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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142화 (142/155)

142화.

* * *

그 뒤로 릴리엔은 예쁘게 굴었으니 상을 받아야겠다고 치덕치 덕 엉겨 붙는 다미언을 한참 달래 주어야 했다.

“안네쥬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30분 정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다미언은 슬그머니 도망가고 싶은 척을 했다.

“안 됩니다, 전하."

릴리에이 엄격한 얼굴로 그런 다미언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손이 잡혀 끌려가면서 계획적인다미언은 벙실벙실 웃었다.

“대공 전하와 비전하를 뵙습니다!”

“갑작스럽게 불렀는데도 이렇게 빨리 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오히려 대공 전하의 의복을 담당할 수 있게 되어 제가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안네쥬 부인의 눈빛에는 최고의 모델을 향한 재단사로서의 열망이 빛나고 있었다.

“비전하께서 저를 고르신 걸 후회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이 루펜바인 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최고의 미인이 되실 수 있도록……!”

“기대가 되네요.”

시녀들이 3면 거울이 놓인 작은 단상 위에 다미언을 세웠다. 릴리엔은 그 앞에 남편의 모습을 감상하기 좋게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전하께서는 사실 무얼 입어도 어울리는 편이시라, 제 생각에는 조금 과감한 색상에 도전해 봐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안네쥬 부인이 꺼내 온 건 살굿빛 기요문 실크였다.

병아리의 솜털 같은 노란색과 옅은 분홍빛이 감도는 천이었다.

보통은 데뷔하는 아가씨의 나풀나풀한 드레스를 만들 법한 옷감이었지만…….

“……어머나?”

릴리엔은 감탄하고 말았다. 다 미언의 턱 밑에 비단을 가져다 대자, 희고 고운 얼굴에 복숭앗빛 홍조가 곱게 드리워졌다.

조명을 켠 듯 안색이 화사해졌다. 그전까지도 미인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미인으로 보였다.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안네쥬 부인.”

릴리엔이 감탄하자 다미언도 썩즐거워졌다. 하지만 이왕 비에게 칭찬을 받는다면 안네쥬 부인의 안목보다 그의 미모가 돋보여야 했다.

다미언이 눈웃음을 치며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듯 물었다.

"…어울리나요?”

“네, 무척.”

다미언이 요사를 떠는 틈을 타 안네쥬 부인이 다른 천을 그 위로 겹쳤다.

“자, 이런 색으로 셔츠를 짓고 이런 크림색을 더하면…….”

우유로 만든 농후한 아이스크림같은 뽀얀 크림색 원단이 어우러졌다.

스무 살 언저리의 고운 아가씨들이나 입을 법한 색상 배합이었다. 잘못 쓰면 사람이 철없어 보일 정도로 발랄하고 생기 있는 색상인데, 다미언은 마치 태어날때부터 그 색상을 몸에 바르고 태어난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소화하고 있었다.

“부토니에로 생화 장식을 더해도 어울리실 거예요.”

릴리엔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이제까지도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미인이셨군요.”

칭찬을 듣자 다미언도 신이 났다. 릴리엔에게 잘 보이겠다는 일념으로 다미언이 전폭적인 협조를 보이자 안네쥬 부인도 신이 났다.

부인이 조수의 도움을 받아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를 권했고, 다미언은 뭘 가져오는 척척 소화해 냈다. 릴리엔은 자기 옷을 맞출 때와 딴판인 태도로, 안네쥬부인이 무엇을 권해도 곤란해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수락했다.

“비전하, 이 천으로 셔츠를 지어 올려도 참으로 괜찮지요?”

“네, 그것도 추가해 주세요.”

“이런 옷에는 사실 진주로 커프스를 만들어도 어울릴 거예요.

제가 아는 보석상에 따로 의뢰를 넣어 드려도……?”

“좋군요. 그렇게 해 주세요. 아, 오늘 청구서는 대공저가 아니라 제 앞으로 보내 주시겠어요?"

대공가의 예산이 아닌 대공비의사재로 결제하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비전하, 제 청구서는 조금…….”

안네쥬 부인이 난감해했다. 오늘 그녀도 너무 신이 나는 바람에 이것저것 신나게 권해 버렸는 데, 그러다 보니 어느새 소요될 옷감과 보석의 원가만 백작가의 한 분기 예산 규모가 되어 버렸다.

여기에 안네쥬 부인이 장인으로서 받는 비용까지 더해지면,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개인 사재로는 일시에 지불하기 어려운 금액일 터였다.

“비전하, 일단 선수금 정도만지불하시고 두 번 정도 나눠서 지불하시는 쪽을 권해 드리고 싶싶습니다. 비전하 정도의 신용이시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셔도"

“배려는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하지만 상대는 일반적인 황족이 아니라 릴리엔이었다.

워낙 소비 생활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소문은 나지 않았지만, 릴리엔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재산이 그냥 굴러 들어오는 전무후무한 혼전계약서의 당사자였다. 더해 팔불출 오라버니의 극성 덕에 알짜배기 섬의 조세권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간략하게 말해서 그냥 부자가 아니라 거부巨富였다.

결국 안네쥬 부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대공비가 놀라지 않길 바라며 모든 비용에 대한 청구서를 작성했다.

