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 *
아라티네가 제멋대로 마테오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는 소식을 들은 클로드는 기가 막혔다.
“아라티네! 어찌 그런 생각 없는 짓을!”
생각 없는 짓이란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아라티네가 다시금 울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답답해졌다. 아니, 잘못을 한 건 저인데! 그토록 큰 실수에 고작 ‘생각 없다'고 했을 뿐인데 울다니!
이러니 그가 아라티네를 손에 넣고도 레이첼을 만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사람이 심약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매번 이렇게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게 울어대니…….'
같이 형을 배신하고 바람을 피웠건만 아라티네는 늘 이렇게 혼자서만 깨끗해지려고 했다.
'이러니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날수밖에!’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였다.
클로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라티네는 울먹울먹 변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테오, 그 착한 아이라면 당연히 동생을 환영해 줄 줄 알았단 말이에요. 당신이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해서 누구에게도 축하를 받지 못했잖아요…….”
“뭐?”
원망 섞인 변명에 답답하다 못 해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더 정신없는 사람이 되었지?'
아라티네가 다시 마음을 열어준 게 기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옛날보다 더 깊은 생각을 못하게 된 것 같았어'예전에는 아라티네의 그런 점이 살살 꾀어내기 쉬워 좋았지만 지금은 제 발등을 찍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라티네는 계속 흑흑 울었다.
클로드는 골치가 아팠지만 더 화를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삭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마침내 제 아이를 가진 사람이 흑흑 우는 모습이 보기 좋지만은 않았다.
“그만 울게.”
"흐, 흑, 하지만 폐하……….”
“원래는 그대가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신중히 행동하려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없지.
아라티네, 당분간 그대는 훨씬 더 오래전에 내 아이를 가진 척해야 하오. 할 수 있겠지?”
클로드의 목소리가 누그러지자 아라티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내가 황제가 되었으니 당연히 그대와 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내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야 하오. 그 역시 이해하지?”
"테오에게는…….”
“그 아이는 내가 숙부로서 합당한 보상을 해야지. 다미언을 보시오. 대공 작위를 받고 황제 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아라 티네에게는 그걸 파악할 정도의 사고력이 없었다.
아라티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로드는 내심 혀를 찼다.
'멍청해서 더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태어날 녀석이 모친을 닮으면 좀 곤란하겠군.'
어쨌든 차라리 잘 됐다. 클로드는 내년 한 해 안에 눈엣가시 같았던 조카를 황태자 자리에서 쫓아낼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대공저에서는 릴리엔이 보낸 은밀한 서신이 출발했다.
도착지는 산드리아 거리였다.
* * *
산드리아 거리에 갔던 밀정은 답장과 함께 꽃 한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일단 독극물이 포함되거나 저주가 걸려 있는 물건은 아닌 걸로 판명되었습니다만…….”
엘런 총관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단순한 꽃 선물이었지만 보낸 사람이 보낸 사람인지라 이걸 릴리에에게 전달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에 태울까요?”
“리타.”
오늘도 여전히 과격한 친정 시녀의 의견 제시에 릴리에이 나지 막이 경고를 주었다.
“거기 올려 두세요."
“예.”
화형이 크고 붉게 만개한 화려한 겹꽃이었다. 장미도 작약도 아니지만 어쨌든 그만큼 아름다웠다. 대단히 로맨틱하게도 답장은 꽃들 사이에 파묻혀 있다시피했다. 릴리엔이 생각하기에 이 꽃바구니는 밀지를 위장하려는 수단인 것 같았다.
릴리엔이 천천히 꽃바구니로 다가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모두 긴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데 어디서 본 꽃인 것 같은데…….’
레이첼이 파티에서 릴리엔에게, 주려 했던 꽃인 건 안다.
하지만 왠지 그 전에도 이 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잡힐 듯 말 듯한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리려 애쓰며 릴리에이 편지의 봉인을 뜯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키리에입니다, 비전하."
“들어오렴.”
릴리엔이 허락하자 정중하게 문이 열렸다.
“비전하, 경호 교대 시간표에 대해서 보고드릴 사항이……!"
키리에는 평상시대로 보고를 하려다가 릴리에의 앞에 놓인 꽃바구니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전하, 당장 거기서 물러나십시오.”
“키리에 경?”
릴리엔은 의아해하면서도 편지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역시 이 꽃바구니에 뭔가 수작을 부렸구나. 엘런과 리타의 표정도 대번 심각해졌다. 키리에가 물었다.
“비전하, 혹시 최근 3일 이내에 남부 시트린 밸리 일대에서 생산된 주류를 섭취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키리에,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아요.”
침착한 릴리엔의 대답에 키리에 가 안도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릴리에이 물었다.
“키리에 경, 이 꽃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나요?”
“그게…….”
키리에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윽고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 꽃은 제 외할머님의 고향인다이낙 지방에서만 자라는 품종으로, 그 지방에서는 '라헬'이라고 불립니다.”
