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안 될 것도 없지 않나요?"
한 걸음 떨어진 다미언의 보랏빛 눈동자가 어느새 위험할 정도로 열기를 품고 릴리엔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릴리엔은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자각했다. 남편이 평소처럼 타박을 받을 생각으로 농담을 던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미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진심인 것 같았다.
“아시잖아요.”
안광으로 사냥감을 꼼짝 못하게 붙들어 둔 맹수처럼, 다미언이 여유롭게 릴리에에게 다시 접근했다. 그리고 아내의 사랑스럽고 연약한 목덜미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눌렀다.
요즘 들어 물 만난 고기처럼 하도 애교를 떨어 잠시 잊고 있었지만, 다미언은 애초에 본성부터 맹수의 기질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릴리엔의 손에 자발적으로 복종하지만 마음만 바뀌면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하자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릴리엔은 예민해진 목덜미의 피부 위에서 곤두선 솜털 위로 다 미언의 입술이 길게 미소 짓는 것을 느꼈다.
“긴장하셨네요?”
쿡쿡 웃는 소리가 청각보다도 먼저 살결을 자극했다. 릴리에이 움찔 몸을 떨자 다미언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귀여워라…….”
입술이 더듬더듬 목을 타고 올라왔다. 진짜 지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함께 고조되었다.
“전하.”
다급히 말려 보려 했지만 다미언은 이미 귓바퀴 위로 입술을 옮겨 속삭이는 중이었다.
"전 원래 이까짓 세상과 인간사 따위보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좋아요.”
다들 어디 가서 죽어 나자빠지, 든지 말든지.
"다소 발칙한 짓을 할 수 있다.
면야 더욱 좋고요."
“지금도 이미 발칙하게 굴고 계십니다만…….”
"어라, 고작 이 정도가요?”
다미언이 느긋하게 릴리엔을 껴안았다. 그 순간 릴리엔은 자신이 몸을 빼려면 얼마든지 뺄 수 있는 상태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뒤늦은 자각이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훨씬 더 발칙하게 군다는 걸 이미 아시면서. 어제도 제가 성의껏 가르쳐드렸잖아요?”
다미언의 속삭임에 농도 짙은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둔한 릴리엔마저도 진심으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하? 아시겠지만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입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지각하기로 해요, 우리.”
“꼭 그래야만 하나요……?"
“그럼요.”
지금 그 회의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인의예지 면에서는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 여럿이었다.
“제가 얼마나 당신에게 돌아 버렸는지 계속해서 알려 줄 필요가 있어요.”
곱게 죽고 싶으면 대공비는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사심 없이 경고의 의미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그렇게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하죠.”
다미언이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시원스럽게 흑심을 인정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을 상대로 사심이 넘친답니다.”
결국 릴리엔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 * *
선제후 본회의가 열리는 회장.
중심에는 선제후들이 둘러앉을 수 있는 원탁이 놓여 있었고, 그 양옆으로는 참관인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날개처럼 배치되었다.
맨 앞쪽에는 재판정처럼 황제 일가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개회 한 시간 전, 회장이 개방되고 참관인 자격으로 초청받은 사람들이 속속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정각에서 딱 5분 전이 되자…….
“튜린 선제후, 튜린의 후작, 로젠의 백작이며 전형의 기사이신 세드릭 레제크네 이슬라르 각하께서 드십니다!”
세드릭이 선제후 중에서는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예기가 돌 정도로 싸늘한 푸른 눈동자에 백합처럼 수려한 생김새가 단연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참관인들이 수런거렸다.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참 괜찮은 청년이에요.”
“결혼 생각은 아직도 없으시려나?”
“안 그래도 대공비 전하께서 그 문제에 대해 숙려 중이시라고는 들었어요.”
“대공비 전하의 의견이 중요한가요?”
“어머, 당연하죠! 튜린 후께서 여동생의 말이라면 껌뻑 죽다시피 하시는 형편인걸요.”
세드릭의 비어 있는 옆자리를 차지하려면 본인보다도 대공비의 마음을 사는 게 빠르다는 뜻이었다. 슬하에 딸을 둔 참관객들은 그 조언을 주의 깊게 새겨들었다.
정각을 넘기자 다른 선제후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원탁에 딱 한 자리, 다미언 루펜바인의 자리만을 남겨 둔 상태에서 입구를 지키는 시종이 외쳤다.
“제국 루펜바인의 광휘, 가장 존귀하신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참관객들과 선제후들이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황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머나, 세상에.”
“황후 폐하께서 …….”
곱게 차려입은 아라티네가 클로 드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클로드는 걸음이 느린 아라티네를 거의 끌고 들어오다시피 했다.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황제 부부를 위해 마련된 상석을 나란히 차지했다.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당혹스런 눈빛을 교환했다.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저런 후안무치한…….’
하지만 클로드는 사람들이 당황한 걸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그래, 내게 후계자가 생겼으니 다들 입장을 바꿔야 할 거다.'
클로드는 임신한 아라티네가 전 면으로 나서면 망설이던 사람들도 그에게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끔찍이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지만 클로드는 정말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레이 첼이 그의 잘못된 생각을 보완해 주지 않고 오히려 부채질한 덕분이었다.
그나저나 다미언과 마테오는 어디 있지?
클로드는 커흠 하고 불편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와 아라티네가 가장 늦게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측이 빗나가 그들을 기다리게 되고 말았다.
“내 아우가 늦는군. 이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문을 닫고 이만 회의를 시작하는 게 어떤가?”
