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151화 (151/155)

151화.

얼어붙었던 참관객들 사이로 술렁거림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지요?”

“두 선제후께서 변심을…….”

“그렇다면 대체 반대표가 몇이.......”

믿을 수가 없었다. 클로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나를……….'

벌 줄 셈인가? 고작 자기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해서? 내가 황제인데?

찬성표가 한 표만 나와도 정권은 유지된다. 하지만 대다수의 선제후가 반대하는 정권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허수아비황제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두 표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야 해……!’

제기랄! 클로드는 마음속으로 이 회의가 끝난 뒤 자신의 편을 들어 준 선제후에게 주관자 자리를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래, 주관자!’

티라나 선제후는 이 상황에서 찬성표를 던지면 주관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 것이다!

클로드는 그렇게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저, 저것 봐!”

“세상에, 티라나 선제후께서도…….”

또 한 개의 놋쇠 잔이 늘었다.

이제 원탁 위에는 총 다섯 개의 놋쇠 잔이 놓였다. 남은 선제후는 둘, 헤멘린나 선제후인 다미언과 카스타나 선제후였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클로드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라티네가 필사적으로 속삭였다.

“폐, 폐하, 고정하세요……. 아버님만큼은 폐하의 편이 되어 주실 거, 겁니다…….”

'그래!' 카스타나 선제후의 딸, 아라티네 뱃속에는 새 생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아이가 없을 때도 중립을 지킨 자이니, 분명..…'

클로드와 아라티네는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이윽고 카스타나 선제후가 두 잔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그가 잡은 것은…….

“놋쇠다!”

“놋쇠 잔을 잡았어.……!”

경악 섞인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충격을 받은 아라 티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 아버님, 어째서…….”

카스타나 선제후는 충격을 받은 딸을 아예 모른 척했다.

클로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섯…… 여섯이라고?"

말도 안 된다.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이제 남은 표는 단 하나였다.

시종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선제후, 다미언에게 잔을 올렸다.

마지막 선제후인 다미언에게는 관례대로 잔과 함께 붉은 포도주가 제공되었다. 보통 회의 중에 한 표라도 찬성표가 나오면 마지막 선제후는 황금 잔에 술을 따른 뒤 마시는 걸로 황제의 치세를 인정함을 표했다. 작년까지 이 역할은 헤멘린나 대제후의 역할이었다.

다미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도 주 병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황금 잔에 술을 따랐다.

"...!"

황금 잔! 클로드는 놀랐다. 저 동생이 그에게 찬성표를 주려는 것인가?

하지만 다미언은 보란 듯이 다음 놋쇠 잔에도 똑같이 술을 따랐다.

“공교롭게도 오늘 이 사람에게 결정권이 주어지고 말았군요.”

“다미언…….”

그제야 클로드는 깨달았다. 오늘 다미언의 몸을 장식한 것 중 금빛을 띠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예복은 마치 상복처럼 보였다.

마치 그의 존재가 클로드의 치세를 끝장내기 위해 나타났다고 외치는 것처럼.

“영광으로 생각해, 형."

놋쇠 잔이 들렸다.

다미언은 잔에 담긴 술을 미련없이 바닥에 쏟아 버렸다.

"너……!”

"…이 손으로 형의 치세를 끝장낼 수 있어서 말이야.”

다미언의 입술에 웃음이 번졌다. 복수가 주는 희열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광소(狂笑)였다.

“부, 부결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극한의 분노로 클로드는 뺨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외쳤다.

“인정할 수 없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다미언이 허리에서 획 칼을 뽑았다.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인 그는 얼마든지 무기를 소지한 채로 검선(劍線)을 넘을 수 있었다.

이도엘이 그에게 쥐여 준 무소불위한 검이, 마침내 클로드의 목 아래를 정확히 겨누었다.

다미언이 물었다.

“이래도 못 하겠어?”

“큭……!”

“이래도 네가 불법으로 차지한 내 큰형의 자리에서 못 내려오겠냐고 물었잖아.”

그래, 못 한다!

성질 같아서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다미언이 쥔 칼 앞에서는 누구도 제 성질대로 굴 수 없었다.

"어디 한번 지껄여 봐.”

'할 수 있다면.’이라는 말이 생략된 말이었다.

클로드는 입술이 피범벅이 되도록 씹어 대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미언의 얼굴에 조소가 번졌다. 그가 명령했다.

"내려와.”

클로드는 알았다. 다미언은 복종하지 않으면 이 자리를 그의 피로 적시고도 남는 놈이었다.

죽음과 굴욕 앞에서 클로드의 선택은 분명해졌다. 큰형을 죽여버릴 만큼 드높았던 자존심조차도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는 없었다.

클로드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제 발로 일어섰다.

관객들이 신음을 토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황제가, 그 위를 찬탈했다고 하나 루펜바인의 황제가…… 제 발로 옥좌를 내려오고 있었다.

"다미언……….”

