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40화 (140/155)

140화.

만찬회를 준비하면서, 릴리엔은다각도로 몸 상태에 관해 검사를 받았다.

마법과 의학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릴리엔과 다미언 사이를 연결한 링크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수명이 늘어났다는 거나 마찬가지인 선언이었지만 릴리엔의 얼굴은 왜인지 걱정스러워졌다.

“왜 그러시나요, 나의 비?"

반면 다미언은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적이 얼마나 있었나 싶을 정도로 충만한 상태였다.

사랑이라기에는 어딘지 돌아 버린 거대한 감정을 앓고 있는 다 미언에게는 릴리엔과 함께 죽을 수 있다는 게 몹시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반면 릴리엔은 다미언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지극히 정상인이었다.

"제가 얼마나 형편없이 약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제 목숨에 전하의 목숨도 함께 달렸다는 게 실감이 나니…….”

릴리엔은 두려웠다. 하지만 다 미언은 릴리엔의 그런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었다.

“전 비께서 안 계신 세상에 그다지 살아남고 싶지 않은걸요.”

익숙한 전개에 가신들이 체념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 자리를 빨리 떠나기 위해, 필리 경이 서둘러 나머지 결과를 설명했다.

“그 점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전하. 대공 전하와 연결이 존재하는 한 비전하께서는 전처럼 극도로 연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마법사인 필리 경은 감지할 수 있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다미언의 마력이 릴리에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논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조심성 많은 릴리엔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전하께 무슨 악영향이 있지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절대.”

필리 경이 힘주어 부정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는 다미언이 너무 특출했다.

“솔직히 말해 비전하께서 가져가시는 마력은 전하의 마력 총량에 비하면 바다에서 물 한 컵 퍼올리는 수준입니다. 티어 인피니티라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필리 경이 봤을 때 아마 누군가 릴리엔을 죽이려고 해 봤자 죽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즉시 다미언으로부터 링크를 통해 마력이 흘러 들어와 부상을 회복시키고 말 테니까.

“그러니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직은 좀 얼떨떨하군요.”

솔직히 그랬다. 릴리에이 실제로 느끼기에는 평소보다 약간 몸상태가 호전된 게 전부였다.

하지만…….

“함께 죽을 수 있어서 기뻐요, 비.”

다미언은 황홀한 표정으로 애교를 부렸다.

그가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걸보니, 신중한 릴리에도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좀, 뭐랄까. 고민하던 릴리 엔은 마침내 적절한 비유를 발견해 냈다.

'애첩에게 간도 쓸개도 다 빼주는 심정이 뭔지 알 것 같다.'

릴리엔은 요망한 애첩에게 홀리는 권력자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말았다. 남편인데다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를 두고 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생각이었지만

"애첩이니까 침실에 들여주실 거지요?”

어쨌든 당사자는 기뻐했다. 지극히 다미언다운 감상이었다.

* * *

이윽고 만찬회 당일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헤멘린나의 레이 디 릴리엔이 주최한 선제후 부부 동반 식사 모임이었다.

실제로도 대공 부부가 손님들을 마중 나왔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릴리엔은 수도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 데, 벌써부터 정평이 난 부드럽고 침착한 태도로 손님을 맞이했다.

제각기 속내가 어떻든 선제후들은 웃는 얼굴로 릴리엔의 마중을 받아들였다.

개중에서 호기심 많은 부인의 시선이 대공에게 머무르곤 했다.

만찬장에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긴 테이블 대신 둥근 원탁이 배치되어 있었다.

서로 상하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선제후들이 모인다는 점을 배려한 배치인 듯했다.

"음, 의외군요.”

“헤멘린나 선제후께서 황족이시니, 얼마든지 상석을 차지하셔도 될 텐데…….”

누려도 될 권리를 포기하고 최대한 서로 동등한 느낌을 주는 원탁을 배치한 게 자존심 높은 선제후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부인들이 서로 소곤거렸다.

“듣던 대로 대공비께서 보통내기가 아니시네요.”

“수완도 그렇지만 대공 전하께서 새 대공비에게 꽉 잡히셨다더니, 그것도 사실인 것 같죠?”

“그러게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모임이 다 뭐예요. 근데 초대해 주신 것도 모자라서 마중까지 나오시다니…….”

“비전하께서 하자는 대로 다 하신다더니 과연.”

젊은 부부의 상열지사는 서로 입장이 애매한 사람들끼리 분위기를 풀기에 딱이었다.

덕분에 아주 화기애애한 건 아니었지만, 밥 먹다 체할 일은 없을 정도로 웬만큼 분위기가 풀렸다.

그때쯤 마지막으로 도착한 이카난 선제후 부부와 함께 대공 부부가 만찬장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차례대로 네 사람이 원탁에 빈자리를 채웠는데도 한 자리가 남았다.

