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클로드와 레이첼이 사망했다.
이 소식은 곧바로 황제나 다름없는 마테오에게 전해졌다. 마테오는 일단 곧바로 함구령을 내렸으나 이 충격적인 소식을 완전히 차단하는 건 무리였다.
“클로드가 선제후 회의의 결과를 비관하여 동반 자살한 걸까요?”
“글쎄.”
“일단 여기 유서가 발견되긴 했습니다만…….”
유서는 레이첼이 미리 준비해둔 것이었다.
발견된 레이첼의 유서는 총 두가지 문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유서에는 클로드가 어떤 방식으로 선황을 죽였는지와 증인의 소재 같은 것들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마테오와 다미언 다음으로 유서를 읽은 릴리엔은 짧게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유언장이 아닙니다. 이건………고발장이군요.”
일반적인 유서는 사후에 재산분배나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전하는 인사와 당부 따위로 채워지기 마련.
그러나 레이첼의 유언장은 클로 드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할 뿐, 그녀 개인에 대해서는 그 어떤 내용도 적혀 있지 않았다.
두 번째 유서는 아주 간략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글을 보고 계신 당신께. 제게 너그러움을 베풀어 주신다면 다만 이 한 가지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이 레이첼이 선황 폐하를 위해 일했다는 사실은 끝까지 비밀로 해 주세요.
이 사람의 이름이 너무 더러워진 관계로, 선황께 누를 끼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레이첼이 남긴 개인적인 당부라고는 고작 이 정도가 다였다.
"알아보니 재산마저도 알아서 처분될 수 있도록 사전에 다 처리를 해 둔 것 같습니다."
현장을 보면 클로드가 이도엘이 당한 방식대로 레이첼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게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제가 봤을 때 결정하실 수 있는 분은 전하, 아차 실수. 폐하뿐이신 것 같습니다.”
“유지를 존중해야지.”
마테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뭘 어쩌겠나.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인데.”
그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릴리에이 입을 열었다.
"폐하, 가능하시다면 제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한 가지를 더 청하고 싶습니다만…….”
* * *
얼마 후, 클로드와 레이첼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공표되었다.
그와 동시에 클로드의 죄상이 '익명의 증인'의 입을 빌어 대대적으로 밝혀졌다.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범죄에 사람들은 공분을 터트렸다.
하지만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할 클로드는 이미 죽었다.
결국 그에 대한 분노는 고스란히 새 황제인 마테오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모든 것이 원래 그래야만 했던 방향대로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막혔던 둑이 터지면 물길이 원래대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마테오는 순조롭게 황제가 되었다.
죽기 직전 선제후 회의에 의해 황제에서 대공으로 격하된 클로 드는 황제 시해에 대한 죄상이 드러남으로써 계승권마저 박탈당했다. 클로드의 치세는 황제의 치세가 아닌 로가디스 대공의 반역으로 기록되었으며 공식적으로 무덤을 남기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한때나마 황제였고 날 때부터 황족이었던 클로드의 처지가 이런데, 레이첼에게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릴리엔은 모든 일이 정리된 후, 이도에 황제가 묻힌 엘라한 교회 뒤 작은 동산에 세간 사람들 그 누구도 모르게 작은 비석 하나를 세웠다.
동산을 뒤덮도록 그늘을 드리우는 아름드리나무의 굵은 뿌리 아래, 선황이 영면하는 교회를 바라보도록 세워진 작은 비석에는 이름 없이 이런 비문만이 단출하게 새겨졌다.
[남겨진 사람들이 행복하도록 애쓴, 당신의 사람]
14. 에필로그.
인간 세상의 놀랍고도 신비한 점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시간은 흐른다는 점이다.
인세에서 그 어떤 끔찍한 아귀다툼이 있든, 시간은 뭇 사람에게 공평하고 우직하게 흐르며 상처를 씻어 내고 기억을 흐린다.
클로드와 애첩의 몰락과 동반자살 소식은 제국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던졌다.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위한 방법은 간단했다.
하나, 시간이 흘러야 했다.
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야 했다.
전자는 사람의 소관이 아닌 신의 주관이었으므로, 마테오의 측근들 사이에서는 후자에 집중하자는 쪽으로 여론이 모아졌다.
"폐하, 생각해 보았는데 최대한 빨리 즉위식을 치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음…… 숙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한때는 반했었고 지금은 존경하는 숙모, 릴리에의 말에 마테오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동의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무래도 즉위식을 좀 미뤄야겠습니다.”
마테오는 그날의 섣부른 결정을 장렬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이런.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나, 조카야.”
“제 즉위식을 미루는데 왜 숙부 님께서 큰일이 나시죠.”
