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새로운 목표 -1 >
“으아아! 왜 또 저 녀석인 거냐고! 대체 왜!”
LB소프트의 모니터링실.
기획팀의 팀장인 김의환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기획3팀의 팀장을 맡게 된 김의환.
덕분에 최근 기분이 항상 좋았던 그였건만, 지금은 거의 세상을 잃은 듯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앉아있는 다른 기획팀의 팀원들도, 김의환 팀장과 별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다.
거의 흙빛이 된 얼굴들.
단 한사람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는 바로, 김의환이 진급하던 같은 날 대리로 진급한 나지찬이었다.
“뭐 그리 요란을 떠십니까, 대리님. 아니 과장님. 침착하십쇼.”
나지찬의 말에, 김의환이 버럭했다.
“지금 침착하게 생겼냐, 인마? 신컨텐츠 또 열리게 생겼다고! 아니, 새 컨텐츠 오픈되는 거야 그렇다 쳐. 생각했던 것 보다 약간 빠르긴 해도, 이제 슬슬 때 된 건 알고 있었으니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낸 그는, 씩씩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그 새 컨텐츠 발견한 놈이 하필 또 이안이냐고. 대체 왜!”
나지찬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그야, 이안갓이 짱이니까요.”
“….”
간단명료한 대답.
하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새로 열리게 생긴(?) 정령계 컨텐츠는 소환술사 유저만이 오픈할 수 있는 컨텐츠였는데, 소환술사 중에서 이안은 너무 압도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거의 다른 소환술사 유저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
사실 김의환도, 정령계 컨텐츠가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이안이겠거니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래도 너무하잖아…. 이제 고레벨 소환술사들도 충분히 많이 생겼는데…. 이안 빼고 아무나 좀 발견하지….’
김의환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안갓은 무슨…. 이안이 신이냐?”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사원이, 힘없는 어투로 나지찬을 대신해 대꾸한다.
“혹시 야근의 신이 아닐까요…?”
“….”
이안의 레벨업 속도와 퀘스트 클리어 속도는, 그야말로 상상초월이다.
거의 최고로 효율적인 루트를 찾아 움직이는데다, 무결점에 가까운 컨트롤. 게다가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게임에 투자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LB소프트 직원들에게 있어서 재앙이었다.
이안이 신규 컨텐츠 진입 퀘스트를 발견했다면, 오픈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과 일맥상통했으니까.
일반적인 유저가 신규 컨텐츠를 발견했다면 최소 반년에서 최대 일 년 정도는 여유 있게 준비할 수 있었지만, 이안이 발견한 이상 삼사 개월 안에는 모든 준비를 끝내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스크린을 응시하던 김의환은, 힘없이 걸음을 돌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한동안…. 기획3팀 전원 야근이다.”
하지만 상사의 야근선언에도, 반발하는 부하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김의환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야근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고오오오-!
광산 전체가 진동하며 커다랑 공명음이 울려 퍼진다.
‘뭐, 뭐야. 얼마나 대단한 놈이 소환되기에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건데?’
이안의 재산이 수억 이상 투자된, 말 그대로 ‘돈덩이’인 마력광산.
불안감에 사로잡힌 이안의 동공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흔들리면 광산이 무너져 내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한 탓이었다.
‘아, 아직 뽑아먹지도 못했는데…!’
이안은 울상이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광산 안에서 마법진을 발동시킨 것이 문득 후회되었다.
‘아냐, 아니지. 무너질 리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손에 땀을 쥐고 주변을 둘러보는 이안.
마법진을 발동시켜놓고 엉뚱한 곳만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뭔가 희극적이었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진동이 잦아들며 마법진 위로 새파란 빛이 뿜어져 나와 한 곳에 뭉치기 시작했다.
“오오…!”
옆에 있던 드워프 한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불안에 떨고 있던(?) 이안도, 안정을 찾고 마법진 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응시했다.
처음에는 그저 길쭉한 덩어리에 불과했던 푸른빛이, 점점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형체가 완성될수록, 이안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뭐지? 여자…?’
길쭉한 두 다리에 잘록한 허리.
가녀린 팔과 봉긋한 가슴의, 영락없는 여인의 모습.
눈이 휘둥그레진 채, 뚫어져라 그녀(?)를 지켜보던 이안의 입에서 곧 나직한 탄성이 새어나온다.
“깝….”
이안의 탄성에서는 아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성 나체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푸른 형체 위에, 쓸모없는(?) 천 쪼가리들이 덧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안의 눈 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한 줄 떠올랐다.
[물의 정령왕, ‘엘리샤’가 소환되었습니다.]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품 있는 자태를 뽐내는 푸른 빛깔의 여인.
청색과 백색이 물결치는 화려한 의장(意匠)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천천히 이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붉게 빛나는 앵두 같은 입술이, 살짝 반짝인다.
면사에 가려져 하관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미녀임이 틀림없었다.
물의 정령왕 ‘엘리샤’가, 이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인간이로군요.]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여기는 인간계…. 내가 인간계를 다시 밟을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이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기 사실 마계인데…. 뭐, 별로 상관은 없겠지.’
그리고 잠시 후.
허공에 떠 있던 엘리샤가, 사뿐한 걸음걸이로 바닥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녀의 발이 닿은 자리에, 가볍게 물방울이 튀어 오른다.
분명 흙바닥을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웅덩이를 밟은 듯 한 모습.
드워프 한이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과연…!”
엘리샤는 이안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고,
그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인간의 영웅이시여, 혹시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
생각지 못했던 전개에, 이안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뭐지? 이제 계약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판타지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일반적인 전개를 생각했던 이안.