웬만한 사람은 다 놀라 자빠질 법한 청구서를 전달받은 릴리엔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물흐르듯 사인을 마쳤다. 뿐만 아니라…….

“모린 부인, 내 수표책을 가져 다줄래요?”

“예, 비전하.”

모린 부인이 수표책을 가져왔다. 안네쥬 부인은 모든 비용을 일시불로 처리한다는 대공비의 서명이 적힌 청구서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부인, 이걸 받으세요."

"예, 예에?”

부인이 엉거주춤 수표를 받았다. 거기에는…….

[당 수표를 소유한 안네쥬 부인에게 백 금화를 지급할 것을 요청함. 루펜바인의 대공비, 임페라 트릭스 레옌그라드 릴리에 마리 에스타드 이슬라르 루펜바인.]

백 금화라니! 4인 가족이 2년을 생활할 금액을 선뜻 가외로 지불하며 릴리에이 산뜻하게 웃었다.

“매번 우리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주셔서 감사해요. 적으나마 성의 표시로 생각해 주세요."

“비, 비전하, 이건…….”

손이 벌벌 떨렸다. 안네쥬 부인은 거절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는 릴리에의 강권을 듣고서야 수표를 받아 들었다.

다미언이 휘파람을 불었다.

“검소하신 비께서 이토록 통 크게 과소비를 하시게 만들다니, 아무래도 애첩 역할이 제 적성에 상당히 잘 맞는 모양이네요."

“전하께 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요.”

릴리엔은 상쾌한 표정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어울리셔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걸요.”

릴리엔의 말에 다미언이 히죽웃으며 한 술 더 떴다.

“예쁘게 입고 다닐 테니까, 앞으로도 더 예뻐해 주셔야 해요?"

대공저의 식솔들은 그런 다미언의 모습을 보며 개탄하기를 마지않았다.

“……세상에, 대공 전하께서 저렇게 협조적으로 나올 수도 있는 분이었군요.”

“잘된 일인데 왜 저는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옷 한 벌 맞추자고 했던 고생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모두들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 뒤로 또 얼마간 시간이 흘러, 레이첼의 파티가 열리는 당일 아침이 되었다.

“……전하, 전하?”

대답은 없었지만 릴리엔을 뒤에서 껴안은 팔에 힘이 꾹 들어갔다.

"그만 좀 일어나세요. 오늘은 할 일이 많다고 말씀드렸지요."

“그치만…….”

다미언이 칭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릴리에의 허리를 껴안았다. 양순한 척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릴리엔을 올려다보았다.

“비는 이것저것 꾸미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완벽하신데, 꼭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제 곁을 떠나셔야 하나요?”

“죄송하지만 오늘은 제 치장에 공을 들이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려는 게 아닙니다.”

“……네?”

릴리엔은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는 남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다 미언은 일단 좋긴 한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부스스일어나서…….

“앗.”

다시 릴리엔의 등이 베개를 짓눌렀다. 다미언이 릴리엔의 위에서 씩 웃고 있었다.

"…아침부터 절 건드리고 무사히 침대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한 건 아니죠?”

릴리엔은 그런 순진한 기대를 하셨으면 현실을 알려 드리는 게 인지상정이라며 조잘거리는 남편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불시에 코를 꼬집어 주었다.

"아야.”

알면서 당해 준 다미언이 무성의하게 놀란 척을 했다. 릴리엔이 타일렀다.

“다른 때 같으면 모를까 오늘은 일정이 많습니다, 전하. 장난을 받아 주기에는 시간이 없을 뿐더러 제 체력을 안배하는 데도 지대한 문제가 생길 것 같네요."

“냉정하셔라…….”

“언제는 제가 냉정해서 좋다고 하셨지요?”

그만하고 비키라는 뜻으로 릴리 엔이 손짓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순순히 물러나면서도 다미언이 투덜거렸다.

“잘 모르시나 본데 그건 비께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담백하고 냉정한데 저한테는 그렇지 않아야 좋은 거예요.”

한결같고 올곧은 취향을 가진다미언이었다. 릴리에에게는 사랑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는 좀 힘든 남자였다.

“……제가 잘 이해가 안 가시죠?”

눈치가 귀신같은 다미언이 지적했다. 릴리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솔직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잘 이해되지 않는 점까지 포함해서 이 남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해할 순 없어도 한없이 너그러워질 수는 있었다.

“릴리에…….”

아침나절부터 촉촉하게 감동을 받은 다미언이 침대 밖에 서 있는 릴리엔을 껴안으러 일어났다.

릴리엔은 허리를 안긴 채로도 열심히 욕실로 향했다.

두 사람이 효율 떨어지는 펭귄걸음으로 도착한 욕실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전하."

“늦어서 미안해요. 이제 시작할까요?”

릴리엔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이 다소곳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비의 치장을 돕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건가……?'

그렇다고 치기엔 시종들까지 대기하고 있는 데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눈치 빠른 다미언은 대번 알 수 있었다.

'뭐지, 내가 불청객이 아니라 주인공인 것 같은 이 느낌은………?'

전쟁터에서 종이 한 장 차이로 적군의 화살을 피하던 예감은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릴리엔이 한쪽에 놓여 있는 욕조를 가리켰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새하얀 우유가 가득 차 있었다.

릴리엔이 웃으며 지시했다.

“그럼 전하, 시간이 없으니 이만 들어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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