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이야기였고, 누구라도 공분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릴리엔은 휩쓸리지 않았다. 차분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그날, 레이첼이 가장 비참한 순간에 만났던 이도엘처럼 푸르고 침착한 눈빛으로.
“그래서 우리를 자극해서 황제를 치게 하려고 했나.”
레이첼은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그 말에 다미언이 참지 못하고 울컥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릴리엔이 그를 돌아보는 게 더 빨랐다.
여기는 제게 맡겨 달라는 듯, 릴리엔이 침착한 눈빛을 보냈다.
다미언은 사납게 일어났던 감정의 파고가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릴리엔을 신뢰할 수 있었다.
아니, 릴리엔만을 신뢰했다.
다미언은 스스로의 목에 목줄을 채우고 그 줄을 릴리엔의 손에 들려주지 못해 안달이 난 미친놈이었다. 언제든 끊어 버릴 수 있는 목줄이지만, 그 줄을 쥐고 있는 게 릴리엔인 이상 다미언은 언제까지고 그 가녀린 팔에 복종할 생각이었다.
아주 기꺼이.
진정한 다미언이 팽팽하게 떠오른 허리를 다시금 등받이로 가라 앉혔다. 릴리엔은 잘했다는 듯 약간의 미소를 보냈다.
레이첼을 돌아보는 아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걸 확인한 다미언은 쾌감에 가까운 만족감을 느꼈다.
놀라운 광경이라고 레이첼은 생각했다. 대공비는 그저 눈빛, 미소만으로도 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 두겠네. 나나 내 남편은 그 계획에 이용되지 않을 거야.”
“…… 어째서 입니까?”
“선황 폐하께서 형제간에 상잔하지 말라는 확고한 유지를 남기셨기 때문이지.”
레이첼만 이도엘의 죽음이 억울했을까?
이도엘의 죽음에 다미언이라고 분노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미언은 인내했다. 클로드를 잡아 죽여서 황가의 참극을 빚어내는 대신, 형이 준 방패를 가지고 조카를 지키기 시작했다.
마테오가 예뻐서도 아니었다.
클로드를 덜 증오해서도 아니었다.
그게 이도엘의 뜻이기 때문이었다.
릴리에이 나타나기 전, 이도엘은 다미언에게 절대적인 기준이나 다름없었다. 다미언에게 이도 엘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와 피를 나눈 걸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릴리엔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릴리엔이 삶 속에 나타난 지금, 다미언에게 이도엘은 전만큼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릴리엔은 다미언이 유언을 어기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단순히 이도엘의 유지를 존중하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릴리엔은 다미언이 이도엘의 비석에 대고 ‘형의 당부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다미언은 이미 충분히, 넘치도록 불행한 굴곡을 겪으며 살아왔다. 릴리엔은 이제 와서 죄책감따위가 막 행복해지려는 다미언을 방해하도록 좌시할 수 없었다.
절대로.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레이첼은 나지막이 탄식했다.
“그렇습니까……. 선황 폐하께서 그런 유지를 남기셨군요.”
너무도 이도엘다운 당부였기에.
진위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우리는 선제후들에게서 만장일치를 이끌어 낼 계획이라네.”
선제후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클로드의 지배권에 불합리하다는 판정을 내리면, 클로드는 그 즉시 황제에서 대공으로 격하된다.
“쉽지 않으실 겁니다. 아라티네가 임신한 이상 카스타나 선제후가 복병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방법을 찾아야겠지.”
우직한 대답이었다. 그 말에 레이첼은 빤히 릴리엔을 바라보더니, 결국 실없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
“아, 맙소사. 세상에.”
"?”
의아해하는 릴리에에게 레이첼이 손사래를 치며 설명했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비전하.
비웃은 게 아닙니다. 그저 선황폐하께서 살아 계셨어도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랍니다."
“역시 비전하께서는 선황 폐하를 닮으셨습니다.”
갈색 눈동자가 전에 없이 다정하게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릴리 엔은 이상하게 다미언의 눈치가 보였다.
뿐만 아니라 레이첼에게 이도에 이 어떤 의미인지 아주 자세히 들은 직후라 그런 칭찬이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과찬이로군.”
“겸손하셔라. 아무튼 비전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대공 전하의 뜻이 비전하의 뜻과 같다는 것도 아주 잘 알았고요.”
“음. 아주 정확하다.”
다미언이 나른하게 웃으며 냉큼 인정했다. 자존심이라고는 진작 팔아 치운 태도였다.
“전하…….”
릴리엔은 결국 머리를 짚었지만 레이첼은 보기 좋다는 듯 웃었다.
“서로의 뜻도 알았겠다,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슬슬 헤어지는 게 좋겠네요.”
릴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이윽고 한적한 거리에서 멈추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우산도 없었지만 레이첼은 빗속으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그대로 가는가?”
