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혼돈의 도시 -3 >
* * *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격렬한 승부.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힘과 힘의 대결에서 얀쿤은 승리했다.
키르얀이 방심한 탓도 분명히 있었지만, 얀쿤이 잘 싸워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휴우, 이겼다…!’
사실 얀쿤의 승급전 도전은 이안으로서도 꽤 위험한 도박이었다.
물론 무턱대고 걸었던 도박은 아니었다.
이안은 차원전쟁에서 노블레스 등급의 마족도 제법 상대해 보았고, 객관적으로 7할 이상의 성공확률은 있다고 생각한 도박이었다.
어쨌든 결과는 성공이었고, 승급전장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마왕 릴리아나의 가신, ‘키르얀’의 생명력이 10%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승급전의 룰에 의해 전투가 종료됩니다.]
[가신 ‘얀쿤’이, ‘키르얀’에게 승리했습니다.]
[37698위 였던 ‘얀쿤’의 마계 서열이, 438위로 상향 조정됩니다.]
[가신 ‘얀쿤’이 노블레스로의 승급을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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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이안은 히죽거렸다.
‘좋아, 좋아.’
이안의 이번 마계 여정의 최종 목표는, 최고의 마수를 연성해 내는 것이었다.
얀쿤의 노블레스 승급은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이안은, 승급전장에서 저벅 저벅 걸어나오는 얀쿤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수고했다, 얀쿤.”
얀쿤이 이안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고맙다, 주인. 그대 덕분이다.”
가볍게 이안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얀쿤은, 계속 걸음을 옮겨 마왕 릴리아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왼편에는 승급전에서 패배한 키르얀이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얀쿤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응시하던 릴리아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놀라운 일이군요. 상급마족, 그것도 첫 승급전을 치르는 상급마족이 서열 500위권인 키르얀을 상대로 승리할 줄이야.”
얀쿤은 말 없이 마계의 예를 취해보였고, 키르얀 또한 분한 얼굴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사실 마계에서 이런 케이스는, 정말 거의 없다시피 한 드문 경우였다.
릴리아나의 두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왕이 자신의 권능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릴리아나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마왕 릴리아나는… 상급마족 얀쿤이 지금 이 시간부로 노블레스가 되었음을 인정하노라.”
우우웅-!
릴리아나의 손을 떠난 붉은 빛이, 얀쿤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마족들의 얼굴에는 제각기 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미 노블레스 이상인 고위마족들의 경우에는 거의 호기심에 가까운 표정이었고, 상급 이하의 마족들의 경우에는 부러움이 담긴 표정이었다.
애초에 노블레스부터는, 승급 자체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노블레스로 승급하는 순간, 능력치 자체가 대폭 상승하게 되고, 마족으로서의 권능도 강해지게 되는데, 그 강해진 권능을 기본능력으로 메울 정도까지 성장해야 노블레스가 될 수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그리고 이것은 마왕으로의 승급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마왕의 권능과 노블레스의 권능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블레스가 마왕으로 승급하는 케이스는,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은 수준이었다.
이안은 뿌듯한 표정으로 얀쿤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의 눈 앞에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마왕의 권능이 발동합니다.]
[가신 ‘얀쿤’이 마족계급이, ‘상급마족’에서 ‘노블레스’로 승급합니다.]
[가신 ‘얀쿤’의 모든 전투능력이 5%만큼 상승합니다.]
[가신 ‘얀쿤’의 마기 능력치가 10%만큼 증가합니다.]
[가신 ‘얀쿤’의 마기 발동률 능력치가 2%만큼 증가합니다.]
[가신 ‘얀쿤’의 항마력 능력치가 2%만큼 증가합니다.]
[‘노블레스’로서의 ‘권능’ 슬롯이 생성됩니다.(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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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흐뭇하게 시스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던 이안의 시선이, 중간 정도에서 우뚝 멈춰섰다.
‘이건 뭐지…? 노블레스로서의 권능? 그런데 생성된 거면 생성된거지, 봉인은 또 뭐야?’
일단 이안은 모든 메시지를 전부 읽었지만,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들 중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그곳 뿐이었다.
이안이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보던 중, 얀쿤의 노블레스 승급 의식이 끝났고, 마왕 릴리아나가 문득 이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이채가 살짝 어려 있었다.
“이안, 얀쿤이 모시는 주인이… 그대였던가요?”
이안은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릴리아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랬던 거였군….”
그 말에 궁금증이 생긴 이안이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그래서 그랬던 거였다뇨?”
릴리아나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지금 당신의 가신인 얀쿤이 노블레스가 되었어요.”
당연한 얘기였기에 이안은 대답치 않고 릴리아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데 얀쿤에게는… 노블레스가 되었음에도, 노블레스의 권능이 허락되지 않더군요.”
그 말에 이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방금 전까지 고민하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이안이 릴리아나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요?”
“조금 의아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겠어요.”
살짝 뜸을 들인 릴리아나의 말이 이어졌다.
“그건 바로 당신 때문이에요.”
* * *
북부대륙의 동부지역에서 가장 커다란 영토와 성세를 자랑하는 영지.
또한 로터스 길드가 최초로 깃발을 꽂았던 거점지이자, 이안이 영주로 있는, 그리고 ‘소환술사의 영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곳.
