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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154화 (154/155)

154화.

“아니, 이 인간이 진짜?”

황당해진 아이반이 등 뒤에서 무슨 욕지거리를 지껄이거나 말거나.

다미언은 복도를 날렵하게 걸어 나갔다. 서류를 나르던 심복들이 황급히 대공 전하를 피하며 재주좋게 고개까지 숙였지만 다미언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계절은 벌써 여름이었다.

마테오와 아이반은 그냥 바쁜게 아니었다. 온갖 국가 중대사가 집약된 문제의 즉위식 날짜가 코앞에 닥쳤기 때문이었다.

오늘 다미언은 그의 머리색과 날씨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레몬 빛 도는 크림색 셔츠에 베이 지색 바지만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잘 어울리는 조합이기는 했으나 아무리 집 안이라고 해도 대공전하의 차림이라고 하기에는 좀 단출한 면이 있긴 했다.

지나치게 자유로운 차림의 다미언이 아무렇게나 팔을 뻗어 복도를 장식한 과일 바구니에서 빨간 천도복숭아 하나를 잽싸게 낚아챘다.

한 입을 베어 물자 입 안에서 향기로운 즙이 가득 터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미언 루펜바인은 아내가 빠진 세상 따윈 무채색으로 인식하는 중증 환자였으므로 감흥 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계산이나 할 따름이었다.

'할아버님께서 비를 위해 온갖 종류의 복숭아나무를 죄다 때려 박아 과수원을 차리셨다더니, 과연…….’

과즙이 가득한 복숭아가 한 입더 입 안에서 터지듯 으깨졌다.

선대 헤멘린나 대제후가 횡포나다름없는 권력 남용으로 저 먼 나라에서 어마어마한 황금을 주고 들여온 복숭아나무들은 체계적이고 세심한 관리 끝에 완벽하게 이 나라에 뿌리를 내렸다.

대제후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피를 나눈 손자들보다 릴리 엔이라면 더 껌뻑 죽는 노인은 죽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복숭아나무를 사들여 댔다.

오죽했으면 사교계에 대제후께서 말년에 복숭아나무 수집이라는 기괴한 취미에 발을 들이셨다.

는 말이 나돌았을까.

그 대제후께서 돌아가신 지금도 복숭아는 철마다 달고 맛있었다.

지금도 릴리엔은 복숭아를 아주 좋아했다.

다미언과 모종의 연결이 생긴 뒤로 천천히 건강 상태가 개선되고는 있었지만 릴리엔은 여전히 릴리엔이었다.

사소한 일로 열이 오르거나 혹은 열조차 올리지 못하며 픽 쓰러지면 쉽게 입맛을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복숭아라면 몇 조각 집어먹기는 했다.

모린 부인을 비롯한 가내 사용 인들은 사랑하는 여주인의 취향을 반영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본격적인 복숭아 철이 되자마자 저택은 복숭아 향기로 뒤덮였다.

지금도 주방에서는 잼을 만들고 청을 담그고 병조림을 졸이고 있었으며 수도의 이름난 조향사는 릴리엔을 위해 복숭아 향을 하트노트로 삼아 특별한 향수를 조제하는 중이었다.

다미언은 그 귀한 복숭아를 원수의 심장을 씹듯 잇새로 짓이겼다.

'……짜증나.’

이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추론이란 다음과 같다.

'대공 전하께서는 복숭아를 싫어하시나?'

정답은 아니었다. 다미언은 복숭아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째서 할아버님께서 저보다 더 비를 먼저 알아서 비가 제일 좋아하는 복숭아 과수원을 선물해 주셨지?'

심지어 그 과수원에는 없는 복숭아나무마저 없었다.

'노인네가 진짜. 적당히 좀 하실 것이지.'

선수를 빼앗긴 다미언은 얄미운 복숭아들을 차마 쥐어 터트리지 못해 이로 씹어 죄다 으깨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흠?”

다미언의 예민한 청각에 릴리엔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복숭아 으깨기에 너무 열중한 탓이었나 보다. 다미언은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3층 창턱을 붙잡고 휙 하니 날렵하게 몸을 넘겼다.

“이런, 전하……!”

사람들이 깜짝 놀랐지만 다미언은 어느새 2층 발코니의 지붕을 밟고 도약해서 반대편 별채 지붕 쪽으로 몸을 피한 뒤였다.

제국 루펜바인이 망하고 맨몸으로 말 안 통하는 타국에 떨궈 놔도 도둑질로 충분히 벌어먹고 살법한 신기였다.

다미언이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 입단속을 하라는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복도 저편에서 릴리엔이 나타났다.

오늘도 릴리엔은 예의 그 소로 리티 동기들과 함께였다.

'실내장식에 일가견이 있다는 동기가 즉위식 직후 손님맞이를 위해 내장을 바꾸는 걸 도와준다.

고 했다던가.’

다미언은 릴리엔이 하는 이야기라면 놓치는 법도 잊어버리는 법도 없었다.