‘인간이 나를 소환해 내다니…. 놀랍군! 자, 나와 계약하겠는가?’ 따위의 대사를 생각하고 있던 이안은, 벙찐 표정으로 되물었다.
“부탁… 이요?”
엘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셀라무스의 절대자이시여, 부디 우리 정령계에 도래한 어둠을 걷어주세요. 오래 전 과거처럼, 우리 정령들이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있게….]
엘리샤의 말은, 이안으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마치 인간과 정령이 현재 단절된 상태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대륙의 거의 모든 소환술사들이 정령을 부려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마당에, 그녀의 말은 뭔가 어폐가 있어 보였다.
엘리샤의 ‘부탁’이라는 것이 뭔지 궁금해진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부탁이라…. 가능하다면 들어드리도록 하죠.”
그리고 이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눈 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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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리샤의 부탁 Ⅰ (히든, 연계 퀘스트)-
당신은 셀라무스 부족의 절대자 시험을 통과한 뒤, 전대의 절대자인 에오스로부터 정령왕 소환 마법진을 인계받았다.
그리하여 소환된 정령은 바로 물의 정령왕인 엘리샤.
하지만 기계문명에 의해 오염되어 버린 정령계는 무척이나 황폐해져 버렸고, 그녀는 인간계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다.
무너져 가는 차원계를 지탱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의 정령왕 엘리샤는, 당신이 정령계를 파괴하는 기계문명을 몰아내고 정령들의 힘을 되찾아 주길 바란다.
만약 당신이 그녀를 돕는다면, 차후 그녀가 당신에게 힘을 빌려줄 것이다.
오염된 정령계로 가는 차원의 문을 열기 위해, 차원의 마도사인 그리퍼를 찾아가자.
엘리샤의 목걸이를 가져간다면, 그리퍼가 그것을 매개체로 차원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SSS
퀘스트 조건 :
천공의 제단에 이름을 올린 유저.
레벨 400이상의 소환술사 유저.
그리퍼와의 친밀도가 90 이상인 유저.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정령왕 엘리샤의 목걸이.
‘정령의 구원자’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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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내용을 전부 읽은 이안은, 400이라는 어마어마한 레벨제한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정된 난이도도 그렇고…. 이거 완전 거물급 퀘스트잖아?’
어쨌든 제한시간은 없는 퀘스트였기에 조금 여유가 생긴 이안은, 상황을 유추해 보기 시작했다.
정령계가 오염되었다는 이야기.
어쩐지 짹이의 정령력이 더 이상 오르지 않는 것과 연관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궁금증이 생긴 이안은, 오랜만에 짹이를 소환해 보았다.
짹- 째잭-!
그리고 소환된 짹이는, 평소와는 다르게 나타나자마자 얼음장처럼 굳어 쭈뼛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앞에 있는 엘리샤의 영향인 듯 보였다.
이안이 엘리샤에게 물었다.
“이 녀석… 혹시 아시나요?”
엘리샤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모르는 아이네요. 정령왕이라고 해도, 다른 계열의 아이들까지 전부 알지는 못한답니다.]
하지만 이안의 두 눈에는 이채가 떠올랐다.
어쨌든 정령이라는 것 까지는 바로 알아본 것이었으니까.
“그럼 혹시… 이 녀석이 진화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아시나요? 제가 오래전부터 키우고 있는 녀석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더 이상 정령력을 쌓지 못하더라구요.”
엘리샤가 빙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슬픔이 맺혀 있는, 그런 미소였다.
[상급 이상의 정령이 되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순도 높고 강력한 정령력이 필요해요. 하지만 정령계가 오염된 뒤로, 인간계에서는 그만한 정령력을 찾을 방법이 사라졌죠. 정령계의 영향력이 약해져 인간계까지 그 힘이 미치지 않고 있는 탓이에요.]
“아….”
[그리고 상급 이상의 정령이 활동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순도 높은 정령력이 필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상급 이상의 정령이 인간계에서 활동할 방법은 없답니다.]
엘리샤의 말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로서 모든 것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순간 짹이도 진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겠군. 그동안 정령이라는 컨텐츠 자체가 부실했던 이유도 전부 설명이 되고….’
이안의 의욕이 또다시 불타기 시작했다.
새로운 컨텐츠를 개척하며 떨어질 콩고물 생각에, 벌써부터 히죽히죽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엘리샤님의 부탁, 들어드리도록 하죠. 빠른 시일 내에 정령계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샤의 입에 환한 웃음이 맺혔다.
그녀의 웃음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고마워요, 이안님. 저희 정령들은 이안님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이안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감사는 일 다 끝난 뒤에 받도록 하죠.”
엘리샤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하지만 분명…. 절대자인 이안님이시라면, 정령계를 구원해 주실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야, 물론입니다.”
이안의 자신감 있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엘리샤가 또다시 빙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급할 필요는 없으니, 조금 더 힘을 키워주세요. 이안님께서 뛰어나신 건 알고 있지만, 저들은 무척이나 강력하답니다.]
퀘스트 조건에 걸려있는 400이라는 레벨제한.
아마도 그것 때문에 하는 대사일 것이라 짐작되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래. 최강의 마수를 연성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400이라는 레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할 지 알 수 없다.
최근에 고레벨의 신규 던전들이 많이 생성되어 레벨업이 조금 쉬워졌다고는 해도, 400레벨을 달성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마수를 연성하며 레벨을 올리고, 최강의 마수를 키워낸 뒤 정령계에 입성하리라.
“알겠습니다, 엘리샤님.”
그리고 목적이 생긴 이상, 이안의 레벨업은 더 빨라질 것이었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악몽일지라도 말이다.
< (5). 새로운 목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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