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마수 라키엘 -3 >
* * *
마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종류의 전투는, 대부분이 대규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안과 같이 최상위의 랭커가 아니고서는 기본적으로 홀로 사냥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마계에서 솔로플레이가 가능한 유저들은, 이안을 비롯해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
심지어 캐릭터의 전투력이 막강한 유저이더라도, 명성이 낮다면 솔로 플레이가 불가능했다.
명성이 낮다는 이야기는 곧, 작위가 낮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했고, 그렇다면 고용 가능한 가신의 질적인 면과 양적인 면이 모두 부족하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공식 랭킹 8위이자, 180레벨의 전사 유저인 ‘카세일’이 바로 이러한 케이스였다.
그나마 그의 경우에는 캐릭터 전투력만 따지자면 정말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기에 120~130구역 정도는 솔로플레이가 가능했다.
하지만 중급 마수가 등장하는 순간, 그 조차도 홀로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는 결국 120대 구역에서 홀로 사냥했다.
“헐, 저기 봐. 카세일이야.”
“헉…! 정말이네? 한 자리 수 랭커도 120구역은 못 뚫는 거야?”
“글세, 카세일 정도면 다른 랭커랑 파티 맺고 들어가면 충분히 가능할텐데… 솔플 하려고 여기있나보지.”
“으… 징 하다. 저 정도면 저것도 병이야.”
그는 카일란 초기부터 독불장군으로 유명했으며, 하루 종일 죽어라 사냥만 하는 전투 중독 유저였다.
어떠한 길드에도 들지 않고, 어떤 퀘스트도 받지 않는 그가 지금까지도 10위권 안에 안착해 있다는 사실은 많은 유저들이 미스테리로 생각할 정도였다.
콰드득-!
카세일의 커다란 도끼가, 마계의 하급 마수인 라쿰의 머리통을 으깨었다.
[하급 마수 ‘라쿰’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2549800만큼 획득하셨습니다.]
[‘최하급 마정석’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읽은 카세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케이, 드디어 하나 추가했군.”
카세일은 열심히 마정석을 모았다.
반복사냥 하나 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있는 카세일.
그에게 마정석 노가다는 단지 ‘홀로 ’다음 맵에 넘어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적염룡의 전투도끼’ 아이템을 강화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적염룡의 전투도끼’ 아이템이 +4강에서 +5강으로 강화되었습니다.]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 카세일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그리고 그 순간, 마계 전체에 월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유저 ‘카세일’님이 +5강에 성공하셔 초월등급 장비를 획득하셨습니다.]
카세일은 ‘초월등급 장비’ 라는 생소한 단어에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아이템에 새로 생긴 초월옵션을 확인하고는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으하하핫! 이 내가, 최초로 5강에 성공한 게 분명해!”
카세일은 마계가 오픈된 지 일주일 만에 마계의 땅을 밟았고, 지금까지 거의 모든 시간 상주하며 하급 마수들을 사냥했다.
그런 그가 +5강에 성공했다는 월드메시지를 본 기억이 없었으니, 당연 자신이 처음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유저들도 마찬가지였다.
“와! 카세일이 리얼 노가다의 제왕이라더니 벌써 5강을 띄웠네.”
“그러게, 쩐다. 난 이제 3강 띄웠는데.”
“크으… 그나저나 5강되면 초월등급 이라고 새로 수식어가 붙는구나. 간지난다 진짜.”
카세일은 주변 유저들의 선망에 담긴 시선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 했다.
‘후후, 이 맛에 노가다 하는 것 아니겠어?’
그리고 사실 카세일이 비공개로 처리해 놔서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는 히든 클래스 유저였다.
무한 솔로 플레이와, 노가다만으로 지금의 카세일을 만들어 준 완소 히든 클래스!
카세일이 가진 히든클래스의 이름은, ‘론섬 워리어’로, 말 그대로 ‘고독한 전사’ 였다.
‘크크, 마계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순 없겠지만, 여기서 무한 노가다 하는 것 만으로 뒤처지지는 않을 테니까….’
론섬 워리어의 가장 큰 특징은 혼자서 다수의 적을 상대할수록 자신의 능력치가 증폭되고 적이 주는 경험치가 증가하는 사기적인 패시브 스킬이었다.
하지만 패널티도 있었으니, 경험치 증가 효과는 오로지 사냥으로 얻는 경험치 에만 적용된다는 점과, 유저가 됐건 NPC가 되었건, 한 명이라도 파티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 패시브가 해제된다는 점이었다.