타인이 저와 릴리에의 보금자리에 초대받는 건 여전히 달갑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가까이서 들여다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내의 얼굴을 멀리서 바라만 보는 기분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오호.’

아랫사람들이 보여 주는 벽지나 페인트 색깔, 커튼지 따위를 보고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릴리엔은 완전히 타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미언은 어느새 릴리에의 저런 다정하지만 정중하고 차분한 태도가 꽤 낯설어졌다는 걸 자각했다.

'그건 즉, 나의 비께서 이제 내게는 저런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거의 보여 주지 않게 됐기 때문인 거지…….’

슬금슬금 좋아지던 기분이 확좋아졌다.

'나쁘지 않군.'

역시 가끔씩은 멀리 보아야 새로운 사실을 깨닫기도 하는 모양이다.

다미언은 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릴리에이 이쪽을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되지 않았다.

거리가 제법 되는데다 그의 비는 주변 상황에 그다지 예민하게 구는 편이 아니…….

그때, 릴리엔을 둘러싼 여자들 중 가장 키가 작은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이름 뭐였지, 솔 뭐라고 했는데.’

가장 애교 많고 머리도 좋은 솔라리아였다. 릴리엔을 좋아하는 순서로도 만만치 않아서 다미언이 소로리티 아가씨들 중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내 비에게 달라붙는…….’

그건 솔라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다미언과 솔라리아의 미간이 거울처럼 함께 불쾌감으로 찌푸려졌다. 그와 동시에 솔라리아가 릴리엔을 불렀다.

'아 이런, 제기랄.’

다미언의 소재를 일러바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미언은 피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급하게 도망가기에는 여러모로 모양이 빠졌다.

죽어도 아내 앞에서 모양이 빠지기는 싫었다.

게다가 장소가 장소니 안심이었다. 릴리엔은 죽었다 깨어나도 지붕까지 다미언을 잡으러 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미언은 릴리에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잡혀 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미언을 발견한 릴리엔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표정만 봐도 “전하, 대관절 왜 거기 계십니까?” 하는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다미언은 그냥 실실 웃기로 했다.

평범한 사람이 했다면 그냥 미친 것 같았겠지만 다미언은 외모가 워낙 그럴싸한 덕에 괜찮아보였다.

결국 릴리에도 포기했는지ㅡ다미언은 긍정적으로 릴리엔이 자신의 미인계에 넘어온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ㅡ 절레절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미언에게 손을 흔들었다.

릴리엔의 나직한 웃음에 홀려 똑같이 손을 흔들려던 다미언은…….

‘아차..'

지레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흠칫 손을 감추고 말았다.

"......?"

릴리엔이 의아한지 고개를 약간 기울였지만 곧 솔라리아가 얄밉게 주의를 돌리는 통에 주의를 빼앗기고 말았다.

다미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안 들켰겠지?'

꼬리털을 빳빳하게 세운 고양이처럼 놀란 다미언은 생각했다.

천만다행으로 그의 사랑하는 릴리엔은 눈치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래, 눈치 못 했을 거야……….’

소로리티 사람들과 함께 다시 본래 대화 주제로 돌아간 릴리에의 뒷모습을 보니 안도감과 함께 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설마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게 아닐까.

기분이 가라앉은 다미언은 옥상에서 슬그머니 몸을 감췄다.

* * *

여름 나절의 해는 길었다.

노을이 바닥에 드리울 때까지 다미언은 자기만 아는 비밀 장소에 아무렇게나 숨어 있었다.

제멋대로인 고양이 같은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다미언을 찾지 않았다.

릴리엔은 아무래도 그를 아예 잊어버린 모양이었고, 애초에 해야 할 일을 아침에 모두 마쳐 놓은 덕분에 부하들도 그를 찾지 않았다.

다미언은 나뭇결이 거칠게 드러난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설마 권태기인가?"

그와 비는 일반적인 부부 관계를 넘어서 서로를 완벽하게 소유한 사이였다. 적어도 다미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미언은 릴리에 한 사람만으로도 감당하기 벅찰 만큼 기쁘고 만족스러웠지만 그릇이 큰 릴리 엔은 그 한 사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한테 벌써 질리신 걸까. 아니면 비께서는 부부 관계 이외의 스릴을 원하신다거나…….”

물론 강직하다 못해 우직한 릴리엔 이슬라르는 외도 따윈 꿈도 꾸지 않는다. 다미언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들을 지껄인 이유는 당연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대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눈을 감은 채로 다미언이 히죽웃었다. 릴리엔은 한숨을 쉬었다.

다미언은 그 떨어지는 한숨마저 좋았다.

“오셨군요.”

“예, 왔습니다. 전하를 찾으러요. 저녁 식사를 거르면 안 되니까요.”

다미언은 웬만한 창검보다 강력한 자신의 끼니를 염려하고 챙겨주는 것도 귀찮지 않고 좋기만 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찌 아셨어요?”

다미언의 그 말에 릴리엔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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