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주저앉는 아라티네를 서미나 백작 부인 이 간신히 부축했다.
클로드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바닥에 침까지 탁 뱉었다. 아라 티네는 차치하고서라도 뱃속에 잉태된 제 자식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전혀 걱정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들 계시나요?"
그때 문이 열리며 레이첼 부인 이 등장했다.
"레이첼!”
궁지에 몰린 클로드에게는 믿음직한 책사인 레이첼이 거의 하늘에서 보낸 천사나 다름없게 보였다.
“이제야 오는군. 마침 그대가 필요했어!”
클로드가 두 팔 벌려 허겁지겁 레이첼을 맞이했다.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상징적으로 차려입은 레이첼이 요염하게 미소를 띠며 그 품에 안겼다.
“그러실 거라 생각했지요. 언제나 이 레이첼이 도움이 되어 드리니까요.”
“암, 그렇고말고. 도움이 되다 뿐인가!”
레이첼도 클로드도 바닥에 주저앉은 아라티네는 아예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럼 긴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안으로 가실까요……?"
레이첼의 추파 어린 눈짓에 클로드는 두 말 않고 침실을 향해 움직였다.
아라티네는 자신에게 침을 뱉었던 사랑하는 남자가 애첩의 손을 잡고 침실로 함께 들어가는 장면을 절망적으로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라 티네가 기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클로드도 레이첼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레이첼은 가장 먼저 대접용으로 놓여 있는 술을 따라 클로드에게 내밀었다.
목이 타기는 했지만 이 판국에 술이 당기진 않았다. 하지만 레이첼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는지라, 클로드는 다급하게 술을 들이켰다.
“고초를 겪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루 말로 하겠는가.”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클로드는 레이첼이라면 묘수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몰락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침착한 레이첼의 태도가 그런 믿음을 더욱 부추겼다.
'사실상 이 일로 나보다도 더 큰 위기에 처한 이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이렇게 침착하다면 분명 무슨 수를 낼 수 있는 게 틀림없다고 클로드는 믿었다.
"어떻게, 방법이 있겠느냐?”
레이첼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뺨을 치고, 배를 걷어차고.
분노를 터트리며 폭력을 휘두를 때면 클로드는 레이첼이 사람이 아니라 제 마음대로 걷어차고 던져 버릴 수 있는 인형인 것처럼 아무렇게나 취급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치근거리는 듯한 나직한 목소리에 해결책을 조르는 은근한 태도가 구차하게 보일 정도였다.
“명하시니 답하겠습니다. 현 상황을 해결할 비책은 …….”
꿀꺽. 클로드는 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레이첼이 빙긋 웃었다.
묘하게 평소와 다른 웃음이었다.
“없습니다.”
“그래!…뭐?”
옳다구나 무릎을 치려던 클로드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되물었다.
하지만 레이첼의 대답은 같았다.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제후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부결이 나지 않았습니까?”
"........”
“태조께서 언약하신 법입니다.
어찌 이 제국의 신민으로서 그 법에 대해 반역하겠습니까?”
"너…….”
클로드의 입이 벌어졌다. 너무 화가 나서 피가 치솟는 탓일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 너!”
클로드는 잘하던 욕지거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만 갈겨댈 따름이었다.
씩씩거리는 꼴이 우스워서 레이 첼은 천진하고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폐하, 아니지. 전하께서는 이제 영원토록 황위에 도전하실 수 없습니다. 아십니까? 선제후 회의에 의해 거부당한 황제는 열조에 기록되지도 못한답니다! 전하께서는 로가디스를 다스리는 대공으로만 역사에 이름을 남기실 겁니다.”
“이……이 미친 악마 같은 년......!”
“가지지 못할 것을 탐해서 발정난 짐승이나 저지를 죄를 지었는데도 끝까지 황위를 지키지도 못한 멍청한 패륜아.”
레이첼이 뒤로 넘어갈 것처럼 숨을 씩씩 몰아쉬는 클로드를 향해 얼굴을 바싹 붙였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모든 것을 사르는 복수의 불길.
“그게 너야, 클로드 루펜바인.
넌 이제 영원토록 천하의 개잡놈으로 남을 거야.”
“너 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클로드는 곧바로 레이첼을 향해 팔을 뻗었다.
'어……?’
하지만 손이 평소처럼 기세 좋게 나가질 않았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팔은 레이첼의 머리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
“계집…… 내게…… 무슨…….”
"내 옷을 보고 뭐 생각나는 게 없니?”
클로드의 무릎이 털썩 접혔다.
레이첼은 흥미 없다는 듯 팽그르르 돌아 화병에 꽂힌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화려하게 피어난 붉은 꽃.
