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카스타나 선제후가 황태자를 찾아왔을 때, 황태자는 중요해 보이는 문서를 고치는 중이었다.
“오셨습니까.”
인사하는 것도 건성이었다. 마테오는 일어서기는커녕 외조부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외조부님께서 오셨으니 응당일어나기는 해야 하는데, 제가 요즘 할 일이 많군요."
“그토록 바쁘신데 이 늙은이는 어찌 보자 하셨습니까.”
마테오는 푸른 눈빛으로 가만히 외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
만 그 속내는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차분하지는 않았다.
카스타나 선제후는 노회한 대영주였다. 마테오 정도가 손쉽게 속여 넘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테오는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게 대응할 줄 아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릴리에 숙모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잠시 고민한 끝에 마테오는 일단 보고 있던 서류를 깔끔하게 덮었다.
“……껄끄러운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 제가 후를 굳이 뵙자고 할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주름 속에 파묻혀 있던 카스타나 선제후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마테오는 릴리엔을 흉내낸 태도에 다미언의 사람 열 받게 하는 빈정거림을 한 방울 섞었다.
“어지간하셨어야지 제가 보자는 소리를 안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외할애비가 태자께 그런 소릴 들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군요.”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마테오는 내심 혀를 찼다.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대번 혈연을 들먹이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달리 생각하면 마테오가 그만큼 카스타나 선제후를 성공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술에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도 아니었다. 확신을 가지고 하는 추궁이었다.
“태자, 나는…….”
“아니, 변명은 말고, 혹여나 타당한 사유가 있다면 말해 보시란 말이었습니다. 제국 루펜바인의 황후가 이미 슬하에 태자를 둔 상황에서, 강력한 임신 촉진제이자 정신 착란을 유발하는 약초가 든 술을 자기도 모르게 먹어야 하는 이유 말입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과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있다면 해 보라는 투로 마테오는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카스타나 선제후는 입술을 씰룩거리 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제가 이 고발장에 서명을 마쳐야 할 듯싶군요.”
“내게 뭘 원하십니까.”
덮어 두었던 문서를 펼치며 마테오가 대꾸했다.
“후께서도 아시다시피 어머니는 유약한 분입니다. 휘두르기 쉬운 사람인데다 너무 약하고 감정적인 나머지 도덕적이라거나 강직함 따위의 덕목과는 거리가 먼 편이시죠.”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께서 제 어머니를 정신 착란 상태로 만들어 뜻대로 조종하는 게 용인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마 카스타나 선제후는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마테오는 그의 영향력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즉위와 동시에 친정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장성한데다, 어머니와 별다른 유대감도 없는 태자 대신에 다른 후계자가 태어난다면 어떨까?
클로드는 자기 자식을 위해 마테오를 기꺼이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다미언 삼촌을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틈을 봐서 저를 죽이는 건 그렇게까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걸요. 예전이라면 모를까, 헤멘린나 대제후께서 돌아가신 지금은 그렇죠.”
자신의 죽음을 대수롭잖게 입에 올리는 마테오에게는 기묘한 박력 같은 게 있었다. 카스타나 선제후조차도 기세에서 밀려 입을 다물고 말 정도였다.
“그 후에 클로드를 죽이면 새로운 후계자에게는 정신이 불안정한 모후만 남겠군요."
“......."
“그렇게만 되면 후께서 외척으로서 정권을 휘두르는 것도 꿈만은 아닐 테고요.”
심지어 그렇게 되면 나머지 여섯 선제후가 새 황제를 끌어 내릴 수가 없었다.
카스타나 선제후가 선제후 회의의 한 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이 카스타나 선제후가 황제에 준하는 권력을 손에 넣을 유일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후의 불합리한 야심을 저지할 방법은 내가 지금 이 고발장을 제출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태자는 이도엘의 아이로 태어나 헤멘린나 대제후의 슬하에서 다 미언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릴리엔을 보고 배웠다.
이만하면 그럭저럭 황제 구실을 할 수도 있을 만한 사람이 된 것 아닐까. 마테오는 자평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시냐고 물었습니다, 태자 전하.”
마테오는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그걸 굳이 제가 말씀드려야 아십니까?”
카스타나 선제후는 패배를 직감했다.
* * *
얼마 후, 아라티네의 임신 사실이 공표되었다.
“짐의 황후가 후계자를 배태하였다. 이 경사스러운 일에 마땅히 그대들의 축하를 바라네.”
클로드의 이같이 오만한 선언에는 레이첼의 사주가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정당한 후계자를 생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그래도 처지가 애매한 황태자를 두고 고민하는 중대 없는 자들도 현명하게 행동하려 애쓸 것입니다.”
