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43화 (143/155)

143화.

"네?”

이게 대체 무슨 일?

영문을 몰라 하는 다미언의 얼빠진 얼굴을 보며 릴리엔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히 자상한 릴리엔은 오래 놀리지 않고 남편에게 일의 전말을 설명해 주었다.

안네쥬 부인을 불러 다미언의 치장에 막대한 거금을 투자한 일을 계기로, 릴리엔은 눈이 뜨여버렸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다미언이 미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워낙 자기 미모를 잘 써먹는 남자인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미언의 미인계는 사실 얼굴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안네쥬 부인과의 일로 릴리엔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 다미언은 자기를 치장하는 데 도통 관심이 없다. 왜냐면 치장하지 않아도 잘났으니까.

둘, 자기한테 어울리는 옷을 입은 다미언은 아주 예쁠 거다.

"그러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치장한 제 모습이 보고 싶다?”

“네.”

"흐음……."

다미언의 입가에 씩 미소가 번졌다.

“제 얼굴에 별로 관심을 안 두시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요.”

릴리엔이 태연하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기울인 다미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렇게나 예쁜데.”

다미언은 결국 파하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릴리엔이 보고 싶다고 말한 순간부터 정해져 있던 결말이었다.

* * *

어릴 적에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다미언은 누군가의 손을 타는 일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다.

맞춤복을 짓는 것도 싫었다. 머리 손질을 받는 것도 귀찮았다.

원체도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에, 시중을 받는 게 버릇이 되어 있지 않은 탓이었다.

릴리에도 눈치챈 사실을 다미언만 몰랐다. 다미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짜증나고 번잡한 마음을 '귀찮다'고 표현할 줄밖에 몰랐다.

물론 다미언이 싫다는 걸 무리하게 강요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애초에 싫어한다 기보다 싫어할 수밖에 없게 된 거니까.'

잘 차려입은 다미언의 모습이 궁금한 것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는 한 번쯤 다미언의 안 좋은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덧칠해 주고 싶었다.

……라는 릴리엔의 순수한 호의를 아랫사람들은 열심히 부추겼다.

“이왕 하시는 거 전에 비전하께서도 해 보신 우유 목욕도 하면 좋으실 것 같아요.”

“향유로 마사지도 받으시고요.”

“그럼요. 피로가 확 풀리실 거예요.”

굳이 그런 관리를 안 받아도 반짝반짝 윤이 나는데다가 굳이 풀어 줄 만큼 피로가 쌓이지도 않는 다미언이었지만…….

'그동안 제대로 된 옷 한 벌 마련하는 것도 싫다며 내빼던 사람이…….’

'비전하 한 말씀에 저렇게 태도를 바꿔?’

어디 한 번 당해 보라지. 모두가 심술궂게 생각했다. 이것이 다미언이 처음 무도회에 참석하는 아가씨들이나 받을 법한 풀코스 관리를 받게 된 전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미언은 쉽게 골탕 먹어 주지 않았다. 도망쳤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모든 귀찮은 과정을 순순히 당해 주었다.

성가시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비께서 시킨 일을 잘 참고 있는 착한 남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즐거웠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정이 성가신 만큼 더 기특한 남편이 되고 있는 것 같아 뿌듯했다.

아내에게 반쯤 돌아 있는 다미언 루펜바인이나 할 법한 미친 발상이었다.

그렇게 세 시간쯤 시간이 흘러…….

"…어때요?”

햇빛 아래서 갓 피어난 분홍빛 장미 같은 옷감이 다미언의 널찍한 어깨와 단단하게 선이 잡힌 몸판을 흐르듯 감싸고 있었다.

적당히 지은 옷이 아니라 몇 차례 가봉을 거친 옷은 주름 하나, 바느질 한 땀 다미언에게 어울리지 않게 들어간 곳이 없었다. 어떠냐고 묻는 자체가 기만인 수준이었다.

