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그들이 있는 곳은 작고 초라한 다락방이었다.
몇 년째 사용하지 않은 가구 따위가 흰 천에 덮여 보관 중인, 깨끗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장소.
다만 큰 창문을 통해 수도의 정경을 바라볼 수는 있었다.
릴리엔은 대답 대신 치맛자락을 추스르며 다미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강렬하게 부서지는 직선의 노을로 가득한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에 선황께서 영면해 계신 묘지가 보이는군요. 우연인가요?”
“우연이겠지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저희 형님께서는 생각보다 주도면밀한 분이셔서.”
“그랬나요?”
바닥에 누운 다미언이 빙글 몸을 돌려 릴리엔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옷자락에서 풍기는 릴리엔 향기를 맡으며 웅얼거렸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큰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예전에는 좀 더 잘 알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응석을 부리다가 다 미언이 아차 굳어졌다. 아직 제 손이 기괴하게 변형된 상태라는 걸 뒤늦게 자각한 탓이었다.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
“비…….”
다미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릴리엔이 뭐가 문제냐는 듯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 지어 보였다.
기괴하고 끔찍한 손이 제 몸에 닿아 있는데도 릴리엔은 저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처음 겪는 상황이 아닌데도 다미언은 아직도 신기하면서도 겁이 나 차마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혹시나 이 손을 움직이면 릴리 엔의 표정이 일그러질까 봐 두려웠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도 학습된 두려움의 뿌리가 깊었다.
그제야 릴리엔의 눈에 다미언의 그런 두려움이 생생하게 포착됐다.
'음, 이거였구나.'
아침부터 사람을 피하기에 대충 예상은 했지만……. 릴리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자기 살갖 위에 얹힌 다미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어.
"도망가지 않아요.”
도망가지 않을 리가 없는데
“당신은 사랑스러워요."
도망가지 않는다.
다미언의 상처 난 마음에 릴리 엔의 다정함이 한 겹 더 내려앉았다. 다시 한번 불신이 엷어지고 두려움으로 차가워진 심장이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릴리엔이 다미언의 손을 살그머니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다미언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이번에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이 손으로 튜린을 구해 주신게 새삼 감사해서요.”
“그 외에도 여러 번 저를 살려 주기도 하셨죠.”
이 손은 릴리엔을 구한 손이었다.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아 한 번 더 말씀드리는데, 당신을 사랑해요.”
"......."
“들어요. 나는 이 손이 너무 보기 싫고 끔찍하지만 당신을 사랑해서 견디는 게 아니라…….”
비좁고 초라한 나무 다락을 복숭아 과즙 같은 황금빛 노을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황폐하고 피폐한 다미언의 내면을 릴리엔의 말이 황금처럼, 햇살처럼 채웠다.
“이런 손까지 포함해서 당신을 사랑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그런 뜻이에요.”
“저는…….”
다미언이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내게는 당신이 인생에서 처음 가져 본 행운이에요. 나는…"
다미언은 말하지 못했다. 가끔씩은, 사실 가끔보다 자주 릴리 엔이라는 행운을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렵다고.
하지만 릴리엔은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제가 행운이면 전하께서는 기적처럼 저를 살려 주셨어요.”
사실이었다. 릴리엔은 다미언이 아니었다면 천천히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비밀인데, 사실 저는 가끔 전하께서 나를 살려 주기 위해 아픈 것 같아서 미안해진답니다.”
"어째서.”
다미언이 만난 최고의 행운이 바로 그것인데.
드물게 아내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부정하려는 다미언을 보며 릴리에이 밉지 않게 뺨을 꼬집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요.”
“으웨.”
다미언이 발음을 뭉개자 릴리에 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별로 안 세게 꼬집었습니다만. 지금 이거 애교 피우시는 겁니까?”
“엉악앙이아…….”
정확하다는 말을 뭉개면서 다미언이 씩 웃었다. 릴리에도 곧 따라 웃고 말았다.
실없이 웃으며 사랑하는 아내의 어깨에 햇살과 함께 이마를 기대고, 다미언은 중얼거렸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아요.”
이 방은 그랬다. 어린 시절 다 미언이 처참한 모습으로 갇혀 지내던 별궁의 그 초라한 방을 닮았다.
악몽 같은 기억이 있는 곳이지만, 다미언에게는 이상하게 도망을 칠 일이 생기면 이런 다락방을 찾는 습관이 있었다.
“사람이 참 이상하죠.”
“그렇지 않아요, 전하. 저는"
“괜찮아요. 비께서 제게 좋은 기억을 주셨으니까.”
유쾌하지 않은 자기 과거 이야기로 무거워지려는 분위기가 싫었다. 다미언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고 미모를 이용해 황홀하게 웃어 보였다.
“예를 들어 친애하고 존모하는 루펜바인의 대공비께서 시아버님 되시는 황제 폐하께 면 요리로 모자를 만들어 주셨던 기억이라 든가.”
