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45화 (145/155)

145화.

* * *

두 사람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긴급 밀실 회의가 벌어졌다.

“황후 폐하께서 결국 회임을 하셨다고요……. 몸도 약하신 분이.”

아이반이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마테오의 얼굴에는 딱히 이렇다.

할 표정은 없었으나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아주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우리도 경우의 수에 넣고 있었으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눈치를 보던 아이반이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레이첼 부인의 말도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클로드의 편이 아니라니…….”

"레이첼 부인의 전남편이 누구였죠?”

고민하던 릴리엔이 묻자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자는 전혀 신경 쓸 자가 못됩니다. 부인을 정부로 바치고 재혼한 여자에게서도 폭력으로 고발당한 별 볼 일 없는 불한당이니까요. 도박으로 신세를 망친 뒤 지금은 아무도 행방을 모릅니다.”

“배후도 없고, 동기도 묘연하군.”

다미언이 중얼거렸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일단 레이첼 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책이 필요합니다.”

클로드의 치세를 단번에 끝장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7인 선제후의 만장일치 표결이었다.

아라티네 황후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알려질 경우, 정국이 혼란스러워질 뿐 아니라…….

“전하의 외할아버님이신 카스타나 선제후께서 그쪽으로 기울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오래도록 줄다리기를 해 온 카스타나 선제후였다.

황제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만장일치 표가 필요했다. 일곱 중에서 딱 한 사람이라도 빠진다면 이제 막 구축되고 있는 연약한 연합 자체가 흔들릴 공산이 컸다.

“그나마 사전에 미리 알게 되어 대비책이라도 강구해 볼 수 있는 게 다행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대비책이랄 게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외할아버님을 제가 따로 만나 뵙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 외에 다른 좋은 수가 생각난다면 그때 의논하기로 하죠.”

“그게 제일 좋겠습니다. 오늘은 시간도 많이 늦었고요."

늦은 밤 긴급회의는 일단 그렇게 파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대공저에 뜻밖의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서미나 백작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태자 전하.”

정확히는 대공저가 아니라 마테오를 찾아온 손님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아들이신 전하를 뵙지 못해 그리운 마음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전하를 뵙길 희망하고 계십니다.”

“……이토록 오랜만에?"

마테오의 입술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년의 마음에 서서히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운 마음은 있으셨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셨……."

“그만. 그대가 전하는 말은 아니 듣느니만 못하다.”

황후궁 시녀장의 사설을 냉정하게 끊은 마테오는 마른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보고 싶다고? 이 시점에?

마테오는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는 사실을 배웠다.

만약 그가 아라티네 황후의 임신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이전갈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니까.

죄가 많아서 아들을 볼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 그래도 보고 싶어는 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구역질이 나왔다.

“그래, 좋다. 그래, 좋아.”

".......”

“어머니께서 원하신다니 가 보아야 아들 된 도리겠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직접 만나서 이 믿을 수 없는 지경이 사실인지 확인해야겠다.

“지금 당장 가지.”

* * *

“마테오!”

최근 들어 얼굴이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 아라티네가 아들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했다.

하지만 반가워하면서도 얼굴에는 묘한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조금 몽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마테오는 냉엄한 눈빛으로 어머니가 앉은 안락의자와 무릎에 덮은 두툼한 담요를 바라보았다.

"네 얼굴을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이리 가까이 와 주겠니?”

소년은 말없이 어머니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어루만지게 둘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라티네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들에게 다가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들에게서 느껴지는 냉기에 약간 겁을 먹은 아라티네는 겨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그렇습니다.”

“다들 건강히 잘 지내니?”

“그런 편입니다.”

무뚝뚝한 대꾸에 아라티네는 서 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감히 그걸 지적하지는 못했다.

최소한의 염치는 남아 있는 모양이지. 마테오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그래, 일단 내 손님으로 온 데다. 네가 장성했으니……. 백작부인, 태자에게 내 술을 한 잔 대접하게.”

“예?”

서미나 백작 부인이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아라티네는 좋아하는 술을 아들에게 맛보여 주고 싶었다.

결국 백작 부인이 술병을 가져와 마테오 앞에 잔을 놓고 조심스럽게 따라 주었다. 아라티네에게는 주지 않았다.

아라티네가 아쉬운 듯 말했다.

"네 외할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특별히 보내 주시는 술이란다.

심신을 안정하라며 보내 주신 것인데… 지금 나는 마시지 못하니 네가 대신 마셔 주렴.”

“왜요?”

마테오가 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날카롭게 빈정거렸다.

“혹시 애라도 배셨습니까?”

마테오!”

아라티네가 경악했다. 마테오는 헛웃음을 지었다.

“맙소사, 사실이셨군요."

“데, 테오. 그런 게 아니야. 사실인 건 마, 맞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안 된다고요?"

기가 찬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배신하고 그 동생과 통정한 걸로도 모자라서 황후까지 되셨고, 이제는 부정한 아이까지 배태하셨다는데.

제가 이 자리에서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잘하셨다고 웃으면서 박수라도 쳐 드려야 합니까?”

“마테오……!”

“혹시 그 아이가 제 동생이니 잘 부탁한다는 말씀이라도 하고 싶으셨습니까?”