“비전하.”

다미언의 시중을 들던 시종 중 하나가 눈치 빠르게 상자 하나를 대령했다. 그곳에는 릴리에이 다 미언을 위해 제작을 맡긴 진주커프스가 들어 있었다.

동그란 진주가 얇은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커프스였다. 섬세하게 짠 금빛 체인에 물방울 같은 자그마한 진주가 대롱거리는 게, 웬만한 남자들은 감히 시도 할 생각조차 못 할 화려한 디자 인이었다.

릴리엔이 커프스를 집어 들자 자리에 앉은 다미언이 보스스 웃으면서 손목을 내밀었다. 릴리엔이 다가가서 커프스를 채우기 시, 작했다. 향유 마사지를 순순히 받았다더니, 다미언에게서는 복숭아 향기가 폴폴 풍기고 있었다.

“어떻게, 견딜 만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럭저럭 즐거웠습니다.”

다미언은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릴리엔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었다.

“나쁘지 않으셨다면 다음에도 이렇게 놀아 볼까요?”

소맷자락에서 달랑거리는 커프스를 흔들어 보던 다미언이 '이것 봐라?'하는 투로 눈을 가늘게 하고 웃었다.

"상관없지만, 이다음부터는 비께 대가를 받을 건데. 지불하시겠다면야 저는 거절하지 않을 게요.”

날름 웃는 얼굴이 얄미웠지만 이제까지 귀찮은 과정을 잘 참아 준 게 가상하다 싶어 릴리엔은 너그럽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사사건건 속셈이 음흉한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이 정도 가지고 음흉하다 하시면 안 되죠. 아시잖아요?”

다미언의 동공이 약간 확장되면서 눈빛이 깊어졌다. 한 발짝만 움직여도 휙 달려들 준비가 된 맹수 같았다.

“……전 지금 되게 귀엽게 굴었거든요, 제 기준에서.”

결국 릴리엔이 백기를 들었다.

“전하, 죄송하지만 오늘은 일정이 있어요.”

“아쉽게도 그랬죠.”

양 손목에 커프스가 다 채워진걸 확인한 다미언이 쓱 하고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릴리엔을 올려다보던 남자가 순식간에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은 오늘 밤에 더 많을 테니까요. 비께서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덜 타시는 시간에 뵙지요.”

“전하…….”

한숨을 쉬는 릴리엔에게 다미언이 킬킬 웃으며 돌아보란 손짓을 했다. 또 무슨 수작인가 싶었지만 일단 릴리엔은 순순히 돌아섰다. 거울이 보였다.

“괜찮은 남편이라면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야겠죠.”

그렇게 말하면서 다미언이 릴리 엔의 목에 무언가를 걸어 주었다.

“이건……."

목걸이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세공품에 가까운 가는 금 사슬에 알이 굵은 물방울 형태의 진주가 고르게 매달려 있었다. 누가 봐도 다미언의 커프스와 한 쌍인 물건이었지만, 커프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의 물건이었다.

다미언의 손가락이 릴리엔의 목뒤에서 섬세하게 움직여 고리 장치를 채웠다.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어울려요.”

“대체 언제 이런 걸 준비하셨어요?”

“그게 바로 제 기특한 점이죠.”

다미언이 일부러 우쭐하며 콧대를 세우자 릴리에도 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이만 가 보실까요.”

***

그날 수도에는 꽤 많은 눈이 내렸다.

적설량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눈이 내리면서 길은 정체되고 있었다. 대공가의 마차는 정체와 관계없이 순항할 수 있었지만, 신분과 재력이 그에 못 미치는 다른 사람들은 꼼짝 없이 마차 안에서 떨며 눈 구경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떨고 있던 사람들을 맞이한 무도회장은 삭막한 겨울도, 화려한 실내도 아니었다.