‘로터스 영지’는, 계속해서 그 세가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최고의 일등공신은, 당연히 처음 로터스 영지의 성장기반이 되었던 ‘소환수 조련소’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외에도, 다양한 소환술사의 편의와 관련된 시설물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들 중에는 이진욱 교수가 새로 개척한 시설물도 있었지만, 다른 유저들이 가져온 컨텐츠들도 있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카일란에서 소환술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 바로 이 로터스 영지였고, 그렇다면 그 관련 생산클래스를 가진 유저들은 전부 이곳에 모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저들은 이 곳을, ‘서머너즈 벨리(Summoner’s Vally)’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소환술사들의 계곡’ 한 켠에서, 훈이와 카노엘이 어디론가 향해 걷고 있었다.
“아오, 제기랄. 이게 대체 무슨 퀘스트야 빌어먹을!”
툴툴거리는 훈이를 향해, 옆에서 걷던 카노엘이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그래서, 그 ‘데이드몬의 서’ 인가 하는 아이템을 찾으려면 마계로 가야한다는 거야?”
카노엘의 말에, 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렇다니까? 아니, 개발사에서 아예 마계로 가는 길 자체를 없앴는데, 퀘스트 진행을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망할…!”
훈이가 투덜거리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훈이는 차원전쟁이 끝난 후 직업 관련 퀘스트를 받았는데, 그것을 진행하던 도중 자신의 클래스와 관련된 히든피스를 발견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던 것.
계속되는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마계에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계는 이제 인간 종족의 유저가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는데….’
씩씩거리는 훈이를 향해 카노엘이 말했다.
“그럼 한번 고객센터에 문의라도 해 봐. 이건 기획부터 좀 잘못된 거 아니냐? 개발 자체가 잘못 된 거니까 어떻게 고쳐주지 않을까?”
하지만 훈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그럴 리가 없어, 형.”
“왜?”
“사실 마계로 가는 방법이 없는 게 아니잖아.”
“으응…?”
훈이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내 생각에 이 퀘스트는, 마족으로 종족변경을 해야 끝까지 진행할 수 있게 설계된 퀘스트인 것 같아.”
“어어…? 듣고 보니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데?”
차원전쟁이 지속되던 동안 마신의 제단에서 받을 수 있었던 종족변경퀘스트.
사실 그것은 차원전쟁이 끝나면서 함께 사라진 퀘스트였다.
애초에 마족이라는 종족이 새로 생성되면서 일시적으로 만들었던 퀘스트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일주일 전 쯤.
LB사에서 마족으로 종족변환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퀘스트를 다시 생성시켰다.
그러던 차에 훈이에게 이런 퀘스트가 주어졌으니, 뭔가 시기가 딱 딱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알겠지? 이건 기획단계에서의 실수가 아니라 의도인 것 같아, 형.”
카노엘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그러네. 개발사에서 어지간히 마족을 밀어주는 것 같아.”
하지만 훈이는 마족으로의 종족변환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얼마 전, 피올란이 오래 꼬득인 끝에 로터스 길드에 정식으로 들어왔고, 지금의 길드 생활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항상 혼자 게임하는 걸 고집하던 훈이에게는 작지만 큰 변화였고, 그로 인해 요즘 카일란이 더욱 재밌어지는 중이었으니까.
‘마족의 종족 매리트가 크게 끌리는 편도 아니고.’
잠시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카노엘을 따라 걷던 훈이가, 중얼거리듯 카노엘에게 말했다.
“그런데 형.”
“응?”
“혹시, 종족변환을 하는 것 말고도, 마계로 갈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 * *
“그게 저 때문이라니… 무슨 말이죠?”
이안은 당황했다.
자신 때문에 얀쿤의 노블레스 권능이 봉인된 것이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릴리아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반마인 것을 떠나서, 이안 그대의 마계 계급은 상급 마족. 그리고 얀쿤의 마계 계급은 노블레스.”
이안과 얀쿤을 번갈아 응시한 릴리아나가 다시 입을 떼었다.
“마계에서는 가신이 주인으로 모시는 이에게 허락되지 않은 마족의 권능을 발현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태초에 마신께서 정하신 율법이죠.”
그리고 이 말을 듣자마자, 이안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이안은 아쉬운 표정이 되어 입맛을 다셨다.
‘하긴, 지금 생각해보니, 계급이 더 높은 얀쿤이 내 가신이라는 것 자체가 좀 아이러니이긴 하네.’
그리고 그런 이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릴리아나가 말을 이었다.
“원래 상급 마족은 노블레스 마족을 가신으로 받을 수 없어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원래 있던 가신이 승급에 성공한 경우이니… 무척이나 특이한 케이스죠.”
이안은 확실히 이해가 되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망스러운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뭔지도 모르는 권능, 당장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언젠가 이안이 노블레스로 승급하게 된다면, 자연히 얀쿤의 권능도 봉인이 풀릴 것이다.
그리고 얀쿤의 전투능력은, 노블레스에 걸맞게 이미 성장한 상태였다.
‘그거면 충분하지.’
그런데 생각을 정리한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던 그 때.
릴리아나가 이안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예?”
“내가 이안, 그대에게 괜찮은 제안을 하나 할 까 하는데….”
< (4). 혼돈의 도시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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