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분란의 씨앗 -1 >
꿀꺽-
헤이스카의 도움으로 세라핌의 저택을 찾아간 이안은,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마른침을 삼켰다.
‘와… 이게 무슨 저택이야. 마왕성같이 생겼는데.’
분명히 세라핌 혼자 사는 저택으로 알고 찾아온 곳에는, 거의 북부대륙 로터스 영지의 영주성과 비슷한 규모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이안은 그 위압감에 위축되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이 길 따라서 쭉 들어가면, 세라핌을 만날 수 있는 건가?’
커다란 정원을 따라 구불구불 나있는 길.
특이한 것은, 온통 어둡고 칙칙한 검붉은 빛으로 가득했던 분노의 도시 안에, 어울리지 않는 예쁜 정원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었다.
그 풍경은 뭔가 이질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안은 뒤따라 걷고 있던 카르세우스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카르세우스, 이 안쪽에 인기척 같은 거 느껴져 혹시?”
잠시 걸음을 멈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카르세우스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글세, 잘 모르겠다, 주인. 이 정원 전체에 강력한 결계 같은 게 쳐져 있는 것 같다.”
분노의 도시 안에서, 이안은 인간형으로 폴리모프한 카르세우스 만을 대동하고 움직였다.
다른 소환수들은 지나치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뭐지? 괜히 으스스 한 게 좀 무서운데?”
이안은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카르세우스가 다시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둘의 귓전으로 낮고 칼칼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인간, 그리고 드래곤이라…. 보기 힘든 특이한 조합이군. 오, 게다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반마(半魔)였어. 오랜만에 보는 반인반마야… 후후….]
그 목소리에 이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시작했고, 그 목소리는 이어서 들려왔다.
[두리번거릴 것 없다, 놈. 나는 네놈이 볼 수 없는 곳에 있으니까.]
그에 멋쩍은 표정이 된 이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세라핌님이십니까?”
[그렇다, 내가 바로 분노의 도시 부성주인 세라핌이다. 나를 찾아온 건가?]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세라핌님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무슨 일이지?]
이안이 이리엘에게서 받은 퀘스트창을 다시 열어 슬쩍 한번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
“이리엘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파괴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
이안의 한 마디에 잠시간 저택의 정원에는, 고요한 적막이 맴돌았다.
그리고 세라핌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생각보다 중요한 손님이셨군. 이렇게 얘기할 문제는 아닌 것 같으니, 안쪽에서 대화하도록 하지.]
세라핌의 말이 끝나고 이안이 뭐라 대꾸를 하려는 순간, 이안과 카르세우스의 발 밑에서 붉은 빛이 원형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카르세우스가 대답했다.
“마법진인 것 같다.”
“마법진이라는 게 원래 원격으로도 그릴 수 있는 거야?”
“그건 나도 잘….”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던 둘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잠시 후 오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 * *
“후후, 듀얼클래스를 얻는 방법이 반인반마가 되는 것 이외에도 다른 루트가 있다는 걸 아는 놈들은 없겠지?”
분노의 도시 북부지구.
북문 밖으로 나가 마계 100구역의 한 음침한 던전에 들어선 남자는,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안 네놈이 운이며 실력이며 확실히 대단한 녀석이라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그래도 넘을 수 없는 벽은 있다는 걸 보여주도록 하지.”
수십이 넘는 가신들을 이끌고 던전에 진입하는 사내.
그의 허리춤에는 파란 빛이 일렁이는 장검 한 자루가 매여져 있었고, 그것은 카일란에서 가장 유명한 마검사의 증표와도 같은 물건이었다.
그는 바로 다크루나 길드의 길드마스터 ‘이라한’이었다.
“마스터, 정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이라한은 원래부터도 비공식 통합 랭킹 1위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 추측되는 최상위 랭커였다.
게다가 중부대륙 양대제국의 전쟁이 카이몬 제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되면서, 당연히 카이몬 제국의 실권을 가진 다크루나 길드의 세는 더욱 커졌다.
다크루나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이라한이 더욱 강한 힘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
얼마 전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영상들 중에서, 중부대륙 최고난이도의 던전인 홀드림의 신전을 이라한이 돌파하는 영상이 있었다.