드넓은 연회장 전체가 무성한 식물로 정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바닥까지 보드라운 잔디에 뒤덮여 있었다. 벽, 과 천장은 덩굴식물을 꾸며 놓아온실이라기보다 숲 속 정원처럼 보였다.

“세상에, 이쪽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요.”

“이쪽에 있는 건 크리스털 분수인가요?”

투명한 크리스털로 만든 분수에서 물이 흘렀다. 물이 가득 고인 수반에는 꽃잎이 떠 있었다.

어디서 떨어진 꽃잎일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주변이 온통 계절 상관없이 곱게 피어난 꽃투성이였으니까.

사람들은 오랜만에 정치적 입장도 잊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계절에 이렇게 싱그러운 꽃향기를 맡게 될 줄이야…….”

“너무 아름답네요."

뭐라고 한마디 트집을 잡으려던 사람들마저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여길 꾸미려고 돈을 얼마나 썼을까요? 사치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애써 트집을 잡아 보아도 “덕분에 우리는 돈 한 푼 안들이고 좋은 구경을 하게 됐으니까 된 거 아니냐.”는 대다수의 중론에 묻혀 버리기 일쑤였다.

바로 그때.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

입구에 서 있는 시종이 외쳤다.

삼삼오오 어울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입구 쪽으로 향했다.

“세상에, 대공께서 오셨나 봐요!”

“비전하와 같이 오셨을까요?”

“어서 가요!”

“자, 잠깐! 밀지 마요!"

야단법석이 일었다. 시종이 울림통에 힘을 주고 나머지 이름을 외쳤다.

입구에 늘어진 연한 보랏빛 등나무 꽃들 사이로 대공 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걸음 정도 먼저 나타난 대공은 외투는 어디 팔아 치웠는지 오묘한 살굿빛 셔츠 차림이었다.

달랑 셔츠 차림이라니. 격식에도 어긋날뿐더러 색상 자체도 엄청나게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그 파격적인 차림새가 세상 누구에게보다 잘 어울린다는 게 문제였다.

해사하고 싱그러운 대공의 팔을 붙잡고, 대공비가 반걸음 정도 뒤에서 나타났다. 어디다 팔아 치웠나 싶었던 외투가 대공비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걸 보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과연'

'대공께서 비전하께 죽고 못 사신다더니…….’

매번 확인하고는 있지만 매번 놀라운 광경이었다.

“비전하!”

가장 먼저 부부를 맞이한 건 대공비의 친위대 격으로 소문난 어린 아가씨들이었다. 처음에는 은방울꽃 소로리티의 아가씨들 뿐이었지만, 이제는 은방울꽃소로리티는 아니지만 릴리엔을 따르게 된 다른 아가씨들의 얼굴도 제법 보였다.

마치 주인을 따르는 아기 양떼같았다.

“비전하께서 참석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도 왔어요!"

“오늘도 비전하와 단체 무곡을 출 수 있을까요?”

숲 속 작은 공터처럼 춤출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가씨들은 마침 첫 곡 바로 다음이 단체 무곡이라며 졸라대기 시작했다.

“오늘도 저희와 첫 춤을 춰 주실 거죠?”

당돌하고 귀여운 제안에 릴리엔은 웃었다. 아가씨들의 파트너들도 일제히 “오늘도 이렇게 되는군요.” 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오늘은 나중에. 내 첫 춤은 선약이 되어 있단다.”

“그런…….”

릴리에이 다미언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잘했냐고 묻는 듯한 미소에 다미언이 행복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었지만……. 그때 마침 릴리엔에게 소로리티 동기들이 다가왔다. 릴리엔이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는 틈을 타 다미언이 릴리에에게 몰려든 어린 아가씨들을 둘러보았다.

아내를 대할 때의 사르르 녹아내리던 복숭앗빛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서늘한 눈빛이 아가씨들을 공격적으로 훑었다.

전장을 제패한 대원수의 눈빛에 평범한 아가씨들은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며 다미언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듯 픽,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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