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마침내 식사가 끝났다.
“입에 맞으셨는지는 모르겠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무척 즐거운 자리였어요."
마테오는 돌아가자마자 튜린 선제후의 배우자 물색 선언을 두고 바쁘게 움직일 사람들을 보며 다 안다는 듯 웃었다.
“……태자 전하께서 저희 선제후들을 이리 후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통적으로 황족과 선제후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국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아주 다양한 케이스가 존재했다.
선제후의 앞에 무릎을 꿇은 황족도 있었고, 황족에게 목숨을 구걸한 선제후도 있었다.
권력이라는 추산할 수 없는 힘을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수밖에 없는 사이.
황족이라면 누구나 선제후들을 찍어 누르고 싶어 했다.
“저희에게 잘 보이고 싶으신 겁니까?”
“루체른 선제후!”
지나친 말에 다른 선제후들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마테오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당연히 그대들에게 잘 보이고 싶지. 그대들은 황제의 치세를 판단하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태조께서 그대들에게 부여하신 권리를 존중하네.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 있다면 제국의 앞날도 밝겠지.”
모인 사람들 중 세 선제후의 안색이 미묘하게 굳었다.
‘태조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권리를 존중한다고?'
황족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대답이었다.
작금의 황제 클로드만 봐도 어떠한가. 처음에는 클로드가 제시 한 명예에 마음을 빼앗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노련한 세 선제후는 마테오의 말에 위화감을 자각하고 말았다.
‘우리가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선제후들에게는 황권을 제어할 권리가 성문법적으로 주어져 있었다.
그들은 이미 지고한 위치에 있었다. 이미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그들 셋을 마치 투견 다루듯 다루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황제의 그런 속내가 빤하게 보였다.
얼마 전 황제가 보낸 선물과 서신도 그랬다. 싸워서 이긴 자에게만 먹이를 던져 주겠다고 어르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새 황제는 그들을 확실하게 자기 밑에 복속시키고 사냥개처럼 다루고 싶어 했다.
사냥이 끝났을 때 사냥개의 말로는 자명한 것이었다.
더 높은 자리를 원하다가 선조대대로 가져온 명예를 잃을 수도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목 뒤로 성큼 다가온 칼날을 감지한 선제후들에게, 마테오가 너그러운 선황을 닮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쨌든 오늘 자리가 그대들에게 잘 보이려는 뜻으로 해석됐다니 아주 다행이네."
선제후들이 찾아왔을 때 문에 의자를 내던지는 걸로 대답한 황제.
소탈한 태도로 '잘 보이겠다.'며 만찬을 대접한 황태자.
클로드를 지지하는 세 선제후는 일제히 생각하고 말았다.
'태자 전하에게 가담하는 게 낫지 않을까?'
각자 돌아가는 길에, 흔들리는 세 선제후를 부인들이 열심히 설득했다.
“생각 잘 해야겠어요, 여보. 내가 보니 태자 전하께서 보통이 아니시네요.”
“쉽사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 않소.”
이건 간단히 소속을 바꾸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클로드를 지지하는 각 선제후는 이미 경제적으로도 황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마테오를 지지하는 순간 모든 협력 관계를 재설정해야 할 것이다. 사소하게는 양초를 구입하는 거래처까지도 바꿔야 할지 모른다.
부인이 현명하게 충고했다.
“귀찮은 일을 피하려다가 더 큰걸 잃을 수도 있어요, 여보.”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태자 편이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이득이 또 한 가지 있었다.
“잘하면 우리 딸아이를 튜린 선제후와 맺어 줄 수도 있잖아요.”
“어허, 아직 그건 장담할 수 없지 않소. 우리 천천히 생각을 해봅시다.”
아내를 진정시키면서도 내심 공감이 됐다. 튜린 선제후, 그 청년이라면 사실 그도 욕심이 나는 신랑감이었으니까.