레이첼은 괜찮다는 대답 대신 릴리엔을 돌아보며 웃었다.
화려하지도 애교 있지도 않은, 그저 인간 레이첼이 짓는 미소였다.
비에 젖은, 지치고 피로하여 아주 미약한 웃음.
"비전하, 이 레이첼은 본디 머릿속에 든 게 복수밖에 없어 개만도 못한 사람입니다만…… 딱 한 번만, 이번 딱 한 번만 비전하께서 행복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자, 이제 저를 내버려 두고 안녕히 가세요.”
잠시 후, 마차가 레이첼을 내버려두고 출발했다.
비는 그치지 않고 그날 밤새도록 쏟아졌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비?”
"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릴리엔이 간신히 다미언을 바라보았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다미언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말없는 재촉에 결국 릴리 엔이 입을 열었다.
"전하, 설마 선황 폐하께서 모르셨을까요?”
눈치 빠른 다미언은 아내가 클로드와 아라티네의 불륜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글쎄요. 아셨으니까 저더러 작은형을 죽이지 말라고 굳이 당부하지 않았을까요?”
“역시 그러셨겠죠…….”
레이첼의 말대로 수도의 귀족정도만 되도 어느 정도 짐작하는 클로드 루펜바인의 됨됨이를, 설마 이도에 혼자만 몰랐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내와 동생이 통정하고 있다는 것도 아마 알았을 거라고, 다미언은 추측했다.
“아마 그래서 저를 그 당시 가장 위험한 분쟁 지역이었던 레옌그라드로 출전시켰을 겁니다.”
이도엘은 다미언이 전장을 제집처럼 휩쓸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출전을 명하신 걸로 모자라, 굳이 제게 '대승을 거둬 오라고 주문하셨거든요.”
이도엘은 다미언에게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전설적인 대승을 부탁했다.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 제 조카를 지키는 방패가 될 권한을 쥐여 줄 구실이 필요했겠죠. 아마.”
이도에의 부탁에 따라, 다미언은 레옌그라드 요새에서 전설로 남을 학살을 자행했다.
릴리엔은 조카를 지키려는 형에게 이용당했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하는 다미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미언은 기억을 더듬어 보는 중이었다. 이도엘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이런 짐을 지워서 미안하구나.”
"미안해하지 마, 형."
"난 형이 하라면 뭐든 해.”
그때 이도엘은 동생의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각인된 새끼 오리처럼, 그에게 맹목적인 동생의 눈빛을.
그 눈빛이 어땠더라.
당시에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많이 가물가물해졌다.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다미언의 삶에 이도엘보다 더 중요한 릴리에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형에 대한 기억이 조금이라도 흐려질세라, 다미언은 강박적으로 기억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곤 했다.
하지만 릴리엔이 나타난 이후로 그런 행동은 하지 않게 되었다.
지나간 부질없는 기억을 구슬처럼 닦고 늘 들여다볼 여유 따윈없었다. 릴리에에게 온 마음을 빼앗겼고, 온 정신을 팔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아직 형이 했던 말 정도는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지는 마라, 다미언.”
“......."
"내가 명령하더라도 형제끼리는 상잔하지 마.”
다미언이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릴리엔은 생각했다. 아마도 이도엘이 아들을 지키기 위해 동생을 이용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기는 한 모양이라고.
하지만 죄책감을 느꼈다고 해서, 이도엘이 다미언보다 마테오를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이럴 때면 릴리엔은 숨통이 조이는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릴리엔은 한숨을 쉬며 다미언을 푹껴안았다.
다미언이 의아한 듯 종알거렸다.
“비?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저야 좋긴 하지만…….”
어떻게 하면 당신을 더 사랑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당신이 더 행복해 질까.
이제까지 못 그랬던 것만큼, 지금 당장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 모든 마음을 담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다미언은 얼른 반응하지 않았다. 릴리에이 지적했다.
“대체 제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마세요.”
"들켰나요?”
다미언은 릴리에이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게 좋았다. 예쁨받는 것도 만져 주는 것도 미치게 좋았다.
그래서 릴리에이 애정을 표현할 때마다 자기가 어떤 행동을 반복해야 다시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하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가엾은 사람 같으니. 다미언을 끌어안은 채로, 릴리엔은 낮게 웃으며 타일렀다.
"머리 안 굴려도 돼요. 안 그래도 사랑하니까.”
다미언이 허를 찔린 것처럼 얌전해졌다.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 이상을 넘어선 너무 좋은 일이기 때문에, 다미언은 기쁘다기보다 당혹스러워 보였다.
릴리엔은 나무라지 않고 타일렀다. 괜찮았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이지 못해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
반복되는 말 속에서 다미언의 심장 박동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지금은 그걸로 족했다. 갈 길이 멀어도 조바심은 나지 않았다.
릴리엔에게는 이 먼 여정을 즐길 인내심이 충분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