당시 그 영상은 무척이나 화제가 됐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라한이 길드파티가 아닌 혼자의 힘으로 던전을 돌파하는 영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가신들만을 데리고 단일 유저의 힘으로 가뿐하게 던전을 돌파하는 모습은, 많은 유저들에게 감탄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원래 홀드림의 신전은 160레벨 이상의 유저로만 20명 풀 파티를 꾸려서 도전해야 공략이 가능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라한의 자신감은 최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유일하게 신경쓰는 존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존재가 바로 이안이었다.
파이로 요새 공성전 당시 이안의 전투능력을 가장 제대로 겪어본 것이 바로 이라한이었기 때문이었다.
‘마계 진입 자체는 이안놈보다 조금 늦었지만, 내게는 히든 퀘스트가 있으니까… 후후.’
이라한은, 자신이 지금 진행중인 퀘스트만 성공적으로 완료한다면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후후, 반마(半魔)는 결코 진마(眞魔)를 이길 수 없을 테지.’
이라한의 두 눈에 붉은 빛의 흉광이 스쳐지나갔다.
* * *
붉은 마법진과 함께 이안이 순간이동한 곳은 세라핌의 집무실이었다.
유럽의 바로크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문양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현란한 조각들이 수놓아진 세라핌의 집무실.
그 한 가운데 있는 석좌에 거구의 사내가 앉아 이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세라핌이었다.
“그래, 아이야… 이리엘에게서 파괴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단 말이지?”
세라핌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리엘님께서 파괴마들이 또다시 태동하려 한다며… 세라핌님께 도움을 청하라 하셨습니다.”
“흐음… 내 도움이라….”
“저는 정확히 모르지만, 마계 내부의 분란을 막아야 인간계와 마계의 전면전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라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리엘 그 아이는 참 신기하단 말이지. 어찌 그 먼 곳에서 마계 내부의 상황을 알아챘는지….”
세라핌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는 우락부락한 거구를 가진 전사의 모습을 한 인물이었지만, 파랗고 맑은 눈동자 안에는 현기를 가득 담은 현자의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마침 잘 왔어.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이리엘이 자네를 나에게로 보냈군.”
“그렇… 습니까?”
이안은 조심스레 반문을 하며 세라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퀘스트가 뜰 타이밍인가?’
그리고 이안의 예측처럼 여지없이 퀘스트 창이 그의 시야에 떠올랐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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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의 태동 Ⅲ (히든)(연계)-
‘반마’이자 노블레스 등급의 마족인 ‘세라핌’.
그는 마족이기 이전에 인간영웅 출신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마계와 인간계의 전면전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최근, 파괴마들을 주축으로 한 마계의 일부 세력이 인간계로의 침공을 획책하고 있으며, 그 계획의 일환으로 반대파인 세력들을 하나씩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아직까지 노블레스 이상의 등급인 마족들에게 마수를 뻗지는 못했지만, 몇몇 상급 마족들이 파괴마들의 계략에 빠져 징벌의 탑에 갇히거나 암살을 당하기 시작했다.
파괴마들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일반마족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그들에 대응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시켜야만 한다.
마계 80구역에 있는 ‘악마의 성’으로 가서 마왕 ‘레카르도’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퀘스트 난이도 : SS
퀘스트 조건 : ‘마족의 태동Ⅱ(히든)(연계)’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유저.
제한 시간 : 30일
보상 - ???
* 거절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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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를 다 읽은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도 그냥 NPC만 찾으면 되는 간단한 이동퀘스트네. 물론 80구역까지 뚫는 게 결코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지.’
게다가 30일이라는 제한시간도 있는 퀘스트였다.
제한시간이 짧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제한시간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이안에게 압박이 되기는 충분했다.
이안이 세라핌에게 물었다.
“마왕 레카르도님은 악마의 성 성주이신가요?”
이안의 물음에 세라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그분께 내가 준 서신을 전달하면 될 거야.”
세라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안의 눈 앞에 누런 두루마리 종이 한 장이 둘둘 말린 채 떠올랐다.
[‘세라핌의 서신’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세라핌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너무 늦어서도 안 되지만, 시간이 촉박한 사안은 아니니, 준비를 철저히 한 뒤에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지금의 네 능력으로 마계 80구역은 무척이나 위험한 곳일 것 같구나.”
