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중부 대륙의 소환술사 -1 >
“흐음, 역시 이렇게 더운 날엔 그늘 밑에 누워서 낮잠 한 숨 때리는 게 최고란 말이지.”
파이로 영지 구석의 둔덕 위에 지어져 있는 정자.
그 위에는 뿍뿍이를 벤 카이자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훈이가 삐죽거리며 앉아 있었다.
“쌀쌀한 가을 날씨에 덥다니. 역시 정상은 아니라니까.”
훈이의 구시렁거림을 들은 카이자르가 번개같이 그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콩-
“아야!”
카이자르를 한 차례 째려본 훈이.
하지만 훈이는 양 볼만 빵빵하게 부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쓸 데 없는 말 할 시간 있으면 레벨이라도 올리고 와라 꼬마야. 너무 허접해서 상대해주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구나.”
카이자르의 빈정거림에, 머리맡에 있던 뿍뿍이도 동조했다.
뿍- 뿌뿍-
하지만 모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는 훈이.
그리고 그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10분 전, 훈이는 카이자르에게 무참히 깨진 것이다.
심지어 카이자르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싸웠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훈이는 카이자르 생명력의 10%도 채 깎지 못했다.
‘괴물같은 놈! 내가 임모탈의 능력만 손에 넣는다면 반드시 이 치욕을 갚아줄테다!’
절치부심하는 훈이를 보며, 뿍뿍이는 뭐가 좋은지 뿍뿍거리며 웃어댔다.
그에 훈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넌 왜 웃어, 머리만 큰 거북이가?!”
발끈한 훈이가 뿍뿍이를 위협(?) 했지만, 뿍뿍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바로 카이자르라는 보호자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끄럽다, 쓸모없는 부하 놈아.”
훈이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주인! 왜 저런 덜떨어진 거북이를 감싸고 도는 건데?! 쟤는 무슨 쓸모가 있어?”
하지만 카이자르는 훈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 뿍뿍이는 베고 누우면 얼마나 머리가 시원한데. 게다가 목마를 땐 시원한 물도 공급해준다.”
물의 장막 고유능력을 장착한 뒤로, 뿍뿍이는 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
카이자르의 말이 이어졌다.
“반면에 꼬마 네놈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하아….”
혀를 차며 훈이를 보고 있던 뿍뿍이는, 훈이가 눈을 부라리자 혀를 쏙 내밀더니 껍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에 훈이의 인내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씨… 조금만 기다려라 주인. 내가 금방 강해져서 돌아온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한 훈이는 몸을 휙 돌려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런 그를 향해 카이자르가 한 마디를 던졌다.
“일주일 내로는 돌아와라 꼬마. 영주놈이 일주일 뒤에는 또 카이몬 놈들이 쳐들어 올 거랬다.”
훈이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휙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나 쓸모없다며! 왜 또 오라 하는 거야?”
“그래도 싸울 땐 네놈이 옆에 있어야 덜 심심하다.”
“….”
“꼬마놈의 쓸모를 드디어 찾은 것 같군.”
카이자르의 말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낀 훈이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더러워서라도 빨리 임모탈의 권능을 얻어야겠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카이자르에게 조금씩 길들여지고 있는(?) 훈이를 보며, 뿍뿍이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뿍- 뿌뿍-
그리고 뿍뿍이를 향해 시선을 돌린 카이자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뿍뿍이 너, 영주놈에게 가 봐야 되는 거 아니냐?”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뿍뿍이의 동공.
뿌욱…?
카이자르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네 친구들은 전부 저기서 벽돌 나르고 있는데, 너만 여기서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는 거냐?”
아픈 곳을 찔린 뿍뿍이가 카이자르를 째려봤다.
뿍- 뿌뿍-!
그에 제 발 저린 카이자르가 허공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아, 나야 벽돌이나 나르기엔 고급인력이기도 하고… 원래 영주 놈 말을 안 들으니까 괜찮지만, 너는 그러다가 미트볼 끊길 수도 있잖아?”
뿍뿍이의 동공지진을 보던 카이자르는 벌러덩 누워버렸다.
“난 잠이나 한숨 더 자련다.”
* * *
루스펠 후방거점의 임시막사.
총 예닐곱 정도의 인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루스펠 제국 소속 거대길드들의 길드마스터였다.
물론 그 안에는 일전에 긴급회동을 가졌던 삼대 길드의 마스터인 사무엘진과 마틴, 그리고 로이첸이 포함되어 있었다.
로이첸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현 상황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고….”
로이첸의 시선이 사무엘진을 향했다.
“사무엘님. 다크루나 길드가 깨진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의 물음에 사무엘진이 표정을 살짝 구기며 대답했다.
“그걸 제게 묻는 이유가 뭡니까?”
그에 로이첸이 인상을 굳히며 대답했다.
“몰라서 그러십니까? 지금 이 계획을 처음에 발의하신 분이 사무엘님이니까 그러지요.”
“그게 무슨 상관인지…?”
능청을 떠는 그를 보며 로이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로터스 길드의 선전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우리가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더라면 분명히 최전선에서 중상위권 길드들의 거점들을 지켜가며 카이몬 제국군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최근 로터스 길드의 선전을 보며, 로이첸은 며칠 전 사무엘진과 마틴을 막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이기적으로 전략을 짜지 않았더라도, 분명 막아낼 다른 방법이 있었던 거였어.’
그가 후회하는 이유에는 전방에서 희생될 중상위권 길드들에 대한 미안함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국 차원에서의 손실이었다.