아라티네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 혼탁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테오는 고개를 저었다.

“정신없는 분인 줄은 알았습니다만 이토록 제정신이 아니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머니께서 모르시는 만큼 제가 수치스럽군요."

살을 후벼 파는 극언이었다. 이제까지 아라티네가 한 번도 직접적으로 들어 본 적 없는 직언이기도 했다.

하얗게 질린 아라티네가 헉, 소리를 내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지레 놀란 시녀들이 “황후 폐하!”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황후를 부축했다.

하지만 차마 활활 분노하고 있는 황태자에게 누구 하나 “너무하셨다”고 비난하지 못했다.

황후의 시녀들조차 알고 있었다. 너무한 건 아라티네 황후라는 걸.

“테오……!”

아라티네만이 아직도 변명하려 애썼다.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 그런게 아니야. 나는….”

“혹시나 저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실 생각이라면, 충고하는데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나지막한 경고에 아라티네는 멈칫 입을 다물었다.

“그게 아니라는 건 저도 어머니도 서로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 하지만 난 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어.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클로드는 나를 진정 사랑….”

“사랑이요?”

마테오의 얼굴에 날카로운 조소가 스몄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게 대의 보다 중요합니까? 도덕보다, 정절보다, 신의보다 중요합니까?

그 모든 걸 다 박살내고 얻을 가치가 있는 게 그 잘난 사랑, 남편의 동생과 배나 맞추는 게 당신이 말하는 잘난 사랑 놀음입니까? 예?”

말을 할수록 태자의 목에는 벌건 핏대가 섰다. 아라티네는 설마 이런 폭언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멍한 얼굴이었다.

마테오는 알고 있었다. 사랑은 마약 같은 게 아니다. 거역할 수 없는 향정신성 약물이나 최면 따위가 아니다. 릴리에에게 마음이 흔들려 본 경험으로 태자는 알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릴 수는 있다. 거기까지는 불가항력일수도 있다.

하지만 마테오는 감정에 휩쓸리는 대신 대의와 도덕, 정절과 신의를 선택했다.

죄를 짓는 건 본인의 선택이다.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심코 던진 돌에 사람이 맞아죽은 게 아니다.

의도를 가지고 돌을 골라 손에 쥐고 거리를 가늠하고 힘을 주어 돌을 던지는 모든 과정에서 그러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돌이킬 수 있었다.

'돌이킬 수 없게 됐다면 후회라도 해야지.'

당신은 그러지 않았다.

“차라리 아버지의 관 뚜껑을 열고 시체의 가슴에 칼이라도 찌르시지요. 예, 차라리 그 편이 낫겠습니다.”

아라티네는 거의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헐떡이다가 쓰러졌다.

"나, 나아, 나는…….”

“황후 폐하!”

“시의를 불러라! 폐하, 정신차리 십시오!”

시녀들이 야단을 떨었지만, 마테오는 황후가 쓰러지면서 옷 위로 왈칵 엎질러진 술잔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설 뿐이었다.

“분명히 말해두겠습니다. 그 아이를 제게 인정받는다고 어머니, 당신이 지은 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

“죄책감을 털어 버리려는 알량한 수작에 동참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부르지 마십시오.”

당신 같은 꼴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저는 그 배 속의 아이가 사촌인지 동생인지 모르겠고, 당신이 제 어머니인지 숙모님인지도 모르겠으니까요.”

더러운 것을 떨쳐 내듯 태자가 냉정히 돌아섰다. 결국 황후는 끽 소리를 내며 혼절하고 말았다.

* * *

심상치 않은 꼴로 황태자가 돌아왔다. 사람들은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가자.”

순식간에 마차에 오른 태자가 명한 거라곤 딱 그 한마디뿐이었다.

태자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불같이 일어난 감정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어머니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어떻게.

“미치지 않고서야…….”

미친 것이다. 미친 게 틀림없다.

그래야만 했다. 제 정신으로 저런 짓을 저질렀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오래 전, 부황께서 살아 계시고 어머니께서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던 시절. 그 시절의 어머니만은 잃고 싶지 않았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마테오는 으득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그는 코끝을 어지럽히는 단내를 자각했다.

'……응? ’맡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단 향기가 젖은 옷자락에서 풀풀 풍기고 있었다.

'술치고는 냄새가 좀 묘한데…….’

마테오의 머릿속에 하나씩, 기억 조각이 떠올랐다.

외할아버지인 카스타나 선제후가 어머니를 위해 특별히 보내 준 술.

그가 아는 어머니는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손님이 와도 술대접하는 걸 종종 잊던 사람이었다.

…… 어지러운 향기 속에서 마테오는 어머니의 혼몽하던 눈빛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말씀하시는 것도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덜 명료하셨던 것 같고…….’

…… 카스타나 선제후, 그의 외할아버지가 심약한 딸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술씩이나 보내는 다정한 사람이었던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어떤 가능성에 마테오는 흠뻑 젖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대공저에 도착하자마자 엘런 총관에게 옷을 맡기며 지시했다.

“이 옷을 적신 술이 심상치 않다.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해 오게.”

전후 사정을 들은 충직한 가신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