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집요한 추격자 -1 >
이라한은 당황했다.
이안의 태도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태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짝 긴장했다.
‘이 멍청이는 뭐지? 설마 자기가 날 실력으로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북부로 도망간 게… 아니었어?’
이안의 태연한 표정은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연기였다면 남우주연상을 줘도 될 정도로, 이안은 이라한의 등장에 전혀 놀라고 있지 않았다.
‘이놈은 날 또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한데… 그렇게 멍청한 놈이었나, 이 놈이?’
하지만 이라한이 아는 이안은, 결코 멍청한 유저가 아니었다.
오히려 게임 이해도부터 시작해서 전투 센스까지.
이안은 무척이나 뛰어난 유저였다.
이라한의 등줄기를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이건, 함정인데….’
이라한이 생각하기에, 만약 이안이, 자신이 따라올 것을 예상하고 북부대륙으로 움직인 것이라면.
그리고 자신을 다시 한번 이길 수 있는 확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함정이었다.
이라한이 빠진 중부대륙의 전력은 무척이나 약해질 것이었으며, 여기서 이안이 이라한을 한번 더 죽인다면, 하루의 공백이 추가로 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어. 놈이 날 이길 수 있을 리 없다고.’
이라한은 쌍검을 뽑아들고는, 천천히 이안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자신의 본능은 경고를 알리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이안을 얕보지 않는다면, 그에게 패배할 경우의 수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자, 이라한의 마음속에 일던 약간의 불안감이 말끔히 사라졌다.
다시 자신감이 생긴 이라한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이안에게 대답했다.
“덕분에 아주 잘 쉬고 왔지.”
“그렇군.”
이안이 창극을 내뻗어 이라한을 향해 까딱거리며, 한 마디 더했다.
“그래서 하루 더 쉬고 싶어서 날 찾아온 건가?”
이라한의 표정이 구겨졌다.
“건방진 놈….”
이안과 이라한을 중심으로, 또 다시 넓은 공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제 있었던 중부대륙에서의 전투 때와는 달리, 전쟁 자체가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둘의 주변으로 다가가지는 않았다.
“뭘 믿고 그렇게 여유로운 지는 모르겠지만….”
이라한이 버프 스킬들을 캐스팅하며 이안을 노려보았다.
“그것이 허세라면,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이안이 피식 웃자, 이라한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카일란을 접고 싶도록 만들어주지.”
이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떻게?”
이안을 공격하려던 이라한은, 돌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을 검집에 다시 꽂았다.
그리고 품 속에서 붉은 빛깔의 약병 같은 것을 하나 꺼내어 이안에게 던졌다.
“받아라.”
탁-
“음…?”
이라한이 던진 약병을 받아 든 이안은, 약병의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
- 천리향 -
분류 - 잡화
등급 - 영웅
동방의 뛰어난 연금술사가 제조한 마법이 깃든 향수(香水)로, 그 향기가 30일 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또 천리 밖에서도 그 향기를 느낄 수 있어, 천리향(千里香)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향기는 아무나 맡을 수 없으며, 오직 같은 천리향의 향기를 가진 이에게만 느껴진다.
* 천리향은 30일 동안 지속됩니다. (사망 후 부활 시에도 지속시간은 남아 있습니다.)
* 천리향이 지속되는 동안, 매력 능력치가 30포인트 만큼 상승합니다.
* 천리향이 지속되는 동안, 통솔력이 10포인트 만큼, 모든 생산능력이 5포인트 만큼 상승합니다.
* 천리향이 지속되는 동안, 천리향의 효과가 남아있는 모든 유저의 위치와 좌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오호…?”
정보를 확인한 이안은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이러한 아이템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라한이 씨익 웃으며 이안을 향해 말했다.
“자신 있다면 그 향수를 뿌려라.”
말을 한 이라한은, 품 속에서 또 한병의 향수를 꺼내더니 자신의 몸에 뿌렸다.