그야말로 ‘고독한 전사’라는 수식어에 걸맞는 완벽한 패시브!
‘장비 모조리 5강까지 만든 뒤에, 119구역 한번 뚫어 봐야겠어.’
잠시 초월옵션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한 카세일은 다시 일어서서 전투를 시작했다.
‘최초로 초월옵션을 띄웠으니, 분명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인터뷰 요청을 해 올 테지?’
싱글벙글한 표정의 카세일.
공식 커뮤니티 메인에 자신의 이름 석 자가 며칠 동안 새겨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뿌듯함이 느껴졌다.
“자, 마정석을 내놔라 이놈들!”
번쩍 번쩍 빛나는 카세일의 도끼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반 유저들!
하지만 마지막 악세사리 하나까지 +5강을 맞춰놓은 불가사의한(?) 유저가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빡빡아, 귀룡의 가호 쓸 준비!”
[알겠다 주인.]
라키엘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불덩어리를, 이안은 창극으로 하나하나 쳐 내었다.
쾅- 콰쾅-!
연속으로 날아드는 흑빛의 화염구를 이안이 모조리 쳐 내자, 라키엘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포효했다.
끼아아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안을 향해 커다란 입을 쩍 벌리는 라키엘!
화르륵-!
라키엘의 입에서는 흡사 드래곤의 브레스를 연상케 하는 화염이 분사되었고, 이안은 다급히 몸을 굴리며 빡빡이에게 손짓했다.
“지금!”
[알겠다!]
그러자 빡빡이의 몸이 황금빛으로 빛나더니, 이안을 향해 금빛 사슬이 쏘아져 나갔다.
후우웅-!
쏘아진 금빛 사슬은, 라키엘의 화염이 도달하기 직전에 이안의 허리를 휘감았고, 그 즉시 이안의 주변에 누런 빛깔의 보호막이 형성되었다.
쾅- 콰콰쾅-!!
그리고 보호막에 부딪힌 화염의 광선은, 굉음을 내며 허공으로 흩어져 나갔다.
캬아악-!
라키엘은 분하다는 듯 씩씩거렸고,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귀룡의 가호 스킬은, 일정 시간동안 빡빡이가 자신과 연결된 대상이 받을 피해를 대신 받아주는 스킬이었고, 라키엘의 브레스로 인한 데미지를 빡빡이가 대신 흡수해준 것이었다.
물론 이안이 받을 데미지보다 더 증폭된 데미지를 입기 때문에, 빡빡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기는 했다.
하지만 대기하고 있던 세리아가 곧바로 다시 빡빡이를 치료하였고, 결과적으로 라키엘의 공격을 훌륭하게 막아낸 것이다.
[소환수 빡빡이의 고유능력인 ‘귀룡의 가호’ 효과로 인해, 107368의 피해를 흡수합니다.]
[소환수 빡빡이가 피해량의 138%인 148167만큼의 피해를 대신 받았습니다.]
[가신 세리아가 고유능력 ‘소환수 치유술’을 사용하여 빡빡이의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빡빡이의 생명력이 148167만큼 회복되었습니다.]
톱니바퀴 맞물리듯 연달아 발동되는 스킬연계.
덕분에 이안은 라키엘의 가장 강력한 스킬을 하나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후욱, 후욱.”
이안은 차오르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라키엘을 노려보았다.
“너, 인마. 형이 깜짝 놀랐잖아. 그렇게 스킬 두 개를 연달아서 쓰는 게 어디 있냐.”
날개를 퍼드득거리며 이안을 노려보는 라키엘.
그리고 바로 그 때.
라키엘의 깃털이 파란 빛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안의 두 눈이 이채를 띄었다.
‘오케이! 다시 신나게 두들겨 패 주마!’
파란 빛으로 불타오르는 깃털은, 라키엘이 ‘물리피해 면역’ 상태가 되었다는 증거.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이안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퍽, 퍼퍽-!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개처럼, 지그재그로 휘어있는 이안의 창극이 라키엘의 날갯죽지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상급 마수 ‘라키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라키엘의’ 생명력이 0만큼 감소합니다.]
라키엘이 물리피해 면역 상태가 되자마자, 이안이 공격을 시작한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이미 라키엘의 생명력은 게이지 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고, 이안의 공격이 두어 방만 들어가면 라키엘은 사망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요놈아, 데미지는 안 들어가도, 맞는 게 고통스럽기는 할 거야, 그치?’
이안이 창을 휘둘러 가격하는 모든 공격은 ‘물리’타입의 공격이었다.
