝까지 이도엘과 닮지 않은 아들로 남을 테지.
죽은 이도에도 그걸 원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미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다. 잘해 봐라.”
“예…?"
다미언이 마테오에게 건네는, 아마도 처음일 응원이었지만….…
마테오의 표정은 격려를 받은 사람답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미친 건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조카의 생각이야, 다미언의 알 바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지지.
부진한 관계에서 남은 앙금을 일방적으로 털어 버린 다미언은 상쾌하게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