그리고 이안은 그가 한 말의 의미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날 여기서 죽이고, 앞으로 30일 동안 계속 찾아와서 죽여 주겠다는 건가?’
사실 이 천리향은, 과거 이라한이 다크루나 길드를 관리할 때 사용하던 아이템이었다.
이 천리향을 길드원들끼리 사용하면, 길드원들 서로가 위치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무척이나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이안에게 천리향은 건넨 것은, 무척이나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잠시 말이 없는 이안을 보며, 이라한이 도발했다.
“겁이 나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이안은, 피식 웃으며 망설임 없이 천리향을 사용했다.
그러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천리향’ 아이템을 사용하셨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 ‘천리향’ 효과가 지속됩니다.]
[남은 시간 - ( 719 : 59 : 59 )]
:
:
이안의 눈 앞에, 천리향으로 인한 버프들과 효과들에 대한 설명이 쭉 나열되었다.
하지만 가장 신기한 것은, 눈 앞의 이라한이 미니맵 상에 붉게 표시된다는 점이었다.
망설임 없이 천리향을 사용하는 이안을 본 이라한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곧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쓸 데 없이 용감하군.”
그것은 오히려 이안히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할 소리.”
이라한은 다시 쌍검을 빼어 들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30일 동안… 최소 25번 정도는 더 죽여주도록 하지.”
이안이 귀를 후벼파며 대꾸했다.
“난 29번.”
“….”
25번이 되었던 29번이 되었던.
그렇게 30일동안 사냥당하고 나면, 이안이나 이라한 같은 고레벨의 유저의 경우 몇 달의 시간을 날리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랭커 타이틀도 떨어질 것이었다.
이라한은 말빨로 이안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몸을 날려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제발 그만 죽이라고 애원해도, 절대로 봐 주지 않을 테다!”
“난 무릎 꿇고 빌면 한번 정도 생각해 볼게.”
끝까지 이라한의 약을 올리는 이안!
이라한은 새빨개진 얼굴로 이안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챙- 채챙- 챙-!
그리고 이안은 여유롭게 이라한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라한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이전보다 공격의 정교함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이 맞부딪힌 지 10초 정도가 흘렀을까?
채챙- 푹-!
이안의 정령왕의 심판이, 먼저 이라한의 어깻죽지를 찌르는 데 성공했다.
“제길.”
약점포착의 공격지점에 틀어박힌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힘이 다 실리지도 않은 공격이었기에 어제의 찌르기보다는 훨씬 적은 데미지가 들어왔지만, 그것도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제법 피해를 입은 이라한이,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후읍….”
심호흡을 한번 한 이라한은, 이안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전략을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이안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진즉 이렇게 나왔어야지.’
이라한은 이안보다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이안을 지속적으로 괴롭힐 생각이었다.
주변을 빠르게 돌며 조금씩이라도 데미지를 입히면 이안으로서는 대응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그 전략에는 하나의 맹점이 있었다.
“할리, 이리 와!”
크르릉-!
이안은 근처에서 마족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할리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할리의 고유능력인 ‘바람의 수호자’를 사용했다.
할리가 아닌, 이안 자신에게.
[소환수 할리의 고유능력인 ‘바람의 수호자’를 사용합니다.]
[앞으로 2분 간, 모든 공격력, 방어력, 지능 능력치를 합한 만큼의 능력치가 민첩성에 추가됩니다.]
지금까지 이안은, 바람의 수호자 고유능력을 항상 할리에게 사용했었다.
할리의 순발력이 이안의 캐릭터보다 월등히 높았고, 그렇기 때문에 효율이 더 좋았던 것이다.
이안은 그저 빨라진 할리의 등에 올라타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렇게 유저와의 대인 전투를 벌일 때는, 할리를 타는 것 보다 캐릭터 자체의 순발력이 빨라지는 것이 더 편했기에 자신에게 버프를 건 것이었다.