뒷말은 없었으나 내려왔다니 살려 달라는 말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미언은 칼을 치워 주는 대신 선언했다.

“선제후 7인의 만장일치로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 클로드 글라 디올 에젝 로가디스 루펜바인을 황위에서 폐한다. 그에게서 '글라 디올'을 박탈하며 루펜바인의 대공으로 돌아갈 것을 통보하는 바.”

"....."

“또한 나, 헤멘린나의 선제후이며 제국군의 대원수인 다미언 루펜바인은 계승 서열에 따라 마테오 황태자를 위해 기꺼이 종군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침묵 속에서 다미언이 좌중을 향해 물었다.

“이의가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미언 루펜바인이 종군한다는 말은 마테오가 황제가 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를 직접 무력으로 다스리겠다는 말이었다.

제국군 대원수, 적들을 무찌르는 게 아니라 학살하는 걸로 정평이 난 전쟁광을 상대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은 감히 아무도 없었다.

이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미언은 칼을 거뒀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선언했다.

“본 회의는 계승 서열에 따라 이도에 글라디올 시사크 엘라미네 루펜바인의 장자, 마테오 시사크 투르마린 루펜바인 태자를 새 황제로 세우는 데 합치함을 밝힌다.”

오랜 반란이 끝났다.

종결이었다.

* * *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다.

공식적으로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을 뿐, 이도엘을 암살한 사실이 들통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클로드에 대한 조치는 대공으로 격하되고 황궁에서 퇴거 절차를 밟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살 길이 열렸기 때문일까. 클로 드는 이것만으로 감사하는 대신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 내가, 이 내가 황제가 아니라고?'

어제까지만 해도 내 밑에서 설설 기던 자들이! 감히 나를 끌어내리고 황제가 아니라고 해?

“폐하…….”

겁에 질린 아라티네가 클로드의 소맷자락을 잡아 당겼다.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극대화된 아라티네는 클로드가 화가 난 줄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방금 있었던 회의 때문에 겁에 질렸고 혼란스러웠으며 클로드가 당연히 그런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 치워!”

“꺅!”

클로드는 아라티네에게 붙잡힌 팔을 매정하고도 거칠게 뿌리쳐버렸다.

희게 질린 아라티네가 풀썩 쓰러졌다. 서미나 백작 부인이 황급히 아라티네를 부축했다.

“폐, 폐하…….”

배를 감싸 안은 아라티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불렀다.

하지만 자기 아이를 보호하며 쓰러진 여인을 바라보는 클로드의 시선에는 조금의 연민조차 깃들지 않았다.

“낯짝이 있어야지. 네년의 아비가 나를 배신한 걸 벌써 잊은 거냐?”

“폐하!"

서미나 백작 부인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하지만 클로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게 다 아라티네, 멍청한 네년 탓이다!”

"폐하, 어째서…….”

어째서?

왜?

아라티네는 절망스럽다기보다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클로드는 언제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선량하긴 하지만 안 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칼 같았던 이도 엘과 달리, 그는 시종일관 아라 티네에게 달콤하게 굴어 주었다.

한데 어째서 저 사람이.

'저이가 어째서 내게 폭언을……?'

이 상황은 혹시 현실이 아니라 지독한 악몽인 게 아닐까?

"폐하, 어째서 제게……. 저를 사랑하신다면서…….”

혼몽한 아라티네의 눈빛을 바라보며 클로드는 기가 막혀 냉소하고 말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

사랑? 그까짓 사랑이 뭐란 말인가?

클로드가 아라티네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분명 형을 조롱할 목적으로 형수에게 접근했지만 나중에는 진심이 된 게 맞다.

“그래, 내가 너를 사랑하지. 하지만 내겐 네까짓 걸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있단 말이다!”

그는 아라티네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으리만 치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그 자신의 자존심, 지위, 부와 명예가 사랑하는 아라티네보다 훨씬 중요했다.

“고작, 고작 그 정도…….”

“이런 소릴 듣기 싫었으면 열심히 네 아비를 회유하고, 임신 사실을 내가 시킨 대로 제대로 숨겼어야지!”

클로드의 나머지 호령은 아라티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라티네의 머릿속에 드물게, 오래 전 이도엘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라티네, 나는 아마 당신을 여인으로서 사랑하지는 못할 거야.”

"폐하……."

그때 아라티네는 원망 섞인 눈으로 이도엘을 바라보았다.

정작 그녀 자신도 이도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도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 원망스러웠다.

“혹시 다른 여인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아라티네, 불안하다면 약속하지. 그대 이외 다른 여인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

“사랑은 줄 수 없지만 신실과 우정으로서 그대의 평생에 믿을만한 배우자가 될게, 그대의 아이에게도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아버지가 되어 줄 거야.”

그걸로 만족해 달라며 이도엘은 거듭 맹세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그 맹세를 지켰다.

'그 맹세를 저버리면서 얻은 사랑이……. 그 사랑의 결말이 고작 이 정도라고……?'

아라티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큰 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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