오만한 제안이었다. 본디 황제는 선제후 회의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방금 클로드의 말에 모든 선제후들의 기분이 상한 것은 물론, 참관객들 중에서도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었다.
“외람되오나 폐하…….”
가장 성격이 부드러운 편인 이 카난 선제후가 나섰다.
“선제후 7인의 권리는 절대적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을 빼놓고 회의를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대놓고 반기를 드는 말에 클로 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루펜바인의 대공 전하, 헤멘린 나 선제후, 헤멘린나의 공작이자 알트 해의 주인이시며 팔미앵의 백작, 제국군의 명예로운 대원수이신 쇄금의 기사…….”
시종이 숨이 찬 듯한 박자를 쉬었다.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 다미언발미에라 에른스트 루펜바인 전하께서 드십니다.”
참관객들의 반응은 클로드 때와는 사뭇 달랐다. 모두가 절세미인인 대공과 그에게서 사랑받는 대공비를 보려고 체면도 잊고 고개를 빼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대공은 은장 장식이 달린 검은 예복을 차려 입었고, 대공비는 은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한 쌍으로 차려입고 등장한 대공은 직접 대공비를 데리고 자기 자리 바로 뒤에 비워진 참관객석에 앉혀 주었다. 그리고 잘 있으라는 듯 손등에 키스를 남기고서야 제 자리로 돌아갔다.
"세상에....…."
대공 전하께서 아내에게 혼이 나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새삼 놀랄 만큼 지극정성이었다. 조금 전 클로드가 아라티네를 데리고 들어오던 거친 태도 때문에 다미언의 다정함은 더 두드러져 보였다.
"…늦었구나, 동생아.”
클로드는 사람들의 관심이 다미언에게 쏠리는 걸 견디지 못했다. 다미언은 대수롭잖게 받아 넘겼다.
“실례, 신혼인지라.”
“아무리 신혼이어도 선제후 회의에 지각을 하면 쓰겠느냐? 네 태도가 방자하구나.”
".......”
다미언이 눈초리를 가늘게 좁혔다. 릴리에이 말려 보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사랑에 정신이 나가서 한 짓으로는 저보다 형님이 더하실 텐데요. 이 불민한 아우의 시간관념을 나무라시기 전에 스스로의 행동부터 돌아봄이 어떠실지?”
"…!”
다미언의 공격력은 무력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걸었던 시비 이상으로 난도질을 당한 클로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다행히 큰 소리가 나기 전에 마테오가 끼어들었다.
“삼촌의 신혼 자랑은 그만하시면 됐습니다. 늦었으니 회의나 시작하시죠.”
그 말에 진행 역을 맡은 귀족이 눈치 빠르게 망치를 두드렸다.
“서, 선제후 본 회의를 개회 선언합니다!”
클로드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회의는 중반까지는 사전에 계획된 대로 흘러갔다. 황제 측 증인들은 클로드의 치세가 얼마나 이 나라를 공고하게 만들었는지 증언했다.
증언 내용 자체는 완벽했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완벽하군.'
잘못된 부분을 지나치게 누락시킨 나머지 허황된 포장지나 다름없는 말이 되고 말았다. 만족스러워 하는 건 클로드뿐이었다.
“이상으로 증언을 모두 마칩니다. 선제후들께 잔을 올리십시오!”
선제후 본회의에서 선제후는 황금과 놋쇠로 만든 잔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
황금은 황제의 치세에 대한 동의를, 놋쇠는 반대를 표명한다.
나이가 가장 어린 튜린 선제후에게 가장 먼저 잔이 올려졌다.
세드릭은 푸른 눈으로 아버지의원수인 황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활로 쏘아 꿰뚫는 듯한 시선이었다.
시선을 맞춘 채, 세드릭이 보란듯이 손만 움직여 놋쇠 잔을 들었다.
쾅, 소리를 내며 놋쇠 잔이 테이블을 후려치다시피 놓였다.
반대표였다.
'건방진…….’
클로드는 이를 악물었다. 저 어린 튜린 놈은 도무지 황제를 존경할 줄 모르고 시종일관 저 모양이었다. 그가 죽인 아비를 닮은 대쪽 같은 꼴이었다.
'내 언제고 네놈도 네 아비 꼴이 나게 해 주마.'
한 표 정도는 상관없었다. 아직 여섯 명의 선제후가 있었고 그중 셋은 확실하게 그의 편이었다. 어쩌면 카스타나 선제후까지도.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그도 내 편을 들어야지. 이제 아라티네가 내 아이를 가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네 명이다. 튜린 놈이 아무리 건방지게 굴어 봤자 이길수 없을 것이다.
클로드는 흡족하게 네 명의 찬성표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뒤이어 이카난 선제후가 놋쇠잔을 들었다. 그 다음은 루체른 선제후였다.
“큼, 커험.”
요란하게 헛기침을 한 루체른 선제후가 놋쇠 잔을 들었다.
“......!”
저놈이! 클로드는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철저히 자기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가 놋쇠 잔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하지만 투표는 멈추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시종이 비슈케크 선제후에게 잔을 올렸다.
클로드는 숨을 씨근거렸다.
‘루체른, 저놈은 언제나 오만했지. 그래, 저놈은 자존심이 상해 나를 배신할 수 있어!'
저번 회의에서도 한 명이 그를 배신했다. 그게 바로 루체른 선제후일 거라고 클로드는 생각했다.
비슈케크와 티라나 그리고 카스타나는 그의 편이다.
세 표면 충분했다.
하지만…….
"저…….”
비슈케크 선제후가 놋쇠 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