“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모두가 설마 한 순간, 마테오가 만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마테오는 금사로 파이핑을 넣은 흰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선황 이도엘이 공식 석상에서 가장 즐겨 입던 예복을 본뜬 것이었다.

노회한 선제후들은 직감했다.

'의도적인 장치로군.'

작은 태양과도 같았던 어린 시절과 다르게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인 기색을 은연중에 풍기던 황태자였다.

태자는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그 모임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도 선호하지 않았다. 주도적으로 황제가 되려 하지 않는 모습에 지지를 보류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이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옷을 입고, 가벼운 미소까지 지은 채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사하는 바는 한가지였다.

태자가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카스타나 선제후의 예리한 눈빛이 외손자를 훑어보았다. 그 옆에 앉은 부부 동반 모임에 혼자 참석한 유일한 사람인 - 세드릭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과연…… 이제야 결심이 서신 것인가.”

여동생으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새삼 놀라웠다.

아무래도 사전에 미리 부탁받은 대로 움직여야 할 모양이었다.

세드릭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테오가 당연한 듯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상석의 구분이 따로 없는 원탁이었지만 마테오가 앉으니 무게 중심이 그쪽으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다들 초대에 응해 주어서 고맙군.”

이 자리가 만약 마테오의 초대였다면 몇 사람은 응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황제의 목하에서 대공비의 초대에 응하는 건 '저울질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하지만 마테오의 초대에 응하는 건 단순한 저울질 이상의 의미를 가질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혀를 찼다.

'이제 보니 제법 교활한 면도 있으시군.’

당하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황제가 되기에 필요한 자질이었다.

“태자 전하께서 저희를 모아 놓고 하실 말씀이 있으실 줄 몰랐습니다.”

“하실 말씀이라고 할 것까지야.

그저 제국을 위해 불철주야하는 사람들에게 식사나 한번 대접하고 싶었을 뿐인데.”

다소 날카로운 말에도 너그럽고 교활하게 돌려주는 솜씨가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태자가 손짓했고, 시종들이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모린 부인의 지휘하에 대공가의 주방이 최선을 다한 요리들이었다.

“이 꽃도 먹는 거라고요?”

“세상에, 소스를 부었더니 색이 변했어요.”

감탄사가 터져 나오면서 경직됐던 분위기가 풀렸다.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선제후들 대신 부인들을 중심으로 안부 묻기 같은 가벼운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 자리에 혼자 참석.

하신 게 태자 전하만은 아니시네요.”

정치적인 대화는 안 된다. 민감한 사안을 건드리는 건 식사를 끝마친 이후여야 한다.

자연히 화살은 튜린 선제후, 그것도 그의 빈 옆자리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릴리엔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약혼녀라도 있으시지요. 저희 오라버니께서, 는 그조차 아니신지라.”

젊은 대공비가 자못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쉬자, 나이든 부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여동생을 이렇게까지 걱정시키면 쓰나요, 튜린 후.”

“오늘은 비전하를 위해 저희가 나서 보지요. 달리 마음에 두신 분도 없으신가요?”

그저 분위기 전환 삼아 놀린다.

기엔 부인들의 태도가 묘하게 열성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튜린 선제후라면 좀 속된 말로 표현해서 현재 결혼 시장에서 가장 큰 매물이었다.

'우리 집안 아이를 추천할 틈이 있다면 좋을 텐데.'

'꼭 그게 아니라도 저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의 의중에 대해 한두 마디라도 캐내면 재미있는 화젯거리가 될 테지.'

열광적인 시선을 모른 척하며 세드릭이 얌전히 대답했다.

“안 그래도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선대의 유지를 더 이상 외면 하기도 어려운지라.”

“......!"

선제후들이 체면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튜린 선제후가 결혼 상대를 물색할 작정이라고?'

기대한 것보다 더 흥미로운 대답이었다. 저 고고한 완벽주의자인 튜린 선제후, 세드릭 이슬라르는 딸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놓치고 싶지 않은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인물 출중해, 티어 하이에 속하는 천재적인 수준의 검술 실력에 이미 선제후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슬라르 집안은 대대로 유서 깊은 부자였고 여동생인 대공비는 살아 있는 전쟁신이나 다름없는 대공의 사랑을 듬뿍 받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나이는 다소 어리지만 수도의 사교계에서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종류의 입지와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라, 올케의 좋은 보호막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어디 그뿐인가.

'튜린 놈들은 고지식하기가 바위나 다름없는 꼴통이지만 그만큼 결혼상대로는 괜찮은 사람들이지..'

적어도 배우자를 두고 헛짓거리를 하는 족속들은 아니었다.

선제후들, 개중에서도 딸이 있는 티라나 선제후와 비슈케크 선제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세드릭의 푸른 눈동자가 여동생을 향했다. 여동생이 잘했다는 듯 부드러운 웃음을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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