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아가씨들은 일제히 충격을 받았다.
'웃었어?’
'지금 비웃은 거지?'
왠지 모르게 전에 라니스터 저택에서 만났던 건방진 꼬마가 생각나는 미소였다. 하지만 그땐 아이였고, 다미언은 성인 남성이었다.
비전하를 두고 좀 얄밉게 굴었다지만, 설마하니 다 큰 사내가 어린 소녀인 자기들을 진지하게 연적처럼 취급하고 이기려 들 줄 몰랐다. 불시에 당한 터로 패배감은 더 컸다. 아가씨들은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응?”
기 싸움이 한창 진행되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릴리에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다미언이 잽싸게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추며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
지켜보고 있던 신사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전하께서 완전히 이기셨네요.”
절로 존경심이 일었지만 따라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신사들은 다미언의 미모와 상대가 어린 아가씨들이라고 봐주지 않는 비정함을 겸허히 인정했다. 그리고 분한 마음에 부르르 떨며 억울해 하는 각자의 파트너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 * *
다미언과 첫 춤을 추고 나자, 릴리엔은 묘하게 전투적인 태도로 모여든 어린 아가씨들과 단체무곡에 어울려야 했다.
다미언은 서운해하지 않고 간만에 너그러운 태도로 릴리엔을 보내 주었다. 승자의 여유에 아가씨들은 치를 떨었지만 어쨌든 릴리엔은 몰랐다.
단체 무곡이 끝나고 릴리엔은 레몬에이드를 마시자는 아가씨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처음 보는 시녀 한 명이 릴리엔에게 다가왔다.
“강녕하십니까, 대공비 전하."
시녀가 무릎을 가볍게 굽히더니 전했다.
“제 주인께서 비전하를 잠시 뵙기를 청하십니다.”
“.......”
릴리엔은 잠시 그 시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주인께서는 어디 계시지?”
“펠라드나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수수께끼 같은 대답에 아가씨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릴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펠라드나라면 록웰 백작의 성 이름이었다. 아가씨들은 모르겠지만 릴리엔은 이 제국 귀족들의 이름, 작위, 그들이 다스리는 성과 땅의 이름을 거의 대부분 기억해 두고 있었다.
“앞장서게.”
“관대하신 허락에 감사드립니다. 이리로…….”
릴리엔은 잠자코 시녀의 안내를 따랐다. 시녀는 릴리엔을 멀지 않은 발코니로 안내했다.
회장이 워낙 숲처럼 꾸며져 있었기 때문에, 발코니는 일부러 숨겨 둔 비밀 장소인 양 고요했다.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농익은 미인이 그곳에서 릴리엔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페라트릭스 레옌그라드, 제국의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이 미천한 자가 전하의 존안을 뵈오니 광영이 한이 없사옵니다. 존체 만안하시며 세세토록 영광을 누리시기를.”
레이첼 부인이었다.
“일어나게.”
“예.”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지극히 예를 차린 레이첼 부인이 일어섰다.
릴리엔은 자연스러운 태도로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레이첼 부인도 다소곳하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부인이 나를 보고자 할 줄은 몰랐네만.”
“그리 생각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세간에 이 레이첼은 비전하의 정적을 자처하는 걸로 되어 있으니까요.”
릴리엔은 문득 위화감을 차렸다. 레이첼 부인의 말투가 색다르게 느껴져서였다.
‘일전에는 좀 더……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말투였는데.’
콧소리 섞인 아양 떠는 느낌이 완전히 사라진 깔끔한 말투가 낯설었다. 아무래도 이게 정부로서가 아닌 레이첼의 본래 말투인 듯했다.
'왜 그런 본래 모습을 내게 드러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릴리엔은 잠시 시간을 가늠했다. 독대를 이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듯했다. 무곡이 끝났으니 다미언이 곧 그녀를 찾을 것이고, 같이 있었던 아가씨들이 릴리엔이 펠라드나 운운하는 정체불명의 시녀를 따라서 어느 방향으로 갔다고 알려 줄 테니.
'길어야 10분인가.'
하지만 레이첼이 굳이 단둘뿐인 만남을 청했다는 건 단둘일 때만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일 터였다.
최대한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되어 있다는 말은 실상그대가 내 정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레이첼이 붉게 칠한 입술로 빙그레 웃었다. 정답이라는 듯.
“비전하께서는 영명하십니다.”
릴리엔의 푸른 눈이 드물게 웃음기 없이 부인을 주시했다. 사람을 편하게 하는 시선은 아니었지만 레이첼은 웃음을 터트렸다.
“비전하를 처음 뵌 순간부터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상황 폐하를 닮으셨습니다.”