사무엘 진의 전략은 지금 당장이야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전략었이지만, 결국 그들의 이번 선택으로 인해 루스펠 제국의 중상위권 길드들은 중부대륙에서 성장할 기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루스펠 제국의 중상위권 길드들은 카이몬 제국의 중상위권 길드들에 비해 지속적으로 성장이 더뎌질 수 밖에 없고, 이것은 곧 루스펠 제국 전력의 치명적인 약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유저들의 전력이 제국군보다 훨씬 약하기에 많이 티가 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저들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질 것이었다.
비교적 허약한 중상위권 길드들의 전력이 아쉬워질 날이 분명 올 것이라고 로이첸은 생각했다.
잠시간 아무 말이 없던 사무엘진이 로이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로터스 길드가 다크루나 길드의 병력을 막아낸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부분임도 인정하고요.”
좌중의 시선이 사무엘진의 입을 향해 모였고,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로터스 길드의 영지를 제외하면 그만한 방어력을 갖춘 거점지는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아니, 파이로영지가 가진 방어력의 절반 수준이라도 다른 길드들이 구축했더라면, 저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봤을 겁니다.”
사무엘진의 말도 분명히 일리는 있었다.
그것은 지금 최전방 지역의 전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른 길드의 거점들은 파이로 영지만큼 대규모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님에도 저항한번 해 보지 못한 채 모조리 점령당한 것이었다.
로이첸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 사무엘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전방으로 병력을 이끌고 나가 빼앗긴 거점들을 수복하자는 얘기가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로이첸은 결국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정말 늦었지.’
로이첸의 입이 열렸다.
“애초에 우리 모두의 잘못인 것 같습니다. 루스펠제국 소속의 길드들이 더 빨리 단합했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카이몬 제국군에게 중앙지역을 모조리 빼앗기기 전에 전방 거점지를 차지하고 있던 길드들이 방어력 구축에 힘을 썼어야 했었는데….”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빨리 움직였더라면 이렇게 쉽게 대륙 중앙지역을 전부 내어주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사무엘 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후방 방어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저들을 막아내다 보면 역전의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틴도 그의 말에 동조했다.
“사무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기회가 오면 그때 놓치지 않고 잡으면 됩니다.”
다들 두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위기였지만, 로이첸 만큼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번 벌어지기 시작한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날텐데… 어떻게 저렇게 안일한 생각들을 할 수 있는 건지….’
완벽한 승기를 잡은 카이몬 제국 소속의 길드들은, 이제 스노우볼을 굴려가며 더욱 차이를 벌릴 것이 분명했다.
로이첸은 짧게 한숨을 쉬며 임시막사의 바깥으로 나왔다.
‘하긴, 지금까지 이렇게 안일하게 대처해왔으니 계속해서 카이몬 제국 소속의 길드들에게 밀려왔던 거겠지.’
전체 길드랭킹 1,2위인 다크루나길드와 타이탄길드에 비해 루스펠 제국의 3대 길드는 항상 한발 늦은 움직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차이가 계속해서 쌓여 결국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리라.
로이첸은 길드 거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카이몬 제국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조금이라도 내실을 키우는 것 뿐 이었다.
* * *
한편 무너졌던 방어선의 구축이 거의 마무리단계에 들어가자, 이안은 홀로 영지를 나섰다.
이틀간 전투를 쉬었더니 몸이 근질거린 탓이었다.
‘카이몬 제국군에 포위되기 전에 최대한 사냥을 많이 해 놔야 겠어.’
아직은 주변 거점이 전부 점령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만 한다면 필드를 돌아다니며 사냥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완벽히 제국군에 포위되고 나면 꼼짝없이 영지 안에만 틀어박혀 있게 될 것이다.
‘다음 수성전 있기 전에 신룡이라도 부화시킬 수 있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이안은, 옆을 졸졸 따라오는 뿍뿍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뿍뿍아.”
뿍-?
“이 근처에 혹시 미 발견 던전 같은 거 없냐?”
종종 히든피스 헌터가 아닐까 할 정도로 놀라운 탐색능력을 보여주는 뿍뿍이.
그렇기에 이안은 약간의 기대를 하며 뿍뿍이를 응시했다.
하지만 뿍뿍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뿍- 뿌뿍-
이안이 실망스런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는 찰나.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안의 뒤를 따라오던 카이자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었다.
“영주놈아.”
“왜 가신님?”
“미발견 던전 같은 건 몰라도, 네가 흥미로워할 만 한 곳을 한 군데 알고 있다.”
오래 전 중부대륙을 무대로 전장을 휘젓고 다녔던 카이자르의 말이었기에, 이안은 반색하며 물었다.
“오! 가신님! 뭐 아는 거 있어?”
카이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도 잊고 있었던 곳인데… 방금 갑자기 생각났다.”
이안의 궁금증이 더욱 증폭되었다.
“어디, 어딘데! 빨리 얘기해봐.”
이안이 계속해서 재촉하자, 뜸을 들이던 카이자르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쏘아댔다.
“자꾸 귀찮게 굴면 말 안한다?”
그에 흠칫 놀란 이안이 시무룩한 표정이 되자, 카이자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홀드림의 무덤에서 북서쪽으로 움직이다 보면 커다란 바위산이 있다.”
이안을 비롯해 옆에 있던 폴린과 세리아도 카이자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위산의 중턱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치우면 그 안쪽에 셀라무스의 제단 이라는 곳이 있다.”
“셀라무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
이안이 고개를 갸웃 하는데, 뜬금없는 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용히 이안의 뒤를 따라오던 빡빡이였다.
[셀라무스…! 오! 셀라무스라는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 (7). 중부 대륙의 소환술사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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