이도엘과의 사이에서도 간신히 태자 하나만을 본 여인이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
이 사실 자체가 클로드의 남성으로서 자존심을 크게 고취시켰다.
감정적으로 고양된 클로드는 레이첼의 조언을 매우 타당하게 여겼다. 자신의 남성적 생식 능력 덕분에 정치적으로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짜릿할 정도로 흡족했다. 이 성적으로 따져 볼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라티네가 아들만 낳아 준다면!’
그때야말로 클로드는 완벽하게 큰형, 이도엘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황제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이도엘보다 완벽한 존재가 된다!
클로드는 그렇게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일에 그가 원하는 대로 반응해 주지 않았다.
“황후께서 회임을 하셨다고요?”
“이런 세상에……. 결국 그런일이…….”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혹하며 꺼림칙해했다. 심지어 마테오보다는 클로드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그랬다.
“황후께서 조용히 칩거하실 때야 저희도 모른 척할 수 있었지만 이건 좀…….”
“그 아이가 태어나면 태자 전하와는 대체 무슨 사이가 되는 거 랍니까?”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소름이 끼쳐 여러 번 어깨를 털어 댔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토록 뻔뻔하게 기뻐하시다니…….”
“세상에, 우리 더러 축하를 하라니. 그게 웬 미친 소리랍니까.”
“선황 폐하를 무슨 낯으로 뵈려고 저러는 걸까요.”
아라티네의 임신은 후계 구도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기보다, 사람들이 그동안 잊어버리려고 애써 오던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를 상기시키는 결과만을 불러오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선제후 회의가 개회하게 되었다.
이번 선제후 회의는 본회의로서, 7인의 선제후들뿐 아니라 궁내의 주요 각료들과 후작 이상의 귀족들 그리고 계승 서열 3위 이 내의 황족들까지 참석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형님께 어느 정도 제정신이 남아 있다면, 이번 회의 때 제 참석을 어떻게든 방해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방해한다고 해서 저지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긴 했다. 다 미언은 마테오의 뒤를 이어 계승서열 2위인 황족이었고, 헤멘린 나의 선제후였으며, 루펜바인의 대공이자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였다. 이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 명분이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미언의 부인으로서 임페라트릭스 레옌그라드라는 지위를 부여받은 릴리엔 역시 참석 대상으로서 독자적인 초대장을 받았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무런 방해가 없다는 건 아마…….
"레이첼 부인이 완벽하게 눈을 가리고 있을 겁니다.”
“그야 그렇지만…….”
다미언은 혀를 차면서도 “하긴.”
하고 납득했다.
“저도 비께서 제 눈을 가리시면 완벽하게 속아 넘어갈 자신이 있으니까요.”
물론 비가 아니라 다른 놈이 그런 무엄한 시도를 한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라고, 다미언이 조잘거렸다. 릴리엔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상황에서 그게 하실 말씀이신가요…….”
"으응, 그렇지만 사실인데요."
기회만 생겼다 하면 놓치지 않고 애교를 부리는 다미언이었다.
릴리엔은 하는 수 없이 제게 비비적거리는 남편의 뺨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 주었다.
심각한 애정 결핍인 주제에, 다 미언은 지독할 정도로 까다로워서 릴리에이 아니면 그 누구의 애정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다미언 루펜바인의 공허함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은 릴리엔뿐이었다. 릴리에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애정을 조르는 다미언의 요구에 되도록 성의껏 응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다미언은 다정한 릴리엔의 눈빛을 바라보다가 툭 털어놓았다.
"가끔 제가 비를 너무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불안해져요.”
“이런, 전하.”
다미언은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릴리엔은 이게 다 미언이 오래 고민한 끝에 털어놓은 깊은 진심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세요?"
“매번 비를 조르기만 하니까 한번쯤은 저를 귀찮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일부러 불쌍한 척하는 게 반, 진심이 반인 말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천성적으로 정이 없어서 노력이 필요할 뿐이에요."
세드릭도 그렇고, 이슬라르 가문 사람들은 묵묵한 신뢰와 변함없는 지지, 차분한 대화로 애정을 표현하는 성정들이었다. 자잘한 스킨십으로 자주 애정을 표현하는 습관은 들어 있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전하께서 불안하지 않으실까요? 말해 보세요.”
릴리엔의 다정한 말투에 다미언이 본심을 내놓았다.
“좀 더 표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표현이라. 다미언이 애정을 갈구하는 대상이 된 것은 릴리에에게도 기쁜 일이었으니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버릇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노력이 필요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예를 들어 신혼부부답게 불이 붙는 바람에 오늘 회의에 나란히 지각한다든가.”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