“다이낙 지방이라면 …….”
릴리엔은 이 제국 귀족들의 이름과 작위와 출신지를 대부분 외우고 있었다. 다이낙이라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레이첼 부인의 고향이군요."
처녀 적 레이첼 부인은 다이낙지방을 다스리는 자작의 차녀였다.
“제 외할머님께서 다이낙 가문의 가신인 호엔 가문 출신이십니다.”
키리에에겐 레이첼의 고향인 다 이낙의 가신 가문 핏줄이 희미하게나마 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실력을 지녔고 본인도 원했음에도 대공비의 호위 선발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
블란쳇 공작가의 일로 릴리엔의 호위 인력이 철저히 실력 위주로 재조정됐던 그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일반 평기사로서 충성을 바치고 있었을 터였다.
“어머님께서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이제는 외가와 거의 왕래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할 머니께서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에 남몰래 당부하신 한마디 말은 저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 말은……?”
"라헬의 손에 시트린의 술을 건네지 말라.”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오래된 격언 같은 말이었다.
“다이낙은 이미 몇 해 전에 가주가 후계 없이 사망하면서 계승법에 따라 황가에 작위를 반납했습니다. 지금 와서는 다이낙 출신의 다른 사람들, 심지어 그 가문 출신인 사람조차 이에 대해 거의 모릅니다. 아마 외할머니께서 소싯적에 모종의 일로 알게 된 기밀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시트린산 술과 이 꽃이 함께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죠?”
“죽음이 입을 맞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불경한………!”
엘런이 경악했다. 리타가 다시 한번 물었다.
“태울까요, 비전하?”
“아니, 잠시만."
릴리엔은 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레이첼은 왜 그녀에게 이 꽃을 전달하려 하는 걸까?
릴리엔을 죽이기 위해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새 대공비가 술대신 차를 즐기며 대공저에서도 손님에게 술이 아니라 차를 대접한다는 건 사교계에도 이미 유명해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기시감…….'
“비전하!”
릴리엔은 바구니에서 꽃 한 송이를 뽑아 들었다. 그녀는 분명이 꽃을 본 적이 있었다.
'생각해. 떠올려.’
릴리에의 머릿속에 레이첼 부인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마치 이 만개한 꽃처럼 화려한 붉은 드레스 그리고 그녀가 부치던 부채에 수놓아져 있던 붉은 꽃송이.
'이 꽃이다.'
그리고 또… 기억을 더듬던 릴리엔의 눈이 커졌다.
"아니면 남왕국 국왕의 목이라도 잘라다 주고, 저 꽃을 보니 형이 남왕국 식 보석을 제법 좋아할 것 같은데.”
그때, 자그레브가 보여 준 다미언의 기억 속에서.
이도엘의 책상 화병에 꽂혀 있던 화려하고 붉은 꽃.
이도엘이라는 단어가 릴리에의 안에서 또 다른 기억이 들어 있는 잠긴 서랍을 열었다.
오래되어 조각난 기억이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이도엘, 참배, 선황의 무덤, 남겨진 사람의 행복을 바라며, 에단 슈미트, 선황을 기리는 비석.
그 비석 밑에 놓여 있던 애도의 의미라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해 보였던…….
붉은 꽃.
이도엘을 애도하고 있던 붉은 꽃.
그 순간 릴리엔은 간신히 깨달았다.
어울리지 않는 위화감으로 기억된 그 꽃은 에단이나 다른 사람이 가져다 둔 것이 아니었다.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엘런 총관을 바라보았다.
“비전하……?”
“총관, 혹시 선황 폐하께서 무슨 술을 즐기셨는지 기억하고 있나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는데도 충실한 총관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대답했다.
“선황 폐하께서 따로 즐기신 술은 없었습니다. 주로 주변에서 진상한 술을 상황에 따라 애용하셨습니다.”
정치적인 방식이다. 맞이해야 할 손님에 따라 각각 다른 의미가 담긴 술을 대접한 거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에게는 고향의 술을, 오랫동안 국경선을 지킨 늙은 충신에게는 국경선 지방에서 생산된 토속주를.
그러다 보면 언제고 시트린 밸리의 술을 마신 날도 있었을 것이다.
“레이첼 부인이 선황 폐하를 암살한 거라면 이상하지 않습....."
“아니.”
릴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과연 레이첼은 자신이 선황을 죽였다고 알리기 위해 이 술을 보냈을까?
라헬의 꽃과 시트린의 술.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레이첼은 릴리에이 거기까지 알아낼 거라곤 예상치 못했을 거다.
'깊게 생각할 문제가 아냐.'
레이첼이 릴리에에게 일깨워 주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항상 수중에 쥔 부채에 수놓아져 있는 꽃.
이도엘의 비석 아래 놓여 있던 꽃.
라헬(Rachel)은 이도엘의 죽음을 애도했다.
....…레이첼은 이도엘의 죽음을 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