세라핌은 노블레스 등급의 마족답게 이안의 마계등급을 한 눈에 꿰뚫어 보았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지 않아도 최소 듀얼클래스는 얻고 움직이려 했었습니다.”
“그래, 그것도 괜찮지. 상급 마족이라는 제법 높은 마계등급을 가진 반마라면 듀얼클래스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세라핌은 창 밖에 보이는 높게 솟아있는 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저 건물이 직업의 탑이라네. 저기에 가면 자네가 원하는 듀얼클래스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이안은 대답하기는 했지만, 물론 직업의 탑에서 듀얼클래스를 얻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07구역부터 먼저 가서 세르비안의 연구소에 가야겠어.’
세르비안으로부터 히든 클래스를 얻을 생각에, 이안은 벌써부터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아, 그리고 세라핌님.”
“말하시게.”
“‘얀쿤’이라는 상급마족을 아십니까?”
이안의 물음에 세라핌이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얀쿤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지. 한데, 자네가 그를 어떻게 아는 거지?”
이안은 세라핌에게 얀쿤과 있었던 일을 간결하게 추려 설명해 주었다.
물론 이안 자신의 활약상을 조금씩은 부풀려서 얘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노블레스 등급의 마족과 친밀도를 쌓아 놓는 것은 언젠가는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이안의 얘기를 전부 다 들은 세라핌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그런 일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얀쿤이 징벌의 탑에 갇혀 있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분노의 도시 부성주이신 세라핌님이 아예 모르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세라핌이 낮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 분노의 도시는 이미 파괴마들이 거의 장악했기 때문이지. 그들이 내 눈과 귀를 가리고 있어.”
“파괴마들이요?”
세라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주인 마왕 히키온도 파괴마에 물든지 오래다.”
그 말에 이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뭐야 그러면 세라핌의 힘으로도 얀쿤을 풀어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얀쿤의 해방여부는 이안의 전력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줄 것이었다.
상급마족이자 350레벨인 얀쿤이 이안의 전력에 합류한다면, 못해도 1.5~2배 정도의 전력상승 효과는 가져올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세라핌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안 이상, 얀쿤 정도는 내가 힘을 써서 징벌의 탑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으니 걱정 말게.”
이안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다행이군요. 그의 도움을 받아야 제가 마계 80구역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세라핌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면 3일. 늦어도 5일 안에는 얀쿤을 빼 내어 주겠네. 그 안에 자네는 듀얼클래스를 얻고 돌아오면 되겠군.”
“그러도록 하지요.”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라핌에게 볼 일은 전부 끝난게 맞는 건가? 이제 여길 나가서 3일 내로 세르비안의 연구소만 다녀오면… 해야 할 일은 더 없겠지?’
하지만 뭔가 빼먹은 듯한 찜찜함이 남아있었고, 이안은 곧 그 찜찜함의 원인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아, 맞다. 노예시장! 노예시장도 들러야겠어.’
마계에서 노예가 어떤 역할을 해 줄 수 있는지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분명 있는 것이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이안은 곧바로 세라핌에게 노예시장에 관한 정보를 물어보았다.
“세라핌님, 움직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시게.”
이안이 인벤토리에서 가지고 있던 노예계약서를 꺼내어 들며 말을 이었다.
“분노의 도시 중앙광장에 있는 노예시장에 대한 정보를 좀 얻고 싶습니다.”
그리고 세라핌을 향해 시선을 돌린 이안.
하지만 어쩐 일인지, 세라핌은 아무런 대답도 않고 있었다.
“세라핌님…?”
이안이 불러도 어디론가 시선이 고정된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세라핌.
이안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리고 세라핌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이안의 손에 들려 있는 노예계약서가 있었다.
‘뭐야? 왜 이걸 저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거지?’
이안이 다시 세라핌을 불렀다.
“세라핌님…!”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라핌이, 화들짝 놀라며 멋쩍게 웃었다.
“하, 하핫. 미안하네. 잠시 자네가 손에 쥔 물건에 정신이 팔려서 말이야.”
이안은 손에 들려있던 노예계약서와 세라핌을 번갈아 응시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거리에서 계약서 안에 쓰여있는 내용을 읽기라도 한 건가?’
그리고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세라핌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 정말 운이 엄청나게 좋군.”
< (2). 분란의 씨앗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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