그 말이 왜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가.
“상황 폐하께서도 다정하셨지만 마냥 그리하지는 않으셨지요. 오늘 비전하의 얼굴을 뵈오니 생전의 그분을 뵙는 듯 함함합니다.”
릴리엔은 가만히 레이첼의 눈빛을 들여다보았다.
투명하고도 깊은 갈색 눈동자였다. 하지만 누누이 들어왔던 사람 혼을 빼놓는 색기나 정신없는 요사스러움 같은 건 없었다.
눈 밑에 드리운 그늘에 주름이져 있었다. 릴리엔은 문득 눈앞의 여자가 웃고는 있지만 굉장히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이에 비해 현격한 동안이었지만 나이 이상의 피로가 엿보였다.
그 순간 릴리엔은 근거 없는 직감의 퍼즐이 어떤 그림을 그리며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섣불리 확신할 수는 없었다. 흔들리지 않는 릴리엔에게 레이첼이 속삭였다.
“흔히 적의 적은 나의 편이라고 들 하지요.”
“무지한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논증 오류가 아닌가.”
적의 적은 그저 적의 적일 뿐이다. 냉정한 대답이었는데도 릴리 엔을 바라보는 레이첼의 눈빛에 보다 흐뭇한 빛이 듬뿍 담겼다.
“역시 영명하십니다.”
“고작 말 몇 마디로 비전하의 총기를 흐려 보려 한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비전하께 제 입장을 증명할 만한 것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릴리에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이 태연하게 털어놓았다.
"아라티네 황후 폐하께서 임신하셨습니다.”
"…!”
“황손의 성별은 아직 모르나 태자 전하께는 충분한 위협이 되실 겁니다. 클로드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 더 이상 일을 질질 끌지 않고 결착을 보려 할 테니까요.”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흔들리는 릴리엔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레이첼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지금 당장은 믿기 힘드시겠지요. 허나 제 말이 사실로 판명되거든 저를 위해서 잠시 시간을 내고 싶으실 겁니다. 그때를 위해 그대의 귀가 있는 곳을 알아야겠군.”
“산드리아 거리에 있는 첫 번째 술집의 주인에게 말을 전하면 이 레이첼이 곧장 듣는답니다.”
레이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리고 발코니를 감싼 꽃넝쿨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붉은 꽃 한 송이를 뽑아냈다.
작약처럼 화려한 겹꽃잎이 벌어져 있었다. 만개한 덕분에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황금빛 꽃술이 거의 다 드러나 보였다.
활짝 핀 모습이 오늘까지는 가장 아름답지만 내일부터는 당장 시들기 시작할 것 같았다.
“…… 허락하신다면 오늘 만남의 증거로 이 꽃 한 송이를 비전하께 바치고 싶습니다.”
레이첼을 닮은 꽃이었다.
* * *
돌아오는 길에 릴리엔은 다미언에게 레이첼을 만난 일을 숨김없이 고했다.
다미언은 끄응 하고 미간을 문질렀다. 우습게 질투 운운하려나 싶었지만 뜻밖에 그 얼굴이 진지.
했다.
“우선 그런 자리에는 저를 데려가셨어야 합니다.”
아차.
“스스로의 안전에 소홀하게 굴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드렸건만……."
장난기 없는 다미언의 얼굴에 드물게 진심 어린 근심이 떠올랐다. 릴리엔은 재빨리 사과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전하. 죄송…….”
“죄송합니다만 사과는 정답이 아닙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릴리엔이 착하고 얌전하게 냉큼 대답했다. 다미언은 멋지고 유능하지만 제 몸이 유리나 다름없다.
는 사실을 종종 잊는 아내를 탐탁찮게 바라보았다.
릴리엔이 눈치를 보다 덧붙였다.
“그래도 레이첼 부인이 주겠다.
는 꽃은 안 받아왔습니다."
다미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그걸 잘했다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어라. 릴리엔은 조금 놀랐다.
“그 말씀 어쩐지 평소의 저를 아주 닮은 말투시네요."
“비께서도 제게 옮으셨듯이 저도 비께 옮은 모양이죠.”
“아하…….”
신경질적인 대꾸에도 이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의 유순한 얼굴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전하?”
"안되겠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쉽게 용서 못 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다미언이 릴리엔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앞으로 과보호 형에 처할 테니 그럴 줄로 아세요.”
“하지만…….…비께서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시면 하지만 같은 말씀을 하시면 안 되겠죠?”
릴리에에게 살랑살랑 녹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혀 양보가 없는 다미언이었다.
“지은 죄가 있으시니 불만 없으시리라 믿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