꽃과 같은 레이첼…….
"너, 너어……!”
저년이…… 나를!
그제야 레이첼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클로드가 경악섞인 분노를 터트렸다.
“이제야 알았구나! 기분이 어때?”
하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클로드는 혀가 뿌리부터 굳어 가는 걸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레이첼은 순수한 기쁨으로 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체…… 왜…….
“너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았지, 클로드 루펜바인.”
레이첼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클로드를 나락까지 박기 위해 독살스럽게 혀를 놀렸다.
“내가 설마 선황 폐하를 경애하는 줄은, 그래서 네게 이용당한 일로 증오심을 품은 줄은 꿈에도 몰랐지. 조금만 의심했다면 알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끄, 끄으억…….”
“아라티네도 선황을 사실 사랑했다는 거 알아? 그 여잔 멍청해서 제가 널 사랑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선황이 사랑을 주지 않는 데 앙심을 품고 널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야.”
"끄으아아악!”
피거품을 보글보글 뿜으면서도 클로드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제가 지르는 비명에 피가 기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요란하게 기침을 하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이럴 순 없어.
이래선 안 돼.
나는 위대한 황제인데, 이대로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는…….
까뒤집어지기 직전인 눈꺼풀에 억지로 힘을 주는 클로드의 뺨에 레이첼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그시 발을 올렸다.
"너는 한심한 패배자야.”
“.......”
아니야, 아니야!
나는 위대한 사람이야.
나는, 나는…….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
나조차도 너를 두려워하지 않아.
너는 인생을 허깨비처럼 살았고 비참하게 이름을 남길 거야.”
“끄흐어어억…….”
“모두가 애첩의 손에 죽은 널 비웃겠지.”
클로드가 피거품과 함께 토사물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레이 첼은 망설임 없이 발끝으로 그 얼굴을 걷어차 주었다.
“컥…!”
“잘 가, 패배자. 그동안 함께해서 더러웠어.”
마침내 클로드가 하얗게 눈을 까뒤집었다. 그러면서도 몇 번인가 고통스럽게 등을 꿈틀거렸다.
그는 한동안 벌레처럼 비참하게 고통을 감내하다가 잠시 후 아주 잠잠해졌다.
레이첼은 자기가 토해 낸 피와 오물로 만들어진 진창 속에 처박힌 비참한 남자를 잠시 동안 내려다보았다.
남은 시간은 아마 길지 않을 터였다. 잠시 후면 퇴거 절차를 정식으로 밟기 위해 사람들이 클로 드를 찾을 것이다.
레이첼은 클로드가 아무렇게나 버려둔 술병을 들어 남은 잔에 따랐다.
한 손에는 꽃송이를, 한 손에는 술잔을 든 채 레이첼은 발코니로 향했다.
“가끔씩은 묻고 싶을 때가 있었어요…….”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이 일이 이렇게 꼬이고 말았을까?
이도엘에게 이 꽃을 바치지 않았어야 했을까?
그러려면 남편과 결혼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첼이 남편과 성급히 결혼한 건 자기를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아버지 곁에 더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들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귀중한 후계자에게라면 아버지도 라헬 꽃이 가진 치명적인 비밀에 대해 알려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최소한 아무것도 모르고 선황에게 라헬 꽃을 진상하는 멍청한 짓은 안 했겠지.
“그리고 충심으로 폐하를 섬기며 폐하가 죽기 전에 이 꽃으로 저 반역자를 먼저 죽여 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증거조차 남지 않는 의문사를 당하는 건 경애하는 선황이 아니라 저 작자가 되었어야 하는 건데.
이런 식으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조리 후회, 후회, 후회였다.
후회만 남는 인생이라니..
“허무하여라……."
눈을 감고 흥얼흥얼하며 레이첼은 술을 쭉 들이켰다.
무슨 인생이 이 모양일까. 실없이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달빛이 시렸다.
달이 밝힌 밤하늘이 푸르게 보였다. 그 검푸른 빛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이도엘보다도 대공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토록 바보 같고 허무한 인생이지만, 선황 폐하를 닮은 그 아이에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쁘지만은 않구나.”
레이첼은 자신을 닮은 붉은 꽃송이에 코를 가까이 파묻었다.
황금빛 꽃술이 코를 간지럽혔다. 죽음이 단숨에 비강을 통해 스며들었다.
마침내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는 동안 레이첼은 저항하지 않았다.
너무 가까이서 향기를 들이마신 탓이었다.
열흘 동안 붉었으니 그만이라는 꽃처럼,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순순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레이첼은 사경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헤매지는 않았다. 곧장 죽음을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