“태자 전하와 대공 부부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니 잘 고민해 봅시다.”
“제 생각엔 이미 답은 정해졌어요.”
* * *
대공저에서 선제후들이 화합을 가지고 난 후, 며칠 뒤.
대공저에 낯익은 붉은 초대장이 하나 도착했다.
“레이첼 부인이 보낸 초대장이군요.”
제국의 여느 귀부인답게 릴리에은 침실에서 막 아침 식사를 마친 참이었다. 가운을 걸친 다미언이 신문과 기타 편지들을 가져와 식사를 마친 아내의 앞에 놔주었다.
릴리에이 개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붉은 초대장을 집어 들자, 다미언이 아내에게서 굳이 초대장을 넘겨받아 편지칼로 봉투를 뜯어 건네주었다.
“자요.”
“편지칼 정도의 날붙이는 저도 다룰 수 있어요, 전하."
“우리 비전하께서는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많으시지.”
다미언이 한숨을 쉬며 아내에게 엉겨 붙었다.
“비서가 되고 싶은데 쉽지는 않네요.”
애첩에서 비서까지. 이미 남편이면서도 되고 싶은 것이 참 많은 다미언이었다. 릴리엔은 어처, 구니가 없어 픽 웃었다.
“장래 희망이 참으로 소박하고도 구체적이시군요.”
“꿈이 큰 남자거든요.”
뻔뻔하게 대답하는데도 밉지 않고 사랑스러웠다. 절세 미모의 덕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아내가 되어 주세요.”
“네, 네.”
릴리엔이 어리광을 부리는 남편을 대충 어르며 안경을 썼다. 그리고 초대장을 펼쳤다.
“……자기 이름으로 대대적인 연회를 벌일 작정인가 보군요.”
“흠. 게으름을 피우는 데 벌써 질린 모양이죠?”
다미언이 협탁에 팔을 뻗어 약연을 가져와 릴리엔의 입가에 대주었다.
이미 이런 종류의 애첩 같은 중에 익숙해지고만 릴리엔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약연의 흰 부리를 물려는 찰나, 다미언이 휙 하고 손을 물렸다.
“먼저 상을 주셔야죠.”
"다미언.”
릴리엔은 조금 기가 막혔지만 다미언은 완강했다.
결국 릴리엔은 남편의 입술에 작게 입맞춤을 남겼다.
“……이리도 담백할 수가.”
“싫었어요?"
“설마요. 아쉬웠다는 뜻이죠.”
투덜거리면서도 다미언은 순순히 릴리엔의 입술에 약연을 물려 주었다.
릴리엔이 익숙하게 연기를 피워 올렸다. 다미언은 그런 아내의 옆모습을 몽롱하게 바라보다가지분지분 엉겨 붙었다.
릴리엔은 그런 어리광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굳이 남편을 떼어내지 않았다. 침실 밖에서 체통을 지키게 하는 것만으로도 서러워하며 불만을 토하는 남편이었다. 필요한 순간에 말을 잘 듣게 하려면 굳이 사사건건 조이는 것보다 이렇게 맘껏 풀어주는 순간도 있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잘 됐군요. 레이첼부인의 속내를 좀 알아볼 기회가 필요했는데. 파티에 참석하면 독대를 해 볼 수도 있겠네요."
“답장을 보내실 건가요?”
다미언이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릴리엔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 미언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왜 그러세요, 전하?”
“비의 친필 답장을 넘겨주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심이십니까, 전하?”
“농담은 아닌데요."
맙소사. 릴리엔은 약연을 피우고 있는데도 아파 오는 머리를 짚었다.
“애석하게도 이미 수많은 편지에 답장을 보냈습니다만."
“하지만 레이첼, 그 여자는 싫단 말이에요.”
레이첼 우드는 사람 마음을 빼앗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다미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왜 제가 답장을 보내는 데 문제가 됩니까?"