다시 말하면, 물리면역인 상태의 라키엘은 이안이 아무리 때려도 죽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케엑-! 끼에엑-!
이안의 창에 사정없이 두들겨 맞기 시작한 라키엘이 괴성을 질렀다.
그 광경을 보던 카르세우스가, 빡빡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빡빡아, 저 광경…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에 빡빡이가 머리를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나도 그렇다. 문득 얀쿤 이라는 놈이 떠오르는군.]
카르세우스의 두 눈에서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주인이 우리를 저렇게 때리진 않겠지?]
빡빡이가 머리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나는 착한 거북이다. 주인에게 맞을 이유가 없다.]
[나도다. 나도 엄청 착한 드래곤이다.]
옆에 서있던 라이도 조용히 동조했다.
[나도… 착한 펜리르다….]
두려움에 떠는 소환수들과는 별개로, 계속해서 진행되는 이안과 라키엘의 전투.
소환수들은 빨리 나를 죽여달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라키엘을 조용히 외면했다.
유일하게 카르세우스만이, 측은한 눈길을 보내며 한 마디 조언을 해 주었다.
[빨리 항복해라 마수놈아. 나는 우리 주인 놈이 갖고 싶은 걸 포기하는 상황을 본적이 없다.]
그렇게 구타(?)가 시작된 지 15분 정도가 지났을까?
라키엘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 불꽃이 사그라들었고, 이안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라키엘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이안이 약간의 짜증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오, 진짜 너도 대단한 놈이다. 방금 또 죽을 뻔 했잖아.”
겉으로 보기에는 일방적인 구타광경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320레벨의 상급 마수인 라키엘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공격 하나하나가 위력적일 수 밖에 없었고, 두어 대 정도의 공격밖에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이안은 여러번 생사를 넘나들었던 것이었다.
크륵- 크르륵-!
라키엘은 날개를 힘없이 펄럭이며 이안을 노려보았다.
“자 우리 이제 그만 하자. 닭대가리.”
분한 듯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라키엘.
이안은 그런 라키엘을 향해 침착하게 시동어를 외쳤다.
“포획!”
그리고 이안의 손끝에서 뻗어 나가는 새하얀 빛줄기.
그것이 라키엘의 거대한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긴장되는 순간!
‘제발… 좀!’
사실 포획 시동어는 지금까지 이안이 수없이 많이 외쳐온 것이었다.
지금까지 포획하려 마음먹었던 몬스터를 포획에 실패한 역사가 없는 이안!
하지만 이렇게 되도 않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적은 없었고, 그랬기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신의 몸에 마족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습니다.]
[마족의 피를 얻기 전까지는, 마기를 가진 몬스터를 테이밍할 수 없습니다.]
[상급 마수 ‘라키엘’을 포획하는 데 실패하셨습니다.]
세 줄의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튕겨 나오는 새하얀 빛줄기.
벌써 열 댓 번이 넘는 이안의 포획시도였고, 그것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세르비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독종이로다, 독종이야. 반인반마가 되기 전에는 마수를 포획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설명했거늘….]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라키엘이 불쌍할 지경.
모두가 ‘이제는 그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라는 표정으로 이안을 슬쩍 쳐다봤지만, 이안은 창대를 다시 고쳐 잡을 뿐이었다.
이안의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확고했다.
“아직 부족한가보군. 조금 더 정성이 필요하겠어.”
뭔가 어휘 선택이 부적절해보였지만, 아무도 이안의 말에 태클을 걸 수는 없었다.
잘못 태클을 걸었다가는, 왠지 구타의 대상이 옮겨질 것만 같았으니까.
“야, 닭대가리. 다시 공격해 봐. 싸우자.”
이안의 도발에 반쯤 감겨 있던 두 눈을 다시 부릅뜨는 라키엘!
그렇게 또다시 전투가 시작되는 듯 했으나,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라키엘이, 돌연 이안의 앞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세르비안의 주름지고 작은 두 눈이 두 배 이상 커졌다.
[아니…! 이게 무슨!]
수 백 년간 마수에 대해 연구해온 그로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
하지만 이안은 별로 놀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잘 생각했어. 더 버텨봐야 서로 힘들었을 거야.”
모든 기력을 소진한 라키엘이 이안의 앞에 축 늘어져 버렸고, 그 순간 이안의 눈 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상급 마수 ‘라키엘’이 당신의 소환수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몸에 마족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으므로, 라키엘을 소환하여 부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라키엘’을 소환수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안의 한쪽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 (6). 마수 라키엘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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