릴리엔은 결국 끙 소리를 냈다.
“민망하네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사실 그보다 다른 순간들이 더 다미언의 기억 속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다미언은 일부러 농담처럼 그 순간만을 언급했다.
그때 릴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웃을 수 없으실 겁니다. 저는 사실 그때 그보다 더 엄청난 짓도 저지를 생각이었거든요.”
“설마요.”
다미언의 릴리에 이슬라르는 고결한 사람이었다. 그 릴리에이 아무리 기억 속이라지만 시아버지의 정수리에 음식물 세례를 퍼부은 것이다.
릴리엔의 상식과 도덕으로 용납되지 않는 파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미언은 그 기억을 떠올리면 유쾌하고 행복해졌다.
‘그만큼 비께서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뜻이니까……….'
배부른 고양이처럼 미소 짓는 다미언에게 릴리에이 약간 미안한 얼굴로 실토했다.
“전하께서 절 좋게 봐 주시는 건 좋지만 전 사실 황제 폐하를 죽일 뻔했습니다.”
"예?”
…잠깐, 누가 뭘 죽여?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야 늘 많았지만……….'
릴리에 이슬라르가?
다미언의 선량하고 다정한 릴리엔이?
고결하고 강직한 골수 튜린 꼴통인 릴리에이……?
진심으로 놀라워하는 다미언의 반응에 릴리에이 부끄러운 듯 변명했다.
“순간적으로 그럴 뻔했다는 거지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
다미언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
는 듯 멍하니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릴리엔은 '정말로 아주 잠깐만 그랬다'며 거듭 변명했다.
충격을 받은 다미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같아.”
"네?”
“저 또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어쩌죠?”
다미언은 조각난 영혼의 기억을 얻고서 감히 생각했다. 여기서 더 사랑에 빠지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고.
모든 기억이, 경험이, 감각이 다 미언이 릴리엔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있었다.
릴리엔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감정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다미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고장 나버렸을지도 모르는 광적인 사랑.
망가져 버린 다미언의 체계에는 릴리엔이라는 명령어밖에 듣질 않는다.
릴리엔은 그의 성역이며 도덕적 기준이었다. 아니, 단순히 기준이 아니라 다미언의 헤게모니 그 자체였다.
“난 이 세상 따위 전부 엿이나 먹었으면 좋겠는데, 당신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건 싫지 않아.”
다미언은 마음만 내킨다면 대륙전체를 재앙처럼 휩쓸 수 있는 남자였다.
릴리엔이 쥔 건 이 지상의 생명체 전체를 절멸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가진 폭탄의 격발장치였다.
이 세상에게는 감사하게도 릴리 엔은 올곧고 강직하며 도덕적이다. 흔들리지 않는다.
다미언은 릴리엔의 기준에 맞춰서 살고 싶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다미언은 처참하게 망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릴리엔은 괜찮았다.
그 망가진 것마저 사랑스러웠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
“길들인 책임은 끝까지 지겠습니다.”
릴리에 이슬라르는 튜린 사람이다.
튜린 사람은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뱉은 말을 철회하지 않는다.
“정말이죠?”
“예.”
릴리엔은 미사여구 없이, 하지만 진심을 꽉 담아서 대답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만큼은 자신 있거든요.”
결국 다미언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참 믿음직하네요."
“믿음을 드릴 수 있었다면 다행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릴리에이 앗 할 새도 없이 몸이 뒤로 넘어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는 어느새 다미언의 두 팔 안에 갇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 이쯤에서 저희가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그만 슬슬 저희 사이에 아이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요?”
다미언은 태연하게 폭탄을 터트렸다.
“전하, 아이가 있었으면 하시나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전 비께 서 계셔 주신다면 나머지는 아무 래도 상관없어서.”
다미언이 씩 웃었다. 그의 분위기가 어느새 농염하게 무르익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도록 공들이는 그 일을 제가 제법 좋아하거든요.”
“전하…….”
난감해하는 릴리엔을 다미언이 달콤하게 재촉했다.
“행복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 무르지 않으실 거죠? 비께서는 튜린 사람이시니까.”
“세상에, 그러니까 그게 전하의 행복에 필수 불가결 요소란 말인가요?”
“그럼요.”
다미언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로 즉답했다.
“저는 튜린의 릴리엔께서 하신 약속을 철석같이 믿기로 결심했답니다. 그러니까 지켜 주실 거 죠?”
“그야 물론 그렇습니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에도 릴리엔은 약속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아마 내일이면 다시 이 행복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릴리에이 그를 촉촉하게 달래 준 지금만큼은 마음껏 행복할 수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계속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다미언은 행복해졌다.
덕분에 세상도 여전히 평화로울 수 있었다.
〈튜린의 릴리에〉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