“그야 네가 황제가 되어 이 집을 떠나는 날을 내가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
눈 밑 그늘이 커튼처럼 턱까지 치렁치렁한 마테오가 다미언을 휑하게 노려보았다. 다미언은 언제나처럼 빤질빤질 깐 계란처럼 예뻤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대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는 뜻이다.
“숙부님의 소원을 들어줄 마음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이러다 제가 죽을 것 같습니다.”
즉위식을 앞둔 예비 황제는 현재 클로드 루펜바인이 제국 전반에 걸쳐 싸지른 과오를 청산하는 업무에 매몰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원로 귀족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황후도 없이 즉위하는 법은 없습니다!' 라며 드러눕는 바람에 즉위식과 동시에 결혼식을 준비하는 중이기도 했다.
“제가 죽으면 황제가 되셔야 하는 거 아시죠?”
씨알도 안 먹힐 협박을 시도하는 가여운 조카를 향해 다미언은 너그럽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연장자 된 도리로서 다정하게 충고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인간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단다."
“진짜 죽는다니까요, 진짜로.”
“겪어 봐서 아는데 엄살도 좀 살 것 같아야 나오는 거야. 정말 죽을 것 같으면 이렇게 쓸데없이 나불대는 데 소모되는 시간과 정신력마저 아까워지는 법이거든.”
싫은 사람의 헛소리보다 맞는 말이 더 끔찍하다는 법칙에 따라, 마테오는 울컥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쓸데없이 나불댄다 이 말이시죠?”
“네 인지 기능이 온전한 것 같아 기쁘구나.”
기쁘긴 개뿔이. 마테오가 이를 갈았다.
“제가 예비 황제라는 걸 잊은 건 아니시길 바랍니다.”
“네가 황제면 뭘 해.”
다미언의 입가에 순도 100%의 비웃음이 어렸다.
“내가 다미언 루펜바인인데?"
그랬다. 상대는 군대를 동원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무력의 소유자였다.
얄미운 숙부에게 시비 하나 마음대로 걸 수 없다니. 마테오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댓 발 내밀고 투덜거렸다.
“황제 별거 없네.”
“그러게. 내 둘째형도 진작 그걸 깨달았어야 하는데 말이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황제니 뭐니 하는 게 다 뭐란 말인가.
부질없는 권력 놀음이었다. 클로 드가 다미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제 목을 벨 수 있다는 절대적인 진리에 납득하기만 했더라면, 장담컨대 아마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마테오는 슬슬 할 일은 많은데 주변에서 얼쩡대기만 하는 삼촌의 존재에 짜증을 넘어 울화가치밀기 시작했다.
“좀 안 가십니까?”
“응, 안 가.”
“저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다미언이 불쑥 제 손을 들어 보였다. 기괴하게 뒤틀린 검은 손이었다.
“……그게 왜요?”
마테오는 놀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약간 실패했다. 다행히 다미언은 마테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침에 좀 화나는 일이 있어서 이렇게 됐다는 다미언의 말에 마테오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제가 알기로 숙모님께선 그 정도에 놀라실 분이 아닌데.”
“아니지만 보기 흉하잖아.”
다미언이 즉시 받아쳤다.
“이왕이면 예쁜 모습만 보여 주고 싶거든.”
마테오는 잠시 침묵한 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숙모님께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피신할 겸 업무에 압사되기 직전인 저를 찾아와 농락하고 계신 겁니까?”
“농락이라고 할 것까지야.”
아니, 이게 농락이 아니면 뭔데?
기가 막혀서 더 상대하고 싶지가 않았다. 마테오는 입씨름 대신 보다 간편한 방법을 택했다.
“나가세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더 괴롭히면 네가 이 집에서 나가는 그날이 미뤄질 것 같아서 말이야.”
사사건건 끝까지 얄미운 사람 같으니. 마테오는 혀를 차며 다 미언의 얄미운 뒤통수를 곱지 않게 바라보았다.
가장 짜증나는 건 그러면서도 예전만큼 숙부가 불편하지는 않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둘 중 누구 하나는 어른이 되고 있다는 건데, 마테오가 생각하기에 그게 절대 다미언 같지는 않았다.
* * *
내키는 만큼 조카를 들들 볶은다미언은 만만한 아이반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너도 바쁜 모양이군, 아이반.”
“나라가 개판이라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하시다기에. 뭐 따로 시키실 것도 없잖아요?”
그렇기야 했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면 없는 일이라도 짜내고 싶어진다.
다미언이 막 심술을 부리려던 찰나, 아이반이 막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비전하께서 전하를 발견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비전하께 먼저 알리라고……전하?”
아이반이 고개를 들어 보았을 때, 다미언은 벌써 사라져 버린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