그리고 이 버프라면, 기본 스텟이 딸리는 이안이라도 이라한보다 훨씬 빠른 순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라한도 순발력 관련 버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일란에 존재하는 그 어떤 순발력 버프도, 할리의 ‘바람의 수호자’ 보다 순발력을 많이 올려주는 것은 없으리라.
후우웅-!
한 줄기 바람이 이안의 전신을 휘감았다.
소환수가 다가오자 잠시 움찔 했던 이라한은, 다시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안은 창대를 고쳐쥐었다.
‘버프가 꺼지기 전에 죽여 주도록 하지.’
바람의 수호자 버프의 지속시간은 2분.
그리고 그 정도의 시간이면, 이라한을 한번 더 죽이기에는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이안이 자세를 바꾸더니, 이라한을 향해 뛰어들었다.
쾅- 콰쾅-!
강력한 힘이 실린 두 랭커의 무기가 격돌하자, 커다란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라한의 두 눈에 당혹감이 내려앉았다.
“뭐, 뭐지?”
이안의 움직임이, 방금 전 까지보다 배 이상은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챙- 채챙-!
이안의 창이 쉴 새 없이 이라한의 전신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라한은 침착히 공격을 쳐 내고 있었지만, 점점 수세에 몰리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포지션이, 지금까지와는 완벽히 반대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제길!’
이라한은 이안의 공격을 퉁겨내며 거리를 벌리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라한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이안이 그 길목을 차단하며 그의 옆구리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퍼억-!
[인간계 유저 ‘이안’으로부터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방에 거의 20~30% 정도가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생명력!
이라한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검을 휘둘러 카운터를 날렸다.
창은 무기의 리치가 길고 파괴력이 강한 대신 움직임이 커서, 큰 공격을 성공시키고 나면 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그 틈을 최소화시켜 이라한의 공격을 살짝 빗겨내었다.
그러나 이라한의 공격을 완벽히 쳐 내지는 못 했다.
[마계 유저 ‘이라한’으로부터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1598만큼 감소합니다.]
이안의 최대 체력을 생각하면, 정말 병아리 눈물만큼 들어오는 이라한의 데미지.
이안이 공격을 빗겨내며 많은 데미지를 흘려낸 데다, 항마력으로 인해 70%의 피해가 추가로 깎여 나갔기 때문이었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라한은, 경악하고 말았다.
‘뭐야? 이 괴물 같은 방어력은?!’
하지만 다음 공격을 성공시켰을 때, 이라한은 그것이 방어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격과 함께 추가로 ‘마기발동’이 터졌는데, 2만도 채 되지 않는 비루한 데미지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라한의 마기량은, 노블레스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마기량인 5만 조차도 예전에 훌쩍 넘겨버린 상태였다.
마기는 일반공격과는 달리 방어력을 무시하는 고정데미지였고, 이 피해량을 줄이는 방법은 오로지 항마력 뿐이었다.
그리고 이라한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자신의 딜이 박히지 않는 이유를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미친놈…! 항마력을 대체 몇 까지 맞춘 거야?’
마기가 터지며 들어가는 데미지를 본 순간, 이라한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제기랄, 이러니까 폭마섬에 맞고도 안 뒈진 거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린 이라한.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틈을, 이안이 그냥 넘어가 줄 리가 없었다.
팍- 파파팍-!
이안의 정령왕의 심판이, 무자비한 기세로 이라한의 흉갑을 우그러뜨렸다.
콰앙-!
그리고 정령왕의 심판에 달린 ‘심판의 번개’ 까지 떨어져 내리자, 이라한의 생명력은 순식간에 바닥까지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하루 더 푹 쉬고 오도록.”
이라한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안의 마지막 공격이 그의 하복부를 뚫고 지나갔다.
푸욱-!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라한의 신형은 그대로 무너져 내려갔고, 또다시 그의 시야는 까만 어둠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 (5). 집요한 추격자 -1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