“애첩다운 면에서는 제가 그 여자에게 밀릴지도 모르거든요. 비께서 제가 그 여자에 비해 미숙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잖아요.”
대체 이게 무슨 논리인 건지 모르겠다. 릴리에이 겨우 한 대답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애초에 전하께서는 제 애첩이 아니라 남편이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다미언이 기분 좋게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미안하지만 릴리에은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이 남자가 기분이 좋아진 건지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다미언의 기분이 좋아진 틈을 타 릴리엔은 레이첼 부인에게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보낼 수 있었다.
* * *
레이첼 부인의 무도회에 대한 사교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알고 보니 레이첼은 갖가지 스캔들과 이슈를 몰고 다닐 뿐 아니라, 즐겁게 놀 수 있는 파티를 여는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레이첼의 파티는 점잖지 못하고, 약간 저속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흥을 돋우곤 했다. 황제의 애첩, 지킬 체면이 없다시피 한 사람만 제공할 수 있는 유흥에 수도의 귀족들은 열광했다.
“당연히 제가 비의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예. 거기에는 저도 이견이 없습니다만, 전하…….”
릴리에이 물끄러미 다미언을 바라보았다. 모린 부인도 그를 바라보았다.
“……? 비, 대체 왜 그렇게 저를……?”
다미언은 오랜만에 영문을 알수 없었다. 릴리에이 피우던 약연을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온 뒤로 전하께서 새로 옷을 맞추는 걸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어떤 식이었냐는 릴리에의 말에 모린 부인이 냉큼 대답했다.
“자주 옷을 맞추는 편은 아니셨습니다. 대공 전하의 예복보다는 얼굴이 자주 화제에 오르는 편이라…….”
“아하.”
뭘 입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절세미인인 탓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옷 맞추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셨습니다.”
아닌 척해도 다미언은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는 걸 질색했다.
결국 재단사들은 치수 정도만 재서 대충 옷을 만들어 올 수밖에 없었다. 다미언은 가봉 단계에도 협조적인 편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완성된 옷의 사이즈가 몸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모린 부인의 상세한 고자질에 다미언은 변명하려고 했지만 릴리엔이 막았다.
“일단 전하의 옷장을 좀 봐야겠습니다.”
“그건…….”
다미언이 아무리 애교 많은 절 세미인이어도 단출하게 비어 있는 옷장까지 변명할 수는 없었다. 릴리엔은 이렇게 평했다.
“여태까지 미모를 무기 삼아 대충하고 다니셨군요.”
정확히 사실이었다.
“모린 부인.”
“예, 비전하.”
“전하의 옷장을 대대적으로 손봐야겠습니다. 안네쥬 부인을 불러 주시겠어요?”
제일 싫어하는 옷 맞추기를 한다는 말에 다미언이 움찔했다.
하지만 릴리엔은 봐주지 않았다.
"다미언.”
릴리에의 부드러운 손길이 다미언의 뺨에 와 닿았다. 손길은 다정했고 말씨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단호했다.
“대공비의 애첩을 자청하실 요량이라면 옷차림에도 신경을 써주셔야죠. 제 체면이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비,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제가 뱉은 말에 발목을 잡힌 다 미언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머나. 혹시 상처받으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없었다.
“비께서 저를 고작 첩 취급하며 체면 운운하시니…….”
“또 제가 멋있었나요?”
"네…….”
정상에서 약간 빗겨나간 다미언의 취향은 여전히 릴리엔의 이해 범주 밖이었다. 하지만 릴리에도 이제 이해는 잘 안 돼도 다미언에게 맞춰 주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래요, 착하지요.”
릴리에이 부드럽게 다미언을 얼렀다.
“저는 전하께서 예쁜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답니다.”
다미언은 상온에 보관된 푸딩처럼 흐물흐물 말랑말랑해졌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복종할 수 밖에 없잖아요…….”
“눈치가 빠르셔서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