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47화 (147/155)

147화.

*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하얀 눈을 뿌리던 하늘이 오늘은 추적추적한 비를 뿌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저녁. 한산한 수도의 거리를 평범한 마차 한 대가 달그락거리며 지나갔다.

물방울 맺힌 차창 밖으로는 비에 젖은 수도의 저녁 풍경이 어렴풋하게 흘러갔다. 모두가 덧창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영민하신 비전하시라면 이 레이첼의 뜻을 헤아려 주실 것이라 믿었답니다.”

먼저 입을 연 건 레이첼 부인 쪽이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여인들 한담에 동행하려 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다미언은 대답 대신 새침한 표정으로 릴리에에게 속삭였다.

“…… 저 여잔 제가 여기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나 봐요."

“전하.”

릴리에이 한숨을 쉬며 다미언을 나무라자, 다미언은 능청스럽게

“아차” 했다.

“실수. 얌전하게 굴기로 약속했었죠.”

얼마 전 다미언이 릴리엔에게'과보호 형' 운운한 건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

릴리엔이 다미언에게 잘못을 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다미언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바보가 아니었다.

레이첼 부인을 신뢰할 만한 심증 이외의 물증을 요구하는 다미언의 또박또박한 태도에 릴리엔이 내놓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릴리 엔에게 다미언은 속삭였다.

“뒤에 남겨진 채로 비의 안전을 노심초사 걱정하는 건…… 제게 너무 끔찍한 일이에요. 제가 당신을 지킬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네?”

모든 튜린 사람 중 가장 튜린 사람 같은, 올곧음과 자기통제의 화신 같은 릴리에이 유일하게 물러질 때가 바로 다미언이 연약하게 굴 때였다. 이럴 때면 릴리엔은 다미언이 반쯤은 일부러 그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넘어가 주곤 했다.

아무튼, 나무라는 릴리엔의 눈빛에 다미언이 짐짓 엄숙한 체입을 다무는 척했다. 결국 레이 첼 부인마저도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분께서 사이가 좋으시다는 이야기야 익히 들었습니다만, 제 생각보다도 사이가 좋으셨군요.”

“……국사를 움직이는 이야기를 한담이라 할 수 없으니. 전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여 동행하였을 뿐이네.”

사정을 알았을 테니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적당히 덮어 두자는 말이었다.

“비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그런 것이지요.”

레이첼이 웃으며 장단을 맞추자, 다미언의 눈이 샐쭉하고 가늘어졌다. 누가 봐도 레이첼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레이첼이 보기엔 레이첼이 릴리엔의 신변에 위협을 가할까 봐서는 아닌 것 같았다.

저 다미언 루펜바인이 저렇게 근접 경호를 하고 있는데 누가 대공비를 해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안 믿겠지만 레이첼이 보기에 다미언에게서는…… 그녀를 향한 묘한 경쟁 심리 같은 게 느껴졌다.

“오늘 이렇게 피차간에 어려운 자리를 마련한 건.”

대공비의 말이 레이첼의 상념을 끊었다.

“그대가 주장하는 바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라네.”

“예, 알고 있습니다.”

혼몽한 취기, 약간 미친 것 같은 요사를 거둔 레이첼 부인의 태도는 몹시 깔끔했다.

릴리엔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

레이첼은 십여 년 가까이 제국에서 제일가는 탕녀, 타블로이드의 먹잇감이었다.

“저는……"

그 누구도 레이첼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레이첼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답했다.

“……저는 감히 선황 폐하의 신하를 자처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라도 듣는다면 비웃음을 참지 못할 이야기.

그러나 레이첼의 고백을 듣는 대공비의 눈빛은 아주 고요했다.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대공은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아내가 침묵하니 일단 따라서 침묵을 지키려는 모양이었다.

레이첼은 무사히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저는 다이낙 지방을 다스리는 자작의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를.

* * *

“먼저 말씀드립니다만 무척 흔한 이야기랍니다.”

자작인 레이첼의 아버지는 끝내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다.

다이낙 지방의 상속은 오래 전 계약 때문에 직계 남성 비속에게만 물려줄 수 있었다.

레이첼은 가치 없는 딸이었다.

한때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총명함을 입증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노력으로 그쳤다.

레이첼은 그림자같이 열여섯이 되었고,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어렸던 레이첼은 결혼으로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리라 기대했다. 태어난 가정은 행복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꾸릴 가정에서는 행복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섣부른 기대가 레이첼의 눈을 가렸다. 아버지 슬하를 벗어나는 데 급급했던 레이첼은 남편의 자존심, 폭력성, 자주 술을 마시고 도박에 큰돈을 거는 버릇따위를 간과하고 말았다.

부부 사이는 빠르게 냉각되었다. 남편은 레이첼에게 무관심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건 낭비벽을 말리려는 레이첼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십여 년 전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대화의 기간 중, 황궁에서 연회가 벌어진 날 레이첼의 남편은 말다툼에서 비롯된 사소한 내기에 말도 안 되는 거액을 걸려고 했다.

레이첼은 당연히 말리려고 했으나, 자존심이 자극된 남편은 장소가 황궁이라는 것도 잊고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다.

다행히 구석진 발코니에서 벌어진 부부 싸움, 아니 일방적인 폭력을 목격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남편이 씩씩거리며 떠난 후, 레이첼은 울지 않았다. 조용하고 신속하게, 최대한 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황제 폐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레이첼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서 대체 왜 이곳에?

들으셨을까?

순식간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들었다. 고개 숙인 레이첼에게 이도엘이 말했다.

"모른 척하는 게 도리일지도 모르겠으나…….”

들으셨구나.

하얗게 질린 레이첼에게 이도엘이 계속해서 말했다.

"한 가지만 일러두자. 레이디노틸, 그대가 이혼을 원한다면 기꺼이 도움을 주마."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

레이첼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머리가 새하얗게 표백되는 듯했으나 어쨌든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이 같은 일로 어찌 사사로 이 황제 폐하의 시간을 빼앗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시옵소서.”

이도엘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레이첼은 그제야 문득 고개를 들었고 황제의 입가에 떠오른 다정한 미소를 보고 말았다.

“그대는 내 신민이니 내가 돌아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 시간은 낭비되지 않으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말아라.”

하지만 우습게도 그 순간 레이 첼은 황제보다도 남편이 두려웠다. 이 자리에서 입을 잘못 놀리면 남편이 그녀를 기어이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비이성적인 생각이었으나 폭력에 잠식된 뇌는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레이첼은 벌벌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이렇게 고했다.

"황은이 망극하오나 이 미천한 자가 감당키 어려우니 거두어 주소서…….”

"……그런가.”

다행히 자애롭고 현명한 이도엘은 그 이상 레이첼을 설득하지 않았다.

레이첼은 그 일이 거기서 끝날줄 알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달 뒤, 폐하께서는 제 남편을 아주 먼 곳, 국경을 수호하는 곳으로 발령을 보내셨습니다.”

황제의 신뢰를 받고 있다고 착각한 남편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기분 좋게 새로운 발령지로 떠났다.

이도엘의 대처 덕분에 레이첼은 너무도 손쉽게 악몽 같은 나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는 그때부터 죽는 날까지 황제 폐하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그게 바로 이 레이첼이 범한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어요.”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레이첼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레이첼은 일단 감사의 표시로 고향의 꽃, 그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아름다운 꽃을 진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클로드 루펜바인이 그 꽃을 이용해 이도엘을 죽였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지?”

“수도의 귀족쯤 되면 다들 눈치가 귀신같아요. 대부분의 사람이 클로드 루펜바인이 어떤 작자인지, 그 됨됨이를 어렴풋이나마 직감하고 있었어요. 저 역시 그랬답니다.”

황제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 지자마자 그 즉시 레이첼은 클로 드에게 접근했다. 마침 사랑하는 아라티네에게 거절당했던 클로드는 분풀이 삼아 레이첼과 하룻밤을 보냈다.

다미언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토록 쉽게?”

“예, 그토록 쉬웠답니다.”

당시 클로드는 아라티네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장애물인 남편이 죽은 것을 기뻐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라티네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클로드는 배신감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레이첼은 남편을 치워 준 이도에 덕분에 소싯적의 총기를 회복한 상태였다.

레이첼은 이성을 잃다시피 한 클로드를 살살 꾀어내서 진실에 대해 들었다.

모조리, 다.

그녀가 바친 마음이 어떤 식으로 이용당했는지를.

그녀가 바친 충성이 경애하는 황제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걸 낱낱이 듣고 말았다.

레이첼은 흰자위의 실핏줄이 터지도록 시뻘겋게 분노했다.

그리고 동시에 얼음처럼 냉정해졌다.

레이첼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미소를 지어냈다.

"참으로 경하 드립니다, 전하. 이제야 이 레이첼의 뜻을 알아 주셨군요.”

“잠깐, 그러니까 그 말은……."

“예, 다 제가 뒤에서 꾸민 척했습니다. 남편의 영전을 핑계 삼아 선황 폐하께 꽃을 진상한 것도, 클로드가 다이낙의 오랜 격언을 알게 된 것도 다 제가 계획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다미언이 머리를 짚었다.

“내 멍청한 둘째형이 믿던가?”

“전하께선 그 결과를 지금 보고 계십니다.”

믿었다는 말이었다.

“맙소사.”

다미언이 냉소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레이첼이 설명했다.

“클로드 루펜바인은 하잘것없는 능력에 비해 자존심이 드높은 자입니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 자기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 걸 몰라준다고 믿었어요.”

레이첼은 남편을 통해 그런 한 심한 인간 말종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클로드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 줄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전하야말로 황제폐하가 되셔야 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꾸몄다는 레이 첼의 말을, 클로드는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 난 내 형 따위보다 대단한 사람이야! 이 현명한 여인이야말로 그런 나를 알아봐 준 것이다!’

클로드의 안에서 레이첼을 의심하는 것은 스스로의 대단함을 의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되었다.

레이첼이 그 생각에 쐐기를 박았다.

“부디 제가 전하를 폐하로 모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전하께서 원래 가지셨어야 하는 그 자리, 그 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이 레이첼이 돕겠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릴리엔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했지?”

레이첼에게는 무수한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굳이 클로드를 황제로 만드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지 않아도 복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말에 레이첼이 처음으로 비소를 머금었다.

“비전하께서는 영명하십니다만 참으로 선하기도 하시군요.”

분명히 레이첼은 그날 밤 알아낸 걸 고발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클로드를 법의 심판에 넘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쉽습니다. 이 세상의 법은 결코 그놈이 저지른 죄악만큼의 벌을 줄 수 없어요.”

분수를 모르고 형의 자리와 형의 아내를 탐했으니 빼앗기는 고통도 알아야 응당했다. 다 쥐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자신이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 믿었던 하찮은 애첩 따위에게 배신당하고, 모조리 잃어버리는 고통을 당해야 마땅했다.

온몸의 뼈를 예리한 송곳으로 골수까지 긁어내고, 신경을 말단부터 가닥가닥 잘라내는 고통을 주고 말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비전하, 저는 그 개자식의 죽음이 아니라 개죽음을 원합니다.”

그래야만 경애하는 황제를 죽이는 데 그녀를 이용한 죄